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34장/막아주시는 사랑
240505 주일설교
1. 느보산에서 죽는 모세
여러분이 평생에 걸쳐 이루려고 했던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까? 행복한 가정일수도, 직업적 성공일수도, 예술적 성취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바람을 이루기 직전 그만 실패하고 생을 마감해야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슬플까요! 인생이 실패하고 불행하다 여기고 낙담하지 않을까요! 여기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 모세입니다. 그는 온갖 고생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 한 채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일텐데 과연 모세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를 불행하다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 왜입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의 질문입니다.
34장은 신명기의 마지막 장으로 모세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모세는 가나안 입구 모압평원에서 하나님의 명으로 느보산에 올라가 가나안을 바라본 후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못 하고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 일은 모세입장에서 정말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가나안이 어디입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명으로 목숨을 걸고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40년의 척박한 광야생활을 견디고 마침내 도착하여 들어가기로 약속받은 땅이 아닙니까? 40년 동안 모세가 온갖 고난과 불순종하는 백성을 견디며 오매불망 생각한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이 눈 앞의 가나안땅이 아닙니까? 이제 그 땅의 코앞에 도착했는데 정작 최고지도자 모세가 거기를 못 들어가다니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2.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 한 이유
모세가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되었거나 강을 건너거나 전쟁을 못 견디기 때문이 아닙니까? 아니요. 오늘 본문 7절은 모세가 여전히 건강했다고 합니다.
(신 34: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럼 하나님은 왜 모세가 이 땅에 못 들어가게 하셨습니까? 그가 므리바에서 저지른 잘못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32장으로 돌아가보면, 이스라엘이 신광야 므리바라는 곳에서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백성에게 물을 주는 과정에서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신 32:50) “…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신 32:51)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하나님은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모세와 아론이 백성의 불평과 반역에 화를 내며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내었습니다.
(민 20: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민 20: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모세의 잘못 때문이라면 할 말이 없는데, 그럼에도 정말 아쉬운 것은 틀림없습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직접 대면하신 선지자요, 그의 전 생애를 주님을 위해 드린 일꾼이 아닙니까? 40년의 광야세월을 사명을 위해 바친 일꾼을 이 므리바에서의 한 번의 잘못 때문에 이토록 가혹하게 처벌하시다니요! 백성에게 그토록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지도자인 모세에겐 이토록 잔인하시단 말입니까!
3. 무덤을 모르는 이유
거기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 힌트를 본문 5-6절이 알려줍니다.
(신 34: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신 34: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민족의 영웅 모세가 죽었는데 그 무덤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답니다! 그리고 신명기는 분명하게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왜일까요? 모세의 무덤을 사람들이 안다면 거기 몰려서 무엇을 할까요? 무지한 이들이 틀림없이 거기에 모여 절하고 소원을 빌고 효험을 봤다며 여기저기 소문을 내면 귀가 얇고 절박한 이들이 모여들어 그 앞에서 제사지내고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무덤이 여기다, 저기다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니 찾아다니지 말라고 못 박은 것입니다.
바로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나안땅을 밟지 못 하게 하신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만약 출애굽의 영웅인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 정복전쟁마저 완수해서 열두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주는 일까지 마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권위, 절대권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처럼 숭배받았을 것입니다. 죽어서도 그는 숭배받았을 것이고 이스라엘은 그의 가문이 대대손손 다스리는 왕국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우상이 되는 비극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럴 가능성을 므리바에서 그가 보여준 것입니다.
(신 32:51)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이 불신앙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가로챌 수 있는 모세의 연약한 성정을 보셨던 것입니다. 이는 모세 한 사람의 불행만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위대한 지도자를 잃고 가나안의 복된 삶이 시작부터 몰락한 지도자로 인한 혼란으로 큰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같은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은 모세의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성장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 했을지 모릅니다. 즉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 하게 막으심으로 그를 참된 약속의 땅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지켜주셨습니다. 모세를 막으심으로 모세 자신과 다음 세대 지도자인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가로막으심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의 성정을 너무나 잘 아시고 우리가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막아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4. 막아주시는 이유
바라는 것을 주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바라는 것을 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가로막으시는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 우리가 바라는 것을 막으십니까? 첫째, 우리에게 위험한 것을 막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에서 건지시고 악에서도 구하시기 위해 온갖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막으십니다.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에겐 아주 익숙한 일입니다. 아기가 위험한 곳에 가는 것을 막고 칼을 입에 집어 넣는 것을 막고 사탕과 과자만 먹으려는 것도 막습니다. 자녀가 크면 밤새 게임만 하는 것을 금지하고 술과 담배와 마약에 손대려는 것을 막고 화려해 보이지만 위험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막고 며칠 씩 외박하려는 것도 막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에게도 해로운 것을 막으십니다. 물론 무지하고 탐욕에 눈먼 우리에게 위험해 보이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만, 아이들이 모르는 위험을 부모가 보듯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위험을 보시고 막으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막으십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그가 육체의 가시라고 부른 고질병을 가졌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경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바울을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은 그의 고쳐달라는 세 번의 걸친 간절한 기도에 No라고 답하셨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은 것으로 인해 감사하였습니다.
(고후 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바울의 약한 건강으로 인해 그의 모든 사역의 열매가 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드러났던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잘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당신에게 맡겨진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거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예수님의 기도를 도우셨습니다.
(눅 22: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천사는 예수님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도록 도우신 것입니까? 아니요, 예수님이 스스로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도록 도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바람을 거절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어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예수님은 이를 기꺼이 수용하시고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셨습니다.
(막 14: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5. 행복의 비밀
그럼 예수님은 당신의 바람이 좌절되었으니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까?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 위에서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한 분인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이것이 진정한 행복한 인생의 이유입니다. 사명을 이루는 것! 사명을 이룬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영원한 구원의 주가 되셨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우리 모두에게 선물하신 주가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 점에서는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출애굽의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광야를 통과하는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는 사명도 이루었습니다. 여호수아를 안수하여 다음 세대를 준비시키는 사명도 이루었습니다. 모세의 인생은 사명을 이룬 인생, 가치있는 인생 그리고 행복한 인생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그의 사명이 아니었기에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 바람을 이루지 못 했다고 그가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 했지만 오히려 그로인해 전후무후한 선지자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신 34: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신 34: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신 34: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사도 바울 역시 사명을 완수하였기에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받은 것으로 인해 그의 삶이 불행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 질병으로 인해 그는 교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멸망하는 인생이 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선교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사도로 하나님나라 역사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간절히 바라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바람과 소원과 꿈이 좌절되어 낙심하고 절망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그것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얻었다고 행복해지지도 않습니다. 무엇때문에 불행해집니까? 사명을 이루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들어갈 항구가 없는 배는 아무리 화려하고 편안해도 유령선입니다. 결국은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아 썩을 배입니다. 목적한 항구를 향해 가는 배는 화려하지 않고 불편한 것이 있어도 소망이 있습니다. 생명을 향해 가는 배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이루는 인생이 진정으로 행복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기도 하시고 거절하기도 하시지만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명을 이루도록 부르십니다. 거룩한 교회를 통하여 부르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부르시고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 부르십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 한 것으로 낙심하지 마시고 말씀과 공동체를 통해 사명으로 부르시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우리 주님처럼 마침내 ‘다 이루었다‘는 고백을 하는 행복한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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