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22-26/성도가 승리하는 법
240319 종려주일
1. 성찬식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가지신 최후의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고난이 인류를 위한 속죄의 언약을 맺는 사건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주신 떡과 잔은 죄값으로 찢기고 피흘려 죽어야 하는 죄인들을 대신해 당신의 찢긴 몸과 흘린 피를 상징합니다. 구약시대 여호와는 속죄제물 양을 잡아 피흘림으로 백성의 죄를 사하시겠다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신약시대 하나님은 속죄제물 예수님을 죽여 피흘리심으로 그들의 죄를 사하시겠다는 새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이 세상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심으로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이제 다같이 감사와 믿음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겠습니다. 찬양합니다.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후렴>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2.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
아멘. 오늘은 교회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 백성이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나와 흔들며 영접한 사건을 기려서 붙인 이름입니다. 복음서를 근거로 예수님의 일정을 대략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안식후 첫 날인 이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월요일에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어지러운 성전을 정화하시고 백성을 가르치셨습니다. 화요일에는 감람산 언덕에서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보고 슬퍼하시고 종교지도자들과 논쟁하셨습니다. 수요일에는 베다니에 머무시며 고요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목요일에 제자들과 최후의만찬을 하시고 대제사장의 종들에게 체포당하셨습니다. 금요일에는 재판받으시고 고문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셨습니다. 토요일 안식일에는 무덤에 머무셨습니다. 주일 곧 안식일 후 첫날 아침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한 주간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새벽기도를 내일 월요일 아침부터 토요일 아침까지 온라인으로 드리겠습니다. 평소 새벽기도에 참여하지 못 하시던 분들도 이 한 주간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데 동참하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금식기도에 참여하시기를 권합니다. 여건이 되는 분들은 매일 아침을 금식하며 기도회에 참여하시를 권합니다. 여의치 않는 분들이라도 이번 주간 어느 날이든 적어도 한 끼를 정하여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참여하시기를 권합니다. 금식은 우리의 위장만 비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주님의 고난의 은혜를 충만히 채우는 시간입니다. 기도와 금식을 통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주님과 더 깊고 친밀한 관계를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3. 죽음의 위협
예수님은 성만찬을 통해서 당신이 당하신 고난이 당신 스스로 택하여 겪으실 일임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은 당시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했듯 누가 봐도 실패와 절망으로 보입니다. 우리라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을 터이고 지금도 그런 이를 보면 똑같이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 이를 택하셨습니까? 사실 그것이 실패와 절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모든 죄값을 치르셨고 부활을 통해 사망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사실은 진정한 승리였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승리는 거저 거둔 것이 아닙니다. 여러 번 좌절될 위기가 있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이 계획을 실패로 만들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애 내내 이 사탄의 위협과 싸우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세 번의 대표적인 위협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했던 헤롯대왕의 위협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찾아온 동방박사에 의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헤롯왕은 이를 명백히 자신의 왕좌에의 도전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좌를 지키고자 예수님 탄생을 즈음하여 두 살 아래 아기들을 모두 죽이라는 잔인무도한 명령을 내립니다.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헤롯의 칼날에 목숨을 잃을 위기를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의 손길로 예수님을 지키셨습니다.
(마 2: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기 예수님의 가족은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헤롯왕이 죽은 후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아기 예수님은 몰랐겠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보호받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안전하고 평안하게 오늘을 사는 것은 거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의식도 하지 못 하는 동안 끊임없이 지키는 손길이 우리의 안위를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엘살바도르보다 안전하게 사는 이유는 공권력과 경찰력이 밤낮없이 작동하며 치안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도로에서 경찰차에 잡힐 때만 경찰의 존재를 의식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오늘도 아침에 별일없이 눈뜨고 음식을 먹고 소화하고 일하며 가족과 이웃과 교우와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늘 잊어버리지람 생명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눈과같이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병상에 누웠을 때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고 일으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위기와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보호하여 주시기에 여기 우리가 안전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 121: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러분의 생명과 가족과 삶을 지켜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심으로 인해 평안과 감사가 끊이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4. 쉬운 길을 가라는 유혹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가 실패한 사탄은 장성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공생애를 시작하지 못 하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성령님께 이끌리어 광야로 가셔서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시고 기도하실 때였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세 가지로 유혹합니다. 배고픔에 고통하는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것이 첫째였습니다. 둘째는 성전에서 뛰어내리고도 멀쩡한 기적으로 일으키라는 유혹이요, 셋째는 마귀에게 경배하고 온세상을 다스리는 영광을 얻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좁고 험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길을 가지 말고 욕망을 좇는 쉽고 편한 길을 가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 늘 받는 유혹입니다.
하나님을 좇는 성도에게 항상 이런 유혹이 뒤따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은 늘 어렵고 고통스럽습니다. 쉬운 길을 가라는 유혹이 끊이지 않습니다. 말씀보다 돈을 좇아야 할 것 같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의심스럽고 세상이 주는 영광이 탐스럽습니다. 우리가 매일 지견하는 유혹입니다. 이 모든 유혹을 예수님은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진리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런 유혹을 이기는 길은 오직 진리의 말씀과 기도의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말씀으로 진리를 가득 채우고 기도로 성령님의 불을 붙이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이런 유혹을 이기지 못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을 의지하여 날마다 사탄의 유혹을 이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5. 자신의 길을 가라는 유혹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시도를 막으려는 사탄의 마지막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죽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을 하나님은 정반대의 목적으로 시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역시 예수님을 죽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각각 예수님을 죽음의 길로 이끌려 하였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오묘한 구원의 섭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 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해 악한 대제사장의 손아귀에 들어왔을 때 자신이 이길 줄 알았습니다.
이 순간 정작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가로막는 것은 사탄이 아닌 예수님 당신 안에 있는 괴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인류의 죄를 모두 지고 그 죄값으로 하나님에게 버림받아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할수만 있으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길을 떠나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아버지의 뜻을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셨네. 당당히 믿음으로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 아니야? 예수님 맞어?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고난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다른 이를 쉽게 정죄합니다. 그런 사람이 말씀의 칼날을 장착하면 더 매섭고 가혹한 가해자가 됩니다. 바로 예수님의 꾸지람을 쉴새없이 들은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매서움과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조차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네, 아무튼 분명 예수님의 내적 갈등은 하나님의 뜻을 무산시킬 수 있는 위험이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천사를 보내어 도우셨습니다. 겟세마네동산의 기도를 천사가 도왔습니다.
(눅 22: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님은 천사의 도움을 받아 힘을 내어 마침내 수치와 두려움을 피하고픈 자아를 굴복시키고 하나님께 완전히 순중하였습니다. 이 길 말고는 인류를 대속할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에 결국 자신을 굴복시키셨습니다.
(눅 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오늘 우리도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원한다면 자신을 굴복시키는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도록 자신을 굴복시키는 기도여야 합니다. 이것이 어렵고 싫어서 기도를 멀리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굴복이 없기에 우리의 기도가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순종하기를 원하고 자아를 하나님께 굴복시키기를 원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어 우리를 도우십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더욱 굴복하는 기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6. 최후승리를 얻기까지
예수님은 어떻게 승리하셨습니까? 세상이 하듯 자기 뜻과 자아를 내세우심이 아닙니다. 영광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가 아닙니다. 이기고 물리치심으로써가 아닙니다. 반대로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심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심입니다. 지고 잡히고 찢기고 죽으심으로써입니다. 이 죽으심으로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그들을 구원하셨고 동시에 부활하셔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고 승천하셔서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사셨습니다. 패배함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바로 이 원리를 알고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우리도 짐으로써 이기고 죽음으로써 삽니다.
(눅 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에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향해 걸어감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부활의 승리를 예약하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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