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4 새로운교회 추수감사주일예배 “종에게서 받는 구원”(열왕기하 5:9-14) – 김도완 목사

11월 24, 2024

Book: 열왕기하

왕하 5:9-14/종에게서 받는 구원

241027 주일설교

1. 분노를 조절하기 어렵다

한국에 ‘금쪽같은 내새끼’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양육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의 부모가 방송국에 신청을 하면 그 집의 상황을 녹화하여 전문가들이 솔루션을 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아이들은 부모에게 욕설에 손찌검까지 하는 등 하나같이 부모의 복장을 터뜨릴 정도로 말을 안 들어서 속터지는 부모에게 감정이입이 저절로 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종종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이만이 아니라 그 부모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24시간 마스크를 쓰고 사는 아이’라는 제목의 방송의 짧은 클립을 봤는데요, 아이의 그릇된 행동에 결국 아버지가 소리를 지르며 아이에게 욕을 하며 달려드니까 엄마와 다른 가족이 매달려 말리는 장면이었는데요, 급기야 촬영진까지 나서서 아버지를 말리고 촬영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통제가 안 되는 아이뿐 아니라 그 아버지도 분노조절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자녀양육이 아닐까 하고 저 역시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모로 만드셨다’고 하는데 십분 공감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 아버지와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는지요? 자녀가 여러분의 뜻대로 안 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배우자가 여러분 뜻대로 안 될 때, 생업이 뜻대로 안 될 때, 인간관계가 뜻대로 안 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화가 나고 상처가 되고 잠이 안 올 정도로 괴롭지 않으십니까?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깨어진 전능감 때문이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답을 우리에게 줍니다. 어, 한 달 여 전에 읽었던 본문이 아닌가? 맞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드리자면 그 때 나아만이 화가 난 두 가지 이유 중 한 가지만 살펴보고 다른 한 가지는 다음에 살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때 살펴본 첫째 이유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 즉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 유익한 진짜 자존감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인간이 스스로의 성취, 업적, 소유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이유를 살펴봅니다. 나아만이 분노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전능감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전능감이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환상입니다. 자존감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라면 전능감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입니다.

나아만은 이 전능감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조국 아람을 위기에서 건진 영웅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신조는 ‘하면 된다’였을 것입니다. 출신과 재능과 노력의 결합으로 군대장관까지 오른 그는 나병을 고침받기 위해서도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을 따랐습니다. 그는 막강한 인맥과 엄청난 재력과 군대를 움직이는 권력을 동원합니다. 돈은 그렇다치곤 병원 가는데 인맥은 왜 필요하고 탱크와 전차를 왜 끌고 옵니까? 이 방식으로 그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 한 적이 없었고 당연히 이스라엘의 신과 선지자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인맥, 재력과 성취 등의 자랑거리는 인간에게 전능감이라는 환상을 심어줍니다. 세상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는 환상입니다. 아마 이런 환상에 가장 깊이 취한 이는 재벌이나 권력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의 돈과 권력으로 거의 못 하는 일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C.S.루이스라는 별명을 가진 팀 켈러 목사의 말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련을 만나 그를 찾아온 교인들 중 서민들치고 ‘삶이 이래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답니까?’하고 불평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고난과 실패, 좌절, 가난, 질병 등의 문제를 이미 겪고 있으며 언제나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반면 부유하고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은 비슷한 시련을 만나면 마치 절대 자신에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깜짝 놀라면서 화를 내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들은 삶의 모든 것을 자신의 능력과 재력과 인맥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왔기에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만나면 충격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3. 전능감은 문제를 일으킨다

이 전능감이 왜 문제가 될까요? 전능감은 첫째 인생에 미치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영향력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게 만듭니다. 둘째 전능감은 삶을 덮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셋째 무엇보다 전능감은 하나님의 은혜마저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낼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이 전능감의 문제는 그 뿌리가 무엇인지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창세기는 전능감이 인간의 죄악된 욕망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모든 것을 통제하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 이것이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죄된 욕망입니다. 하나님이 되고 싶다! 아, 저는 그런 전능감이 없어요, 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전능감의 욕구는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자녀나 남편이나 아내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고치고 싶은 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의 일정과 재정과 생활, 미래 등 인생의 모든 면에서 원치 않는 상황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은 그럴 능력과 자격이 되고 자신이 가장 이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이 가장 좋은 해결책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화가 나고 불쾌하고 불안합니다. 왜입니까? 우리 마음에 이 전능감의 환상이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전능감때문에 우리는 자꾸만 주변사람과 상황을 통제하려 합니다.

이 때 주변인들은 가볍게는 불편함을 느끼고 심하면 숨이 막히는 고통을 느낍니다. 엄마가 전능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자녀가 엄마를 못 견딥니다. 남편이 전능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내가 못 견딥니다. 사장이 전능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직원들이 못 견딥니다. 목사가 전능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교인들이 숨이 막힙니다. 효심과 성실함, 신앙으로 버틸 수는 있겠으나 그 관계에서는 자발적인 사랑과 기쁨이 없습니다. 의무감과 부담감만 가득 합니다. 무엇보다 신앙인이 전능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나님이 괴로우십니다. 결함투성이인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처럼 되려 하지 하나님을 알지도, 그 은혜를 입지도 못 합니다.

4. 전능감을 버리라

그래서 엘리사는 나아만이 전능감을 내려놓고 대신 무력감을 느낄 수 있도록 그를 철저히 무기력한 존재처럼 대하였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쉬운 일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시켰습니다.

(왕하 5: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너무나 쉬운 일을 명령했기에 나아만의 전능감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왕하 5: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강아지 새끼라도 할 수 있는 일을 나한테 시켜? 비유하자면 그는 마치 노벨수학상을 받은 석학에게 구구단을 풀게 했을 때 느낄 법한 굴욕감을 느꼈습니다. 아니, 이거 풀라고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오라고 한 겁니까? 아마 그에게 주변국 모든 왕들의 친서를 받아오거나 두 배의 예물을 내놓거나 몰고온 전차보다 더 큰 군대를 동원해 이스라엘을 도우라고 요구했다면 그는 화가 나기는커녕 도전적인 과제라고 여기며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자신은 그 정도 어려운 요구를 감당할 능력이 된다는 생각 곧 전능감에 마음이 편안했을 것입니다. 엘리사의 너무나 쉬운 요구가 나아만이 전능할 필요가 없고 전능하지도 않은 존재로 취급하는 것 같아 그는 화가 난 것입니다.

전능감에 사로잡힌 이가 은혜를 받기 어려운 이유가 이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얻기 위해 그 어떤 자격도, 능력도, 노력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우리 대신 모든 의를 다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이 흘린 보혈의 강물에 우리 영혼의 죄와 악의 나병을 씻으라고만 하십니다. 너무나 쉬워 보여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이토록 심각한 죄를 씻김받으려면 고생을 많이 하거나 착한 일을 많이 하거나 헌금이나 선교를 많이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그럴 능력이 있고 그럴 의지도 있어요, 하나님이 저의 수고가 필요하지 않으세요? 이건 너무 쉬워서 못 믿겠어요. 아니, 너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네가 전능하는 환상을 내려놓아라! 네가 나처럼 되려는 오만을 버려라! 그저 겸손히 보혈의 강물에 네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 담그고 모든 나병을 씻김받으라! 믿고 순종하시길 축복합니다.

5. 종의 말을 들으라

그럼 어떻게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전능감의 환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까? 나아만을 보십시오. 그는 누구 말을 듣고 강에 몸을 씻어 치유를 받았습니까? 바로 종의 말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왕하 5: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항상 종에게 명령하기만 하던 그가 오히려 종의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그의 구원은 이 종의 말을 듣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고향 아람에서 이스라엘 출신 여종의 말을 듣고 이 여행을 결심했습니다.

(왕하 5:3) (여종이)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그에게 요단강물에서 씻으라는 말을 전해 준 것도 엘리사의 종이었습니다. 그가 세 번에 걸쳐 종의 말을 듣고 자신의 전능감을 내려놓고 순종함으로써 비로소 겸손을 배웠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종의 말을 듣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어떤 종의 말입니까? 바로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 되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입니다. 사 42장에서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종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사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리고 변화산에서 그 종을 가리켜 당신의 아들이라 하시며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 17:5) …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아들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전능감이 깨어지고 대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생깁니다. 그 때에라야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가족, 일터, 인생이 망하는 길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에도 분노하고 좌절하고 실망하고 의심하는 대신 감사하고 찬양하고 인내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네온사인을 꺼야 비로소 밤하늘의 찬란한 별이 보이듯 전능감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 삶의 태도가 바뀝니다. 자신이 바꾸려 하던 아이와 배우자의 말을 오히려 듣습니다. 자신이 통제하려던 세상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자신의 인생조차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음을 고백하고 겸손합니다.

(약 4:13)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하는 사람들이여, 들으십시오. (약 4:14)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약 4:15)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새번역)

이 말은 아무 계획없이 살라는 뜻이 당연히 아닙니다. 인간이 계획을 세워도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 분의 일하심을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제서야 우리 마음의 분노가 가라앉고 상처가 치유됩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화가 나 있습니까? 종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보혈의 강물의 여러분의 영혼을 씻어 모든 죄와 상처의 나병이 깨끗이 치유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