창 28:10-15/낙관과 비관을 넘어
280811 주일설교
낙관주의의 함정
2차대전 중 아우슈비츠수용소에 생존한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써서 의미치료분야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 심리학자 빅터 프랑클이 있습니다. 그는 참혹한 수용소환경에서 어떤 이들이 끝까지 생존하는가를 주의깊게 지켜보았습니다. 대체로 낙관적인 사람이 비관적인 사람보다 더 오래 살 것이라 생각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낙관적인 사람은 기대가 무너졌을 때 낙관한 만큼이나 크게 낙심하여 삶의 의지를 잃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예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들은 명확한 근거가 없는 데도 낙관적인 기대를 가지기를 좋아했습니다. ‘성탄절까지는 전쟁이 끝날 거야, 부활절까지는 풀려날 수 있을 거야…’ 바람을 투영한 낙관적 기대를 품지만 성탄절이 되어도 전쟁은 끝나지 않고 부활절이 되어도 여전히 풀려나지 않으면 그만 낙담하여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끝까지 가장 잘 견디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그들은 낙관주의자도, 비관주의자도 아닌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근거없는 낙관을 냉철한 이성으로 거부했습니다. 그렇다고 용기를 쉽게 앗아가는 비관론을 받아들이도 않았습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할 수 있는 모든 대비를 하는 한편 최선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희망의 끈을 잡고 용기를 잃지 않기 위해 애쓰며 매일매일을 견디기 위해 필요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동양적 표현으로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매일매일 살아갈 이유와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흔히 기독교인의 믿음을 무한낙관주의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니 모든 일이 바라는 대로 혹은 바라는 것보다 훨신 더 잘 될 것이라는 바람을 가지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를 태도를 부추기는 가르침이 소위 긍정주의를 퍼뜨리는 일부 목사와 교회입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로 대표되는 현대 긍정주의는 하나님을 기독교인의 바람을 모두 이루어 주시는 램프의 요정처럼 묘사합니다.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긍정하는 태도를 믿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런 이해에는 심각한 문제가 많습니다.
긍정주의의 부작용
첫째 이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바를 다 들어주신다고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으로 만들고 욕망의 투영한 자기최면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목사는 양복입은 무당이나 다름아닙니다. 출애굽 후 시내광야에서 산에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백성의 성화를 못이겨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다’라고 외친 것과 똑같습니다. 여호와라고 쓰지만 우상숭배라 읽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 예수님, 믿음이란 단어를 쓴다고 다 기독교신앙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우상숭배가 교회간판을 달고 횡횡하는지 모릅니다. 성공과 욕망과 물질을 섬기는 제단에 십자가를 걸어놓을 것 뿐입니다.
둘째 긍정주의는 실제 효과가 미미합니다. 긍정적 태도의 유익이 분명 있지만 긍정주의는 그 유익을 무척이나 과장합니다. 이는 마치 진통제를 만병통치약이라고 선전하여 큰 돈을 받고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긍정적 태도는 인생의 진통제 정도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병통치약이 결코 아닙니다. 긍정의 배신을 쓴 사회비평가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실제 암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긍정적, 낙관적 태도를 지닌 환자들이 비관적 태도를 지닌 환자들에 비해 뚜렷한 치료효과가 더 있다는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밝힙니다. 더구나 종종 낙관적 태도를 지닌 이들은 필요한 치료를 제 때 받는 일에 소홀하여 치료기회를 놓치는 등의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셋째 긍정주의는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합니다. 현실에 기초하지 않은 즉 비현실적인 낙관주의, 긍정주의는 빅터 프랑클이 지적한 낙담, 실망감, 우울 등의 부작용을 남기기도 합니다. 프랑스 작가 알랭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현대인이 중세 농노보다 훨씬 불안증세를 많이 느낀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소위 능력주의를 듭니다. 중세농노는 출생시에 이미 신분과 삶의 수준이 결정되어 있었고 이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에 그런 삶을 사는 것에 아무런 내적 갈등이 없었습니다. 현대인은 ‘노력만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에 세뇌되어 살아기기에 극소수의 성공한 이들을 제외한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실패했다’는 자기비하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한국사회에서 서울대생을 제외한 전국의 대학생들이 열등감을 갖고 살고 서울대생도 대부분 전공과 등수로 열등감을 안고 사는 것과 유사합니다.
능력주의의 부작용과 똑같은 문제를 긍정주의도 안고 있습니다. 긍정주의는 ‘당신이 성공하지 못 한 것은 긍정적 태도를 갖지 못 해서이다’라고 사실상 비난합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당신이 복을 못 받고 가난하고 병든 이유는 믿음이 부족해서이다’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하버드대의 마이클 샌덜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위대한 흑인야구선수 행크 아론의 전기를 소개합니다. 그는 인종차별이 일상이었던 남부에서 태어나 이를 악물고 연습한 결과 위대한 야구선수로 성공했다는 전기를 인용하며 이 사례를 들어 ‘너도 환경을 불평하지 말고 노력하여 행크 아론처럼 성공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합니다. 소수의 재능을 타고나고 운도 맞아떨어진 예를 들이밀며 일반화가 가능한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이를 악물고 노력해도 인종차별의 벽에 부딪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절대다수의 흑인을 패배자로 만들고 인종차별을이란 불의를 용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다수를 절망에 빠뜨리는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재능을 타고난 이나 평범한 이나 모두가 잘 사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도록 노력해야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예외적 성공을 목표로 차별받는 다수를 경쟁시키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적용하자면 기독교의 믿음은 성공한 소수의 사례를 들어 ‘믿음이 있으면 조엘 오스틴 목사처럼 엄청나게 큰 집에서 수천 억의 재산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치며 대부분의 기독교인을 패배자로 만들어 희망고문을 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내가 믿음이 부족하여 복을 못 받고 아프고 가난하고 실패를 겪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럼 성도가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야곱이 형을 속여 장자권을 가로챈 후 형의 복수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던 길에서 만난 하나님의 약속을 들려줍니다. 그가 얼마나 두렵고 외롭고 막막했겠습니까? 그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든 무사히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형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어떤 약속을 주십니까? 13-15절입니다.
(창 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창 28: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이 약속은 정확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과 더불어 야곱을 통해서 이루실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복을 받는 것 곧 메시야 예수님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 계획을 완성하시려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나타나시고 그들의 인생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어 천국백성 삼도록 명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 거대한 하나님의나라 완성의 일부로 부름받고 쓰임받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거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요, 그 계획성취의 도구로 쓰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
그런데 이런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보잘것없는 우리의 일상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우리는 이민생활을 하며 직장에서 일하고 먹고 살아야 하고 자녀를 양육하고 집을 고쳐야 하고 렌트비를 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계선교의 비전을 이루시는 분인 동시에 우리의 일상에도 관여하시는 분이십니다. 15절입니다.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에도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직장을 다니든지, 미국서 살든지 다른 나라에서 살든지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 곧 세계선교에 기여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숙해 가는 성화의 비전을 이루기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이 약속을 예수님이 다시 설명하시기를,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의 약속은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떠나지 않으신다’입니다. 무엇을 위해입니까? ‘당신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 곧 당신의 뜻을 다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약속은 우리의 부자되려는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를 순결한 당신의 신부로 만드는 것, 신실한 당신의 자녀로 삼는 것, 거룩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삼아 하나님나라를 상속케 하는 것입니다. 이 뜻을 이루기 위해 때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실패를 이용하기도 하십니다. 좌절도 사용하십니다. 안락과 성공과 승승장구함보다 고난과 실패와 좌절이 더욱 우리를 당신을 닮게 할 때는, 사실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데, 기꺼이 우리가 원치 않는 경험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가 바라는 것을 다 주신다는 믿음은 거짓이요, 우상숭배요, 욕망을 투영한 유아적 투정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적 현실주의
그러므로 주님의 세상을 향한 구원계획과 우리 개개인을 향한 구원의 뜻을 알게 되면 모든 일이 우리 자신의 바람대로 되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바람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합니다. 이런 믿음이 주기도문에 등장하는 이런 간구입니다.
(마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는 이는 하나님이 편한 길을 주시든, 험한 길을 주시든 감사함으로 그 길을 갑니다. 사도 바울이 가졌던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 바울은 선교여행의 오랜 경험을 통해 최악의 고난을 맞이할수도, 최선의 열매를 맺을수도 있음을 알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적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며 살아간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를 저는 성경적 현실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 성경적 현실주의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바른 삶의 태도입니다. 결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질병과 가난과 사고는 다 피해가고 기도하는 대로 집도, 차도 바꾸어 주시고 연봉은 올려주시고 아이들은 아이비리그 넣어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어떤 일을 겪든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믿음을 잃지 않도록 지키시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시고 이 모든 뜻을 다 이루도록 고난마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이를 믿는 자는 좋은 일이 생겨도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고난이 닥쳐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 주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을 믿으며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합니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도의 삶의 태도는 낙관도 비관도 아닙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닙니다.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위대한 태도는 무슨 일에든지 기쁨과 기도와 감사입니다. 세상을 거스르며 세상을 이기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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