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1-18/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
240218 주일설교
1. 세상을 대하는 태도
지난 세기 미국에서 히피운동이 한창일 때 한 히피청년이 대학캠퍼스에서 전도를 받아 태어나 처음으로 학교 앞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교회는 전형적인 미국중산층교회로 모든 교인이 정장을 입고와서 예배 중에는 찬송과 설교소리 외에는 바늘하나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않는 엄숙한 분위기의 장로교회였습니다. 예배시간도 몰라서 한창 예배가 진행되던 중에 히피청년이 교회당 문을 열고 들어오자 끼이익 하는 소리에 설교하던 목사는 물론 교인들이 일제히 입구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다 찢어진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샌들을 신은 이 청년은 순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자리를 찾아 들어왔는데 빈자리가 없어 앞으로 앞으로 오다가 그만 가운데 통로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러자 예배실 뒷자리에서 은퇴한 장로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 청년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그 연로한 장로가 젊은이에게 예배드리는 예절과 복장에 대해 훈계를 할 것이라 생각하며 조금은 긴장한 채 바라보았습니다. 그 장로는 젊은이 곁에 털썩 주저앉더니 ‘이보게, 나도 항상 여기 앉아서 예배를 드려보고 싶었다네.’ 하고 목사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목사도 긴장을 풀고 설교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 이야기는 교회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만약 그 교회가 히피청년에게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신을 신고 머리를 정돈하고 와야 환영받을 것이라고 했다면 히피들은 그런 문화적 장벽 때문에 복음을 접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태도를 취한 교파는 젊은이들을 전도하는 데 실패하여 급속히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반면 이 은퇴장로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고 교회의 문화적 장벽을 낮추어준 교파는 젊은 세대를 수용하는데 성공하여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갈보리채플을 비롯해 당시 예수운동을 일으킨 교회들이 그 예입니다. 그 열매를 오늘 우리도 따먹고 있습니다. 오늘날 당연한 듯이 우리가 부르는 praise & worship 곧 현대적 가스펠송은 바로 히피문화를 교회가 수용한 결과입니다. 당시 회심한 히피음악가들이 자신이 부르던 노래에 가사를 붙여 가스펠송이란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와 같은 가스펠송이 쏟아져 나오고 그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마라나타워십과 같은 기독교음반사들이 발전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contemporary worship song이 나타난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열린 곳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탄생할 교회를 향해 사명을 주시기를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문이 닫혀있으면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으로 나갈 수 없고 세상도 교회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닫힌 교회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닫힌 교회를 세상을 향해 활짝 여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닫힌 교회의 문을 여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2. 닫힌 교회를 여신 성령님
대표적인 닫힌 종교가 무엇일까요? 바로 유대교입니다. 유대교는 선교사가 없습니다. 유대교는 비유대인들을 개종시키려 애쓰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구원은 아브라함의 후손들만을 위한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탄생한 최초의 교회는 유대교처럼 닫힌 종교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 최초교회의 신자들이 100%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열두 사도를 비롯한 예루살렘 초대교회 회심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구원도 유대인에게만 허락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와 사마리아땅 심지어 팔레스틴밖 로마제국으로 흩어졌을 때에도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의 디아스포라 즉 흩어져 살아가던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려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교회가 유대인을 넘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려면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교회지도자였던 베드로의 닫힌 생각을 여시고 그를 통해 교인들의 닫힌 생각도 여셔야만 했습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의도치않게 성령님의 역사로 이방인 로마장교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한 후 벌어진 상황을 묘사합니다. 그 일을 전해들은 유대인 예루살렘교인들 중 일부가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행 11: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행 11: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행 11: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할례자들이란 표현은 그들이 유대인의 상징인 할례를 너무나 중요하게 여기고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들을 멸시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이방인과 이방인의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율법이 규정한 음식만 먹으라는 법을 어겼고 그로인해 부정해졌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의 변화를 차분히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기도 중 세 번이나 반복해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에 가득한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는 음성이 들리는데 유대인인 베드로가 당연히 먹을 수 없다고 하자,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신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정한 짐승은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이방인들을 상징했고, 환상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구원하길 원하신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어서 이방인 로마장교 고넬료의 집에 초청을 받아 반신반의하며 설교하였는데 성령님이 유대인에게 임하신 것처럼 똑같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성령님을 선물로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16-17절입니다.
(행 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행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이방인을 향해 베드로의 닫힌 생각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예루살렘의 유대교인 즉 할례에 목숨을 걸고 이방인을 거부했던 이들의 닫힌 생각도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18절입니다.
(행 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3.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
바로 이 사건이 유대교처럼 닫힌 종교가 될 뻔 했던 초대교회가 세상 만민을 향해 활짝 열린 신앙이 되도록 만든 계기였습니다. 만약 베드로와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님에게 귀기울이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도 유대교처럼 닫힌 종교로 팔레스틴 한 쪽에서 소수에게만 수용되는 종교로 끝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성도들의 닫힌 생각을 여시고 이어서 교회의 정책도 여셔서 복음이 이방세계를 향해 제한없이 전파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향해 열린 공동체이어야만 합니다.
줄에 돌을 매달고 돌리면 돌이 손을 중심으로 빙글빙들 도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돌이 밖으로 날아가려는 원심력과 돌을 잡아당기는 구심력이 균형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열린교회에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형제, 자매를 향한 사랑과 섬김과 친교의 구심력과 더불어 이웃을 향한 관심과 섬김과 전도의 원심력이 함께 작용합니다. 우리끼리 너무나 좋고 행복하지만 동시에 이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식지 않는 교회입니다. 여기서 구심력만 작용하면 원심력이 작용하지 않으면 닫힌교회가 됩니다. 구심력만 작용하는 교회는 점점 가운데로 모이는 힘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틈이 사라지고 외부인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닫힌모임은 외부인을 일부러 배척하지 않아도 외부인이 들어와 적응하지 못 하는 상태가 됩니다.
열린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단단한 구심력을 만들어야 합니다. 즉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보여준 구심력입니다.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오늘 구역으로 왜 모입니까? 바로 이 말씀을 좇아 성령님을 중심으로 구심력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 구심력은 바로 사랑입니다.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고 섬기고 연합하는 것은 강력한 힘입니다. 이 구심력이 없이는 원심력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 구심력을 갈망합니다. 어디 정말 사랑하고 사랑받고 인정받고 보람을 느끼고 수용받고 용납하는 공동체가 없는가 갈망합니다. 그런 공동체가 정말 있다면 사람들은 몰려오기 마련입니다. 초대교회가 그 증거이고, 2천 년 교회 역사가 그 증거입니다.
다음으로 원심력을 키워야 합니다. 이 원심력은 성령님이 우리의 닫힌 생각을 열어 시선을 우리 밖으로 향하게 만들 때 생기는 힘입니다. 이 힘은 이웃에 대한 관심이요, 영혼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런 관심은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임으로써만 생깁니다. 자기애로 똘똘 뭉친 인간은 자신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주님의 마음에 공감하고 주님의 뜻을 압니다. 그럴 때 성도는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이웃을 비로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 열리면 세상을 향해 열립니다. 이웃을 향해 열리고, 다른 민족을 향해 열리고, 선교지를 향해 열립니다.
세상을 향해 우리의 마음이 열리면 세상을 초청할 수 있도록 교회의 문턱을 낮추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고 전도하려면 세상과 눈높이를 맞추어야 합니다. 이는 곧 세상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문화적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삶으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문화적으로 세상과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문화는 거룩함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더러 하늘로 올라오라 하시지 않고 우리처럼 낮아지셨습니다. 이방인을 전도하려면 유대인의 모습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히피들을 전도하려면 기성세대와 같아지락도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우리도 세상사람을 전도하기 위해 기독교인처럼 행동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들처럼 낮아지되 그들이 문화의 장벽 없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교회 첫구역모임을 시작합니다. 새로운교회는 구역모임도 새로워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구역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위한 구역, 이웃을 위한 구역, 열방을 위한 구역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초대교회의 생각을 열어주신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의 생각을 열고 계십니다. 주님께 귀기울이면 자신에게만 집착하던 우리의 시선이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향하여 열릴 것입니다. 성령님께 귀기울이므로 열린 성도, 열린 구역, 열린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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