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3:42-52/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삶
240211 주일설교
회복탄력성
‘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를 보셨는지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아들과 함께 홈리스로 전락한 크리스가 역경을 딛고 최우수세일즈맨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입니다. 역경을 딛고 일어난 크리스의 마음가짐을 설명하기 위해 심리학에서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란 말을 씁니다. 크고 작은 역경과 시련을 겪을 때 위축되고 낙심한 채로 주저앉지 않고 더 높이 뛰어 오를 수 있는 마음의 근력을 의미합니다.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시련이 오히려 도약의 발판이 됩니다. 여러분 자신뿐 아니라 자녀들도 회복탄력성이 높은 마음을 갖기를 원하시겠지요? 여러분이 겪은 시련을 자녀들인들 겪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들도 시련을 딛고 일어나 더 높이 도약하려면 이런 회복탄력성이 꼭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우리는 놀라운 회복탄력성을 보여주는 이들에게서 그 답을 배웁니다. 그들은 바로 본문의 주인공 바울과 바나바 선교팀입니다.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이유
오늘 본문은 1차 전도여행 중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날의 튀르키에 중부 비시디아안디옥에 이른 선교팀은 안식일에 회당을 방문하여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뿐 아니라 비유대인들까지 복음에 관심을 가지자 일부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이들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선교팀은 회당을 떠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지방에 말씀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번에는 그 유대교에 관심을 가지는 부유한 부인들과 유지들에게 거짓말로 비방하여 선교팀을 박해하였습니다. 정확히 어떤 박해인지는 묘사되지 않으나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밝힌 이런 종류의 박해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고후 11:23) …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고후 11: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결국 이런 일을 당한 선교팀은 비시디아안디옥을 떠나 이고니온으로 옮겨갔습니다. 억울하게 이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괴롭고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선교팀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본문 51-52절입니다.
(행 13: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행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그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어떻게 박해를 당하고 쫓겨가는데 슬픔과 분노가 충만한 대신 기쁨과 성령이 충만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야말로 오늘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데 꼭 알아야 할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의의 길을 가려는 성도는 누구나 이런저런 모습으로 세상의 시기와 박해를 당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거짓신자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참신자는 반대로 가만두지 않습니다. 유혹하고 공격하고 박해하여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기와 박해를 늘 각오해야 하며 그런 일을 당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 선교팀은 어떻게 이런 시기와 박해에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할 수 있었습니까?
은혜를 가득 채워주셔서
첫째 이유는 은혜의 하나님이 선교팀의 마음을 은혜로 가득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이사를 했습니다. 예전 집에서는 벽에 못박기가 쉬웠습니다. 그런데 새집에서는 못박기가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왜인가 봤더니 예전집은 벽이 나무고 그 뒤는 텅비어있었는데 새집은 나무벽 뒤에 콘크리트가 꽉 차있는 것입니다. 나무집은 아이들이 다니다 넘어져 부딛쳐도 벽이 움푹 들어가버렸습니다. 이 집은 망치로 두드려도 못구멍 하나도 내기힘들만큼 단단했습니다. 강한 집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집과 같습니다. 흘기는 눈빛 하나로도 부스러뜨릴 수 있는 약한 마음이 있는가 하면 저주와 비방과 위협으로도 부술 수 없는 강한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은 자녀들의 마음을 바위처럼 강하게 만드십니다. 어떻게요? 나무벽 뒤에 콘크리트를 가득 채우듯 마음에 충만한 은혜를 채워주십니다. 딤후 2장입니다.
(딤후 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디모데야, 너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다! 우리 마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콘크리트처럼 마음을 단단하게 만듭니다. 은혜는 상처도 금방 아물게 만듭니다. 그래서 은혜가 가득하면 시기를 당해도 속상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가득하면 미움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가득하면 박해를 당해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은혜로 강한 사람은 오히려 시기와 미움과 박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돌아보게 만드는 전화위복을 경험합니다.
이런 은혜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신기한 능력이 흘러나와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고 강하게 만듭니다. 베드로사도가 이렇게 썼습니다.
(벧후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신기한 능력이 흘러나옵니다. 이 능력은 멸망할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죄인마저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이 능력이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만드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나무벽처럼 약합니까, 콘크리트벽처럼 강합니까?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 차서 어떤 마귀의 공격에도 부서지지 않는 콘크리트같은 마음 되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을 가득 채워주셔서
선교팀이 시기와 박해에도 쓰러지지 않았던 둘째 이유는 하나님이 선교팀의 마음을 믿음으로 가득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이고니온으로 갈 때 그들이 취한 행동입니다. 본문 51절을 다시 보십시오.
(행 13: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그들은 왜 발의 티끌을 털어버립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눅 10장에서 제자들을 갈릴리 각 마을로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0: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눅 10: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발의 먼지까지 털어버린다는 것은 그들과 자신이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행동입니다. 왜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이들과 전도자들이 상관없어야만 합니까? 다가온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은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에 전도자가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을 먼지까지도 털어버리는 행위로 상징하는 것입니다. 선교팀은 이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복음을 거부하고 전도자를 박해하는 그들의 행위를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실 것임을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로마서 12장입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실 것을 확실히 믿는 이들은 시기와 박해에 분하고 미워하고 억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긍휼히 여깁니다. 그리고 시기와 박해를 견딘 이들에게 주실 상으로 인해 기쁨이 생깁니다.
(눅 6: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눅 6: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주를 위해 욕을 듣고 괴롭힘을 당한 성도 여러분, 기뻐하고 뛰어노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주실 법한 상을 주실 것입니다. 아무 욕도 듣지 못 하고 편안하게 지내시는 여러분, 속상해하고 안타까워하십시오. 아무 상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곁에 있는 형제들에게 좀 부탁하세요. 나한테 욕 좀 해줘. 미워하고 막 때리고 그래줘. 우리 선조들은 복음을 위해 매맞고 갖히고 순교까지 당했는데 우리는 이 안전하고 풍요로운 나라에서 주를 위해 욕도 한 번 안 먹고 신앙생활 했다면 얼마나 날라리로 산 것입니까? 주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고 뛰어노는 믿음으로 가득 차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명을 가득 채워주셔서
선교팀이 시기와 박해에도 쓰러지지 않았던 마지막 이유는 하나님이 선교팀의 마음을 사명으로 가득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박해를 받은 그들은 어디로 갑니까? 다시 51절입니다.
(행 13: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이고니온으로 갑니다. 비시디아안디옥에서 이런 시기와 박해를 받았는데 이고니온이라고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고니온은 적어도 우리를 환영하고 영접할 것이야라는 기대로 가는 것이겠습니까? 그럴리가 없지요. 지금까지 거쳐온 도시가 다 그렇듯 선교팀을 기다리는 것은 또다른 시기와 박해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왜 또 이고니온으로 갑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비시디아안디옥이든 이고니온이든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시기와 박해를 당할 줄 알면서도 그들은 복음을 전하러 간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시기와 이방인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적지않은 복음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십시오.
(행 13:43)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행 13: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바로 이들 때문에 기뻤던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건져내고나니 옷이 다 젖고 셀폰은 망가지고 파김치가 되었습니다. 짜증나고 억울하고 원망스럽겠습니까?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났으니 옷이 대수고 셀폰값이 대수고 피곤한 게 대수입니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를 구원하는데 쓰임받은 것이 선교팀에게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무엇이중한디! 뭐가 중요합니까? 시기와 박해를 좀 당하면 어떻습니까? 영생받기로 작정하신 자를 다 구원해 주셨는데! 성도는 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가장 기쁘고 복된 사람들입니다. 이 기쁨이야말로 우리 인생에 가장 큰 기쁨이요, 의미요, 사명입니다.
이 사명으로 충만한 사람은 어떤 시기와 박해도 그 기쁨을 빼앗지 못 합니다. 온갖 시기와 박해에도 기쁨과 성령을 잃지 않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선하신 하나님이 충만한 은혜와 충만한 믿음과 충만한 사명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시선을 떼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늘 들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성도는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삶을 누립니다. 천국을 누리는 삶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어떤 세상의 시기와 박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믿음과 사명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기쁨과 성령충만을 빼앗아가지 못 합니다. 여러분은 슬픔과 우울이 충만합니까, 기쁨과 성령이 충만합니까?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천국백성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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