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8-21/더 큰 문을 여시는 분
240128 주일설교
1.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인생
최근에 어느 할머니와 손녀가 나누는 대화를 연출한 영상을 봤습니다. 손녀가 할머니에게 묻기를, 자신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 가지만 말해달라고 합니다. 할머니는 손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반드시 새로운 문이 열린단다. 잊지 말거라. 반드시 열린단다.’ 이 말을 들으니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세상사람들도 아는 이 지혜를 우리는 잊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문이 닫히면 반드시 새로운 문이 열리는데 닫힌 문만 바라보며 낙심하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은 바로 이 새로운 문을 여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두 번째 아내 하갈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창세기 16장과 오늘본문 21장에 차례로 나옵니다. 그녀는 천국과 지옥을 오간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6장에서 그녀는, 사라가 자신이 임신하지 못 하니 대신 아이를 갖도록 남편에게 첩으로 준 애굽여종이라고 나옵니다. 아마도 그녀는 창세기 12장에서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피신했을 때 사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문화에서 첩이란 정실부인 외에 데리고 사는 여인으로 부정적 느낌이 강합니다만 중동문화에서는 둘째, 셋째 아내도 첫째 못지않는 권리와 대우를 보장받는 정식아내였습니다. 아내를 더 얻는 것은 한국처럼 민망한 일이 아니었고 오히려 부유함의 상징이면서 생계대책이 없던 여인들을 돌보는 책임을 감당한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애굽에서 종으로 태어나 종과 결혼하여 평생 종으로 살아갈 운명이던 하갈에게 부족장의 둘째 아내가 되는 것은 빈민층 여인으로 흔치 않은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은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후손이 없던 집안에 아들 이스마엘까지 낳았으니 그녀의 인생은 이제 탄탄대로를 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시절만 남은 것같던 그녀의 인생은 첫째 아내 사라가 아들 이삭을 덜컥 낳으면서 반대로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라에게 눈엣가시가 된 그녀는 급기야 사라가 긁는 바가지를 못견딘 아브라함에게 쫓겨나고야 맙니다.
2. 하나님의 큰 그림
그녀는 신분상승과 추락은 누구 때문입니까? 그녀가 아브라함의 둘째 아내가 된 것도, 다시 쫓겨나 광야에서 죽을 위기에 놓인 것도 모두 사라의 의지였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맞닦드리는 행과 불행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건강한 태도가 아닙니다. 인생에는 늘 불가해한 은혜가 있고 불가항력의 불행이 찾아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큰 뜻이요, 요즘말로는 하나님의 큰 그림 아래 있습니다. 전도서 7장의 유명한 말씀입니다.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사람은 삶의 주인이 아닙니다. 미래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도 곤고한 날이 올 수 있습니다. 대신 늘 수고한 것보다 더 큰 은혜를 늘 입고 사니 원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미래를 장담할 수 없으니 늘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약 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고난당했다고 자책하고 괴로워하지 말고 기도의 자리로 나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요, 복을 받았다고 교만하고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삶을 하나님의 손에 놓인 은혜의 선물임을 고백할 수 있으면 사도 바울처럼 어떤 상황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빌립보서 4장입니다.
(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어떤 상황도 이겨내는 믿음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이런 믿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3. 하나님을 잊은 하갈
광야로 내몰린 하갈은 아직 이런 믿음을 갖지 못 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14절 후반부입니다.
(창 21:14) …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그녀는 14살 된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 아브라함이 86세였고 사라가 이삭을 낳은 때 그가 100세였기에 이스라엘은 14살이 되었습니다. 그녀와 14살 아들은 죽어갑니다. 15절입니다.
(창 21: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창 21: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렇게 절망합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 말입니다. 왜입니까? 그녀는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넉넉한 은혜와 약속을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떤 은혜와 무슨 약속을 받았던가요? 이는 그녀가 처음 등장하는 16장으로 돌아가보면 분명히 드러납니다. 14년 전 그녀가 사라의 학대를 피해 광야로 도망쳤을 때입니다. 천사가 나타나 그녀에게 이런 약속을 줍니다.
(창 16: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은 아브라함과 사라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갈도 받았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습니다.
(창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수태고지를 받은 여성이 다름아닌 하갈입니다. 후에 삼손, 요시야, 세례 요한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이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습니다. 그녀가 받은 약속과 은혜가 얼마나 컸든지 감격한 나머지 이렇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창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갈은 이미 14년 전 자신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성경 역사상 최초로 천사의 수태고지를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 아들 이스마엘을 통해 자손이 번성할 것이란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마엘이 이렇게 허무하고 억울하게 죽을 리가 없습니다. 이 돌보심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을 기억했다면 그녀는 이 사막에서 절망하며 방황하며 죽음의 두려움으로 울부짖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의 도움을 구하고, 그의 약속을 붙들고 이스마엘의 죽음이 아니라 번영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은혜를 기억하며 고난을 견디는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부릅니다. 망각은 인간에게 축복인 동시에 비극입니다. 쓰라린 기억을 잊을 때 망각은 축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때 망각은 비극입니다. 우리 성도의 비극은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과 돌보심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면 소망을 얻습니다. 사명을 좇아갑니다. 평안과 담대함으로 전진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함이 일체의 상황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일체의 상황을 이기는 믿음을 얻으시길 축복합니다.
4.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녀가 방황하고 있는 땅이 어디인지 보십시오. 다시 14절 후반부입니다.
(창 21:14) …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브엘세바가 어디입니까? 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브라함이 아비멜렐과 언약을 맺은 곳입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고 하나님을 예배한 곳입니다. 이후에도 계속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성경의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입니다. 곧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란 의미입니다. 하갈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펴신 팔 아래 있으면서도 방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가 셋방살이 하는 곳이어서 광야처럼 불편한 것도 많고 어려운 것도 많으시지요? 이 곳이야말로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입니다. 장차 새로운교회 역사의 첫 장을 장식할 곳이요, 요람처럼 새로운교회를 일으키실 곳이요, 여기야말로 축복의 자리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무엇을 두려워할 것이 있습니까? 엄마가 밥을 준비하는데 굶을까 염려하는 아이가 있습니가? 아빠가 품에 안고 있는데 무엇이 아이를 해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의 펴신 팔이 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방황하는 불쌍한 성도가 되지 않으시길 빕니다. 은혜와 약속과 돌보심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신뢰하고 소망과 사명과 평안으로 전진하시길 축복합니다.
5. 눈을 여시는 하나님
과연 하갈은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그녀를 한 시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17절입니다.
(창 21: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그리고 다시한번 약속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18절입니다.
(창 21: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이 약속을 이루려면 죽어가는 아이를 일으켜서 붙들어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지친 성도, 흔들리는 믿음, 고난을 겪는 형제, 자매를 일으켜 붙들어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큰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응답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이는 관목나무 아래 쓰러져 있을 것이 아니라, 마주 앉아 같이 절망하고 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일어나고 일으키고 붙들고 서야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19절입니다.
(창 21: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하갈이 이스마엘을 일으켜 세우고 자신도 일어서자 그녀의 눈을 밝히셨습니다. 그녀는 샘물을 발견하고 아이와 마시고 살 소망을 얻습니다. 없던 샘물이 갑자기 생긴 걸까요? 그랬을 리 없지요. 샘물은 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만 절망에 빠진 하갈의 눈이 닫혀 보지 못 한 것입니다. 불신앙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어둠에 가두어 샘물을 못 보게 만듭니다. 반면 은혜의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진리의 빛을 환하게 비추어 주십니다. 그래서 생명수 샘물을 발견해 마시고 살게 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어떤 광야에서도 샘물은 항상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눈이 어두워 보지 못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 샘물을 발견하고 마시고 살게 하십니다. 그 샘물이 바로 영원한 생수 예수님이십니다.
(요 7:37) …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
광야에 버려진 것같은 일을 당하신 성도 여러분, 돌보시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믿음의 눈을 뜨십시오. 여러분 곁에 늘 계시는 생명수 예수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생명수를 마시고 일어서 전진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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