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1 새로운교회 주일예배 “인생 최고의 변수”(사무엘상 30:16-25) – 김도완 목사

6월 4, 2024

Series: 주일예배

Book: 사무엘상

사무엘상 30:16-25/인생 최고의 변수

240121 주일설교

1. 공정하다는 착각

여러분, 자녀가 연봉을 얼마를 벌었으면 좋겠습니까? 바보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그럼 얼마를 버실 것이라고 예상하십니까? 잘 알 수 없다 생각하시겠지만 미리 알 수 있다고 답하는 석학이 있습니다. 세계은행에서 20년을 근무한 수석연구원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존스홉킨스대학 교수인 브랑코 밀라노비치는 전세계 다양한 인종군의 소득을 조사하는 광대한 연구 끝에 자신에게 3가지 변수만 알려주면 아이의 장래연봉을 대략 맞출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말은 여러분이 지금 벌어들이는 연봉도 이 3가지 변수에 의해 이미 대략의 범위가 결정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연봉결정에 무려 50%의 영향을 미치는 첫째 변수는 출신국가입니다.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태어나느냐, 소말리아의 시골마을에서 마사이족으로 태어나느냐에 의해 벌써 연봉의 범위가 크게 달라집니다. 연봉결정의 30%의 영향을 미치는 둘째 변수는 유전자입니다. IQ가 얼마냐, 운동신경과 신체능력이 어느 정도냐, 언어, 예술, 사교성, 열정 등 특정한 자질을 타고 나느냐, 아니냐가 연봉을 크게 좌우합니다. 마지막 셋째 변수는 연봉결정의 10%의 영향을 미치는데 어린 시절의 환경입니다. 여기에는 부모의 직업, 사는 동네, 학교의 수준, 가정의 화목정도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모두 더하면 90%에 이르는 세 가지 변수의 공통점은 개인이 결정할 수 없고 그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머지 10%에 개인의 노력 그리고 운이 포함됩니다.

요약하면 한 인간의 성공여부의 90%가 그의 의지나 노력과 상관없이 거저 주어지는 환경적, 선천적 요소에 의존합니다. 이 밀라노비치 교수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정의란무엇인가’란 책으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교수는 그의 새책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성공은 전적으로 개인의 노력에 의존하기에, 이 믿음 위에 서있는 현대서구사회는 매우 공정하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샌델 교수가 지적하는 이런 믿음을 여러분도 많이 품고 계실 것입니다. 누구나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 시스템을 가진 우리 사회는 공정하다. 우리는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았다. 이 대가를 마음대로 소유하거나 쓸 정당한 권리를 우리가 가졌다. 그러므로 밀라노비치 교수나 샌델 교수의 주장이 우리에게 낯선 주장일수도 혹은 매우 도발적인 주장일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칠까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인물 다윗이 가르쳐 줍니다.

2. 공정하게 하자

우리는 오늘 본문인 30장의 후반부만 읽었기에 전반부를 포함해서 전체 상황을 간단히 설명드립니다. 사울의 칼날을 피해 망명생활을 하던 다윗과 부하들은 블레셋 지방의 시글락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장정들은 시글락에서 북쪽에 있는 아벡으로 이동하여 블레셋과 이스라엘 전쟁에 참여할 뻔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전쟁에 참석치 않고 떠난지 3일 만에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아말렉족이 마을을 침략하여 불사르고 여자와 아이와 재물을 모두 약탈해 달아난 뒤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윗과 부하들이 아말렉을 추격해 그들을 물리치고 가족과 재물을 모두 되찾아오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 때 아말렉이 시글락에서 약탈한 것뿐 아니라 다른 동네에서 약탈했던 재물까지 모두 획득했는데 이를 분배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윗의 부하는 약 6백 명이었는데 이들은 시글락으로 돌아오기 전 이미 3일 길을 행군해 지쳐 있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아말렉을 추격하려고 다시 전속력으로 남쪽으로 맹렬히 달렸을 터이고 브솔시내에 이르렀을 때에 그만 이 중 2백 명이 완전히 탈진해 쓰러지고야 말았습니다. 다윗은 효율적인 추격을 위해 무거운 물건을 모두 시냇가에 내려놓고 그 2백 명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체력이 남은 4백 명이 아말렉을 추격하여 따라잡고 그들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그 후 전리품을 나누려는데 4백 명 중 일부가 나서서 시냇가에 머문 2백 명에게는 전리품을 나누어 주면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일리 있지 않나요? 목숨걸고 아말렉과 싸운 이들이 그 전리품을 시냇가에 안전하게 머물며 장비를 지킨 이들과 나누는 것은 불공정하지 않나요? 수고한 만큼 받는 것이 마땅하지요? 6백 분의 1보다는 4백 분의 1로 나누는 것이 아무래도 전리품이 늘어날 것입니다. 공정하게 들립니다.

3. 누구의 덕인가

그럼 이 주장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먼저 22절은 이런 요구를 하는 이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삼상 30:22)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을 악한 자와 불량배라고 평가합니다. 왜입니까? 그들의 주장에 대한 다윗의 평가가 그 이유입니다. 23절입니다.

(삼상 30:23)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아말렉을 물리치고 가족과 재물을 되찾고 그들의 약탈물까지 노획하게 된 것은 4백 명의 공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목숨 걸고 싸운 4백 명의 공이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언듯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지만 실제 벌어진 일을 찬찬히 살펴 보면 이를 결코 4백 명의 공이라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이 일이 벌어진 직후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면 압니다. 오늘 본문의 앞문맥인 30:6을 보면 그들은 절망했고 패닉에 빠졌습니다.

(삼상 30:6)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그들은 아말렉을 추격할 용기도, 방법도 몰랐고 절망했고 지도자를 탓하며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 상황을 반전시킨 이는 궁지에 몰린 다윗에게 용기를 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제사장을 통해 아말렉을 추격하라고 사명도 주시고 반드시 다시 찾으리라고 희망도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아말렉이 어디로 간 지도 모른 채 일단 말씀에 순종하여 추격에 나선 다윗과 부하들이 우연히 병들어 아말렉에게 버림받은 종을 만나게 하셔서 그들의 도주로를 파악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다윗 일행은 일단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을 뿐 어디로 갈지 알지도 못 했는데 하나님이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아말렉을 따라잡은 후에도 막상 전상적인 전투를 벌였다면 이겼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병력은 이미 6백에서 4백으로 줄어든 후였고 그들도 제대로 된 휴식도, 보급도 없이 강행군을 했으니 틀림없이 기진맥진했을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쉬면서 이동하던 아말렉에게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무슨 상황이 벌어졌습니까? 그들은 약탈에 크게 성공한 것에 도취해 밤늦게까지 술마시고 춤추고는 골아떨어져 있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무방비상태의 아말렉에게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거저먹는 듯한 상황도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4.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렇기에 다윗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우연이 아닌 필연이며 그들의 공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라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일부가 전리품을 독차지하는 것이야말로 공정치 못 할 뿐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하는 이는 하나님을 모르는 악인이요, 불량배라고 성경은 평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분별있는 이들은 이 악한 불량배들의 말을 들지 않습니다. 24절입니다.

(삼상 30:24)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승리이니 그 전리품도 전장까지 달려갔던 이들이나 체력이 떨어져 머물렀던 이들 모두에게 똑같이 분배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원리로 자리잡았습니다.

(삼상 30:25)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이것은 오늘 우리가 누리는 삶과 구원과 모든 복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교훈입니다. 언듯 생각하면 우리가 잘 믿고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이 모든 것을 얻고 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이들처럼 내가 수고한 만큼 가지고 대접받고 누릴 권리가 있고 이것이 공정하다 여기기 쉽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이런 교만과 어리석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신 8: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말할 것이라.

그러나 정직하게 돌아보면 우리 인생의 고비고비에 하나님이 돕지 않으신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한국땅에서 태어나 건강하게 자라서 성인이 되고 이 안전하고 풍요롭고 자유로운 미국땅에서 살아가는 며 온갖 복을 누리는 것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밀라노비치 교수는 출생국가가 가장 큰 변수라고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변수가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변수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만난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모든 순간을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가장 큰 변수인 이유는 그 분이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복되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공부하고 일하고 노력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127편입니다.

( 127:1)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 127:2)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 (새번역)

집을 세우고 성을 지키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헛수고가 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농부가 아무리 땅을 열심히 갈아도 비가 안 오고 햇볕이 안 비취면 농사는 헛수고입니다. 아이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려 해도 좋은 학교와 교사와 시스템이 없는 소말리아 시골에서는 소 한 마리 키울 인생이 두 마리, 세 마리 키우는 정도로 끝납니다. 우리나 우리 자녀가 세계최고의 복지를 누리는 데에는 우리의 노력 이상의 환경과 조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노력이 재능과 행운과 환경과 만나서 최고의 성과를 거두도록 도우십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은 우리가 노력하지 못 하는 순간까지 복이 되도록 도우십니다. 2절 후반부입니다.

(시 127:2) … 진실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새번역)

개역성경은 ‘주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오역하고 있지만 최근번역본들은 이를 바로 잡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가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십니다. 즉 우리가 일하지 못 하는 순간까지 성과를 거둘 환경을 마련해 주셔서 깨어나 일할 때 최고의 결과를 얻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어떤 일도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모든 복은 은혜입니다. 육체의 생명이 은혜이고 영생은 더더욱 은혜입니다. 이 건강과 안전과 가족과 이웃과 친지와 교우가 모두 은혜입니다. 이 곳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배함이 은혜이고, 함께 찬양하고 교제할 형제, 자매가 있음이 은혜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 살 수 없듯 우리는 은혜의 바다를 벗어나 살 수 없습니다. 은혜를 먹고 마시고 은혜로 호흡하고 은혜로 살아갑니다. 여러분의 삶이 복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닫고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이 복을 누리는 성도는 약자를 대하는 자세도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에는 탈진하여 그릿시내에 주저앉은 이들이 많습니다. 세상은 그들이 능력이 없거나 노력을 안 했거나 자격이 없어서 노숙자가 되었고 가난하고 실패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릿시내에 이르기까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타고난 체력이 다른 이들보다 부족했거나 그들을 둘러싼 지역과 환경과 신분과 구조와 불운이 더 달려가지 못 하도록 가로막아 주저앉을 수밖에 없던 이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그들에게도 복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되 더 받는다는 점에서 복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선교지에 가서도 잊지 말아야 할 진리입니다. 대개 선교지는 가난합니다. 미국에서 서민으로 살아도 그들 눈에 우리는 엄청 부자인 듯 보이기에 우쭐해집니다. 우리는 세상의 눈으로는 정말 운이 좋아서, 믿음의 눈으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은혜로 미국에서 살아가는 복을 누립니다. 우리가 자격도 없이 이런 복과 은혜를 받아누릴 뿐이며,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은혜 입은 자들에게 마땅한 의무일 뿐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님을 깨달을 때 진정 섬기는 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성도는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고 그 자신이 복이 되고 더 나아가 복을 온 세상에 전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바로 이런 사명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시며 너희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과 사랑으로 전도하고 양육하는 것은 바로 이런 복을 전하는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지금 이 곳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여러분의 삶을 복되도록 도우시며 여러분의 자는 순간까지 도우시는 은혜를 매일매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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