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5 새로운교회 주일예배 ‘수치를 딛고 일어서기'(마태복음 26:69-75) – 김도완 목사

12월 14, 2024

Series: 주일예배

Book: 마태복음

마 26:69-75/수치를 딛고 일어서기

241215 주일설교

1. 수치와 영성

지난 주에는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는 언제였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면 오늘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부끄러웠던 시기는 언제였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고통과 달리 수치는 인간의 고유한 감정입니다. 동물도 고통, 공포, 욕망을 느끼지만 수치를 느끼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키우는 강아지가 푸푸하는 모습을 들켰다고 부끄러워하거나 주인의 명령을 어겼다고 수치스러워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나요? 그러므로 수치는 인간에게만 있는 고유한 경험이면서 대단히 영적인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두 명의 전도자 베드로와 바울이 그 누구보다 더 수치스러운 경험을 가진 사람이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수치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중요한 재료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 이제 질문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웠던 경험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질문을 베드로에게 던진다면 바로 오늘 본문의 이 순간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2. 베드로의 착각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가 보려는 마음과 동시에 두려움에 멀찍이 그 뒤를 좇아갔습니다. 무리가 드나드느라 열려있었던 대제사장의 집 마당 바깥 뜰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아본 종들에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지막엔 예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며 맹세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닭이 울자 이를 예견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도덕적, 영적으로 크게 실패했습니다. 그를 더욱 비참하고 수치스럽게 만든 이유는 그가 예수님에게 절대 이런 일은 없을 것이라 장담했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봅니다.

(마 26: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 26: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던 베드로의 마음은 진실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는 진실로 확신에 차서 장담했습니다. 그는 조금도 자신의 신실함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정말 사랑했고 그렇기에 결코 그를 부인할 마음도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자신의 확신과 달리 약속을 지키는데 실패한 것일까요? 그는 몰랐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말입니다. 자신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도, 믿음도, 신실함도, 약속도 모두 공포와 고통 앞에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인지를 그는 몰랐습니다. 모래성 같은 인간의 의지를 바윗돌인 줄 착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너무 믿었습니다. 베드로를 실패하게 만든 이 헛된 믿음이 오늘 우리도 넘어지고 수치를 겪도록 만듭니다.

3. 어리석은 자기확신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 5: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우리 문화는 맹세하지 않는데요? 적용하자면 이는 곧 장담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반드시 이렇게 할 거야, 나한테 맡겨봐, 다 돼.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안 변해. 이렇게 된다니까, 나를 믿어… 모두 장담하는 말이요, 맹세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스스로를 믿는 어리석음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이들일 수록 새로운 정보, 지식 습득에 게으릅니다. 마음이 닫혀 있습니다. 유연하고 열려있는 대화가 안 됩니다. 영적 성장이 어렵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알지 못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들도 여전히 자신을 믿는 어리석음에 갇혀 있곤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기보다 자신의 믿음을 믿습니다. 이토록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니 자신이 구원의 자격, 은혜입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에 베드로처럼 생각합니다. 나는 절대 믿음을 떠나지 않을거야, 나는 절대 교회를 떠나지 않아! 바로 그 믿음 때문에 넘어집니다. 반드시 넘어집니다. 베드로처럼 넘어집니다.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만약 베드로가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제대로 알았다면 예수님의 꾸지람 앞에 이렇게 엎드려 간구했을 것입니다.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믿지 말고 신실하신 주님을 믿는 겸손한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4. 성공의 후유증

그럼 베드로가 이런 자기확신에 빠졌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경험한 성공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열두 제자 중 돋보이는 열정과 헌신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이였습니다. 여러 번 영적 성공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예 중 하나가 갈릴리호수에서 제자들의 배가 풍랑을 만나 고생할 때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실 때 일어난 일입니다. 모든 제자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데 오직 베드로만이 용기를 내었고 엄청난 경험을 하였습니다.

(마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마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그는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물 위를 걸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 위를 걷는 기분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다른 제자들이 그를 얼마나 우러러 보았을까요? 이 사건으로 가장 흥분한 사람은 바로 베드로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물 위를 걷다니! 나를 보는 제자들의 눈빛을 봐! 얼마나 대단한 경험인가! 이런 거듭된 성공이 자신을 믿도록 만드는 착각을 일으켰습니다. 일종의 성공의 후유증입니다.

우리 사역이 성공적인 열매를 남길 때,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을 때, 그래서 그 사역이 자부심으로 남을 때 우리는 더욱 자신을 믿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 때 잊어버리는 진리가 이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은 그의 용기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르심 때문이라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거센 풍랑이 이는 두려움의 바다도 거뜬히 건너갈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베푸신 은혜라는 진리입니다. 우리 사역의 열매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는 순간 우리 자신의 헌신, 재능, 믿음, 열정의 결과라 착각하고 자신을 믿는 믿음은 더 커집니다.

나무위키란 인터넷사전을 보니 ‘부심’이란 은어가 있답니다. 자신이 느끼는 자부심의 종류에 따라 좋은 차를 자랑하는 차부심, 자전거를 자랑하는 자전거부심, 강남에 사는 것을 자랑하는 강남부심, 공대나온 것을 자랑하는 공대부심, 김씨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임을 자랑하는 김씨부심도 있답니다. 이 외에도 온갖부심이 다 있던데 혹시 여러분의 마음에는 믿음부심, 섬김부심, 사랑부심, 인내부심, 친절부심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로 그 부심이 여러분을 넘어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과 섬김의 열매를 경험했든 그것은 모두 주님의 능력과 신실함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겸손하고 감사하시기 축복합니다.

5. 회복하시는 

베드로처럼 실패한 사람은 대게 어떤 선택을 할까요? 그는 자신의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는지 깨닫고 크게 낙심한 나머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처럼 갈릴리 호수로 돌아가 고기잡이를 한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던 사명의 부르심을 포기하고 다시 생선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영적 퇴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 도덕적 실패는 우리도 자포자기하고 예전 삶으로 퇴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선하고 신실하신 주님은 그런 우리마저 포기하지 않고 찾아와 다시 섬김과 구원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낙심하여 갈릴리 호숫가에 물고기를 잡고 있던 그를 부르셔서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요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세 번이나 반복해 사랑을 확인하신 이유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그의 잘못을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불완전하나마 그의 사랑고백을 온전한 것처럼 받으시고 그에게 다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사명, 당신의 양을 치라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영적, 도덕적으로 실패한 사람이 회복되는 길은 자신의 노력으로 죄값을 치르고 다시 성실함과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노력은 오히려 더더욱 자신을 바리새적 위선에 빠지게 만들 뿐입니다. 자신의 무기력함을 철저히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씻으시고 그 은혜로 다시 기회를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긍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죄를 당신이 씻으십니다. 불완전한 사랑과 믿음도 완전한 것처럼 기쁘게 받으시고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다시 믿음을 회복시키십니다. 새 삶을 허락하십니다. 새가정을 세우십니다.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십니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보다 크고 예수님의 은혜는 바다보다 넓습니다. 그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여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