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1-4/말씀을 좇는 사람
240114 주일설교
1.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
이민자들은 공항에서 내릴 때 누굴 만나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합니다. 마중나온 친척, 친구, 지인이 델리를 하면 델리를 따라할 가능성이 크고 세탁소를 하면 세탁소를 차릴 가능성이 크고 식료품점을 하면 그역시 따라할 가능성이 큽니다. 또 좋은 사람을 만나면 이민성공확율이 확 올라가는데 나쁜 사람을 만나면 이용당하거나 사기를 당해 고생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민의 성공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크게 좌우되는 것처럼 인생의 성공 역시 누구의 인도를 받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인생 전체의 성공과 실패는 당연히 이민의 성공보다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를 만나야 하고 누구를 좇아가야 할까요? 오늘 본문의 두 주인공이 그 답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한 아브라함과 롯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이주모습을 4절에서 보십시오.
(창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겉으로 보기에는 두 사람이 똑같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합니다만 두 사람이 좇는 대상이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좇아갔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습니다. 반면 롯은 말씀이 아닌, 말씀을 좇는 아브라함을 좇아갔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아주 큰 차이입니다. 결국 같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았나? 그렇게 보이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두 사람은 조금씩 다른 길로 갈라지다가 마침내 완전히 성공과 실패의 정반대의 결말을 맞이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려움도 겪고 실수도 저지르지만 결국은 말씀을 좇아서 끝까지 가나안에 머무릅니다. 마침내 믿음의 조상이 되고 영생을 누렸습니다. 반면 롯은 13장에서 이익을 찾아 소돔으로 향합니다. 14장에서는 포로가 되었다가 아브라함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의 씨름을 하며 매일매일 성장하는 동안 그는 소돔에서 돈을 버느라 믿음의 길을 떠나삽니다. 19장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롯은 소돔과 함께 망합니다. 소돔이 심판당할 때 거기서 모든 재산을 잿더미에 묻어버리고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두 딸과 부끄러운 관계를 맺어 암몬과 모압 두 아들을 낳습니다. 그 후손인 암몬족속과 모압족속은 모두 멸망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좇은 아브라함과 사람을 좇은 롯의 완전히 다른 운명입니다.
2.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혹 생각하기를, 롯이 좇아간 사람이 믿음으로 살아간 아브라함이니 괜찮은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가 훌륭하여 좇을 만한 존재란 뜻이 전혀 아닙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입었다는 뜻이요, 믿음이 크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든 아니든 그저 연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 인간을 좇아간다는 것은 결국 보이는 것을 좇아간다는 뜻일 뿐입니다. 정확히는 보이는 이익을 좇아간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주는 안정감, 위로, 이익, 도움을 좇는다는 뜻입니다. 그에게서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으면 곧 이익을 주는 또다른 보이는 것을 좇게 되어 있습니다. 롯도 실제로 창 13장에서 그의 목자와 아브라함의 목자가 좁은 목초지로 인해 갈등을 빚자 아브라함과 결별합니다. 그가 다음으로 좇아간 것은 사람 대신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창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 13: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사람이든 땅이든 보이는 것을 좇는 것은 결국 이익을 좇는 것입니다. 이것은 멸망의 길입니다. 반면 보이지 않는 말씀을 좇는 것은 생명의 길입니다. 이는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좇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보이지 않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즉 그에게 ‘가나안으로 가라’고 그 땅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1절입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보여줄 땅 곧 아직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어차피 언젠가 보여주실 것 지금 ‘가나안이야’하고 속시원히 보여주지 않으셨나요? 뒤에 숨겨놓고 보여줄까, 말까 일단 따라오면 보여줄텐데… 장난치시는 것도 아니고 왜 안 보여주시냐고요? 그 이유를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보이는 것을 좇으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네게 줄 땅은 가나안이야’하고 말씀하시는 순간 아브라함의 시선은 보이는 땅 가나안에 고정되어 버립니다. 그는 보이는 가나안을 좇아가는 순간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이것은 롯의 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이 아니라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기에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보이지 않는 말씀을 주목하고 말씀을 좇아가야 어딘지는 모르나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살리시려고 보이는 땅을 미리 보여주시지 않고 보이지 않는 말씀만을 주시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바로 보이는 응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목사에게 가서 상담하면 속시원하게 답을 주지 않고 기도합시다 라고 하나마나한 소리를 합니다. 점쟁이에게 가면 속이 시원합니다. 이 부적을 사, 동쪽으로 가, 물가로 가지마… 바로 답이 나오잖아요. 하지만 답이 나오는 순간 사람은 그 답만 주목합니다. 하나님이 점쟁이처럼 혹은 램프의 요정처럼 속시원히 답을 주시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답에 시선을 빼앗깁니다. 망합니다. 하나님은 답을 알려주시지 않고 당신에게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기도하는 내내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을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바라던 답보다 더 크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은혜와 자비를 발견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은총을 누립니다. 인생의 답은 땅이 아니라, 돈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최고의 기도응답임을 발견합니다. 신부가 들고오는 지참금이 아니라 신부가 최고의 선물임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은혜를 주시려고 우리에게 속시원히 답을 주시지 않고 보이지 않는 말씀을 주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드시고 보이지 않는 당신을 계속 의지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도 가나안으로 가라 하지 않으시고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3. 육신이 되신 말씀
물론 보이지 않는 말씀을 좇아가는 이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려운 길이요,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고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반면 롯처럼 보이는 사람, 보이는 땅, 보이는 이익을 좇아가는 길은 많은 사람이 찾지만 멸망의 길입니다. 성도가 구할 것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가 말씀을 좇아갈 수 있도록 하시려고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곧 보이지 않는 말씀이 보이는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보이는 예수님의 희생과 말씀을 바라볼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좇아가 생명의 길 가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4. 영생의 말씀이 있는 곳
오늘 이 자리에게 계신 분들도 모두 아브라함이나 롯처럼 최근 이주를 결정하셨습니다. 바로 뉴저지장로교회에서 새로운교회로의 이주입니다. 왜 몇 년에서 몇십 년을 섬기던 교회를 떠나 이 교회로 오셨습니까? 목사가 좋아서 오신 분이 분명 계실 겁니다. 혹은 지난 교회의 어떤 이들이 싫어서 오신 분들도 계시고 이 교회의 어떤 이들이 너무 좋아서 오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만 그것이 전부여서는 안 됩니다. 목사인들 사람인데 여러분을 실망시킬 일이 없을 것이며, 새로운교회에서는 싫은 사람이 또 안 생기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그랬듯 말씀을 좇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새로운교회를 통해 세상을 치유하고 다음세대를 일으키어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의의 길을 가라는 비전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이 찾아와도 가나안을 떠나지 않은 아브라함처럼 이 교회를 지키며 좁지만 생명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을 때, 바라는 것을 얻지 못 할 때 이 새로운교회도 또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언제든 일어날 것이라고 요한복음 6장은 예고하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란 기대감에 다음 날 큰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나섰습니다. 몰려온 무리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주님을 찾아온 이유가 배고픔을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니 썩는 양식 곧 먹고 배부른 이 땅의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이가 더이상 예수님이 자신들의 바람을 채워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실망하시며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이 간 길이요, 사도들이 간 길이요, 오늘 우리가 가야할 생명의 길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고 생명을 주시는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교회가 싫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목사나 어느 교인이 좋아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이들 프로그램이 좋거나 시설이 좋아서 여기 있고 시설이나 프로그램이 나빠서 여기를 떠나거나 하는 이가 아닙니다. 그런 이들은 소비자이고 고객이고 동호인일지 모르나 성도요, 제자요, 참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우리는 영생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공동체가 있기에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제 몸처럼 서로 사랑하며 이웃을 섬기는 공동체가 있기에 여기 있습니다. 그런 공동체가 있는 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된 참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좇아가고 필요를 좇아가는 롯이나 무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좇아가고 말씀을 좇아가는 아브라함과 베드로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뉴저지새로운교회 www.saerou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