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1:17-2:10/껍질을 벗기시는 하나님
240428 주일설교
고래뱃속에 밀어넣으시는 하나님
파충류와 양서류, 갑각류는 탈피를 합니다. 탈피란 몸을 둘러싼 딱딱한 껍데기를 벗는 것으로 ‘허물을 벗는다’라고도 합니다. 보통 1년에 적어도 1회 이상 하는 탈피의 목적은 성장입니다. 다른 생명체가 서서히 몸집이 커지는 것과 달리 탈피하는 생물은 탈피할 때마다 계단을 오르듯 성장합니다. 이 딱딱하고 무거운 외피를 벗는 과정은 무척 힘든 과정으로 바닷가재는 매년 15% 정도가 탈피과정에서 탈진하여 자연사합니다. 탈피는 성장을 위한 필수과정이면서 목숨까지 걸린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에게도 이런 탈피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둘러싼 무거운 무지의 껍질, 단단한 고집의 껍질 그리고 날카로운 교만의 껍질을 벗는 탈피는 고통스럽지만 이를 피하려다가는 성장하지 못 하거나 생명을 잃을 위험까지 마주해야 합니다. 자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허물을 벗을 수 있도록 탈피의 자리로 밀어넣으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하나님의 손으로 탈피의 자리로 밀려들어간 사람 요나의 이야기입니다.
한 달여 전에 요나서 1장을 읽고 오늘 2장을 읽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치자 하나님은 폭풍우를 보내어 막으셨습니다. 이번에는 요나가 바다에 빠져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자 큰물고기를 보내어 그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캄캄한 물고기뱃속에 밤낮 삼일을 갇힌 요나는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2장 1절에서 요나는 그 곳을 스올의 뱃속이라고 부릅니다. 스올은 고대유대인들이 생각하기를, 죽은 자가 가는 곳이었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막다른 곳입니다.
사노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여길만큼 아무런 희망이 없는 절망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곳에 놓인 것이 우리는 저주요, 재앙이라고 생각하지만 놀랍게도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로 밀어넣으실 때도 있습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무겁고 딱딱하고 날카로운 껍질을 깨고 나와 성장하고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기도하게 만드시는 하나님
주님은 어떻게 우리의 성장과 생명을 가로막는 고집의 껍질을 깨뜨리십니까? 겸손히 기도하게 만드십니다. 1-2절은 요나가 요나서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기도하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욘 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욘 2: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그는 선지자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기도하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도망쳤습니다. 폭풍우가 그를 가로막는데도 자신을 위해서도, 선원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고 배밑층에 내려가 깊이 잠들었습니다. 선장이 그를 깨워 ‘일어나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는데도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기를 택할지언정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6절과 12절을 보십시오.
(욘 1: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 (욘 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정말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 고집센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셔도, 인생의 폭풍우로 막으셔도 심지어 믿지 않는 자들마저 기도하라고 요청하는데도 ‘내가 죽으면 죽었지, 기도하나 봐라.’하는 고래심줄같은 고집으로 기도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옆에서 ‘차 세우고 지도를 봐요,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든가’라고 해도 ‘내가 안다고, 내가. 내가 길찾는데는 도사야.’라고 고집을 부리는 ‘고래심줄같은’ 사람말입니다. 성령님이 곁에서 ‘그만, 엉뚱한 데서 방황하는 인생의 차를 세워라. 기도를 시작하렴. 길과 진리되신 예수님께 물어보렴.’이라고 하시는데도 ‘내가 안다니까요, 내 인생은 내가 제일 잘 알아요. 뭘 안다고 이래라, 저래라 하세요?’하는 고래심줄 말입니다. 그런 이들은 진짜 고래심줄이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들어가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고래심줄을 끊으시고자 사랑하는 자녀를 캄캄한 고래뱃속에 집어넣으십니다. 그렇기에 요나를 고래뱃속에 넣은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스스로 자초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폭풍우가 치기 시작할 때 잠에서 깨어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면 그는 고래뱃속에 갇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전에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을 때 순종의 기도를 드렸다면 폭풍우를 만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않고 버틸수록 더 깊고 어두운 고래뱃속에 갇힙니다. 빨리 기도를 시작할 수록 불필요한 폭풍우와 고래를 만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런 고래심줄이 없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주님의 은혜로 그런 고래심줄이 끊어지고 기도를 시작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당신을 생각하게 만드시는 하나님
주님은 또한 우리의 생각을 생명이신 하나님께 돌리도록 만드심으로 교만의 껍질을 깨뜨리십니다. 3절 이하를 보면 요나는 고래뱃속에서 처절한 절망과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욘 2: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그 고통속에서 요나는 드디어 잊고 있던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렸습니다.
(욘 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욘 2:6) …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다시스로 도망할 때 그의 마음은 오직 원수에의 미움과 분노, 하나님을 향한 원망, 자신의 뜻과 계획으로 가득 찼습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자리 없네…’ 하덕규 목사의 이 노래는 주님을 만나기 전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우리 마음도 딱딱한 교만의 껍질에 갇혀있을 때 주님을 담을 빈자리가 없습니다. 그런 껍질을 고난이 깨뜨릴 때 비로소 우리의 영이 자라나고 주님을 모실 빈자리가 생깁니다. 요나처럼 여호와를 생각하고 기도를 생각하고 주의 성전 교회를 생각하고 주님의 은혜와 구원을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돈을 다 탕진하고 빈털털이가 되어 돼지를 치다가 돼지먹이로조차도 배를 채우지 못 하자 그제서야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성령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설교와 예배를 통해, 기도회와 묵상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형제와 자매의 사랑과 권면을 통해, 인생의 즐거움과 슬픔을 통해 심지어 자연만물을 통해서도 가르치십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
그러나 우리는 헛된 욕심과 교만의 비늘에 눈이 가리워서 주님의 사랑과 영광을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학생은 선생님의 가르침이 우습게 봅니다. 교만한 선수는 코치의 지시를 우습게 봅니다. 우리는 얼마나 교만한지 성령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깁니다! 그럴 때 교만의 껍질을 깨뜨리는 것이 고난의 고래뱃속입니다. 아파서 병원에 누워있으면 평소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이 다 부질없어집니다. 실적, 성과, 성공, 수입, 명예, 외모… 이런 관심이 다 사라집니다. 생명과 가족과 삶의 의미와 목적과 사랑과 진리가 소중해집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비로소 시야에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고래뱃속에 갇혀야만 떠올리는 하나님을, 갇히기 전에 바라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여호와와 동행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부질없는 욕심과 허영을 다 비워내고 선하시고 자비비로우신 하나님으로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요나처럼 갇힌
요나가 3일 밤낮을 어둠 속에 있었던 것은 이처럼 그의 무지와 고집과 교만 모든 죄의 허물을 벗기 위해 꼭 필요한 영적 탈피의 과정입니다. 그가 삼일만에 영적 탈피를 마치자 큰물고기가 그를 물밖에 토해 놓았습니다. 이와 유사한 과정을 사도 바울도 겪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듭 부르시는 음성을 그는 듣지 못 하고 무지와 고집, 교만으로 오히려 교회를 더욱 핍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그가 다메섹 가는 길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이런 말씀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행 26:14)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가시채는 나귀를 움직이게 하려고 주인이 나귀 엉덩이에 휘두르는 가시를 박은 채찍입니다. 주인이 고삐를 당길 때 따라가면 될 일을, 안 간다고 고집을 부리고 오히려 주인에게 뒷발질을 해대면 주인이 ‘아이고 나귀님, 오늘은 왠지 기분이 들에 나가기 싫으시군요. 그럼 우리 들어가 쉬지지요.’ 하겠습니까? 오히려 ‘이 놈이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고집이야? 얼른 움직이지 못 하겠냐?’ 하고 가시채로 엉덩이를 후려쳐서 결국 움직일 것을 더 많이 얻어맞고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결국 사울도 요나처럼 물고기뱃속같은 캄캄한 어둠에 갇혀 3일이 보내야 했습니다.
(행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행 9: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그 삼일 동안 사울이 무엇을 했겠습니까? 요나처럼 먹지도 마시지도 못 하고 자신의 무지와 고집과 교만을 회개하며 죄의 허물을 벗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삼일 동안 힘겨운 탈피가 끝난 후 흥미롭게도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습니다.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물고기뱃속 같은 시간을 보낸 후에 물고기비늘 같은 것이 벗겨진 것입니다. 그가 그 삼일 동안 회심했다는 사실을 세례를 받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사도 바울로 거듭나는데도 이 삼일의 물고기뱃속이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와 다른
그러나 똑같은 부름을 받았지만 요나나 사울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삼일의 어둠을 보낸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부름은 요나나 사울의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이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완전히 당신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이라는 허물을 완전히 벗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순종의 도약을 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이 겪으신 삼일의 무덤은 당신의 허물을 벗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죄와 악의 허물을 완전히 벗겨주시기 위해 대신 겪으신 탈피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이 고통스러운 탈피를 다 겪으셨기에 우리가 그 분의 이름으로 그 분의 길을 가면 우리는 물고기뱃속에 갇히지 않고도 성장하고 살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바로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처럼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세 번의 간절한 기도로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시키면 요나처럼 삼일의 물고기뱃속에 갇힐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에겐 그 고통스러운 탈피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느냐, 물고기뱃속에서 하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가시채가 싫다고 뒷발질해 봐야 자신의 고통만 더 커질 뿐이라는 말입니다. 군대에선 훈련에서 땀을 안 흘리면 실전에서 피를 흘려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기도의 눈물을 아끼면 고난의 피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이 어두운 세대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하신 계획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요나처럼 물고기뱃속에 떨어질 때까지 버티지 말고 예수님처럼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뉴저지새로운교회 www.saerou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