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9:27-31/알리되 알리지 마라
240225 주일설교
1. 알리지 말라는 이유
이순신 장군의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의 조총에 맞은 후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한 이 이야기일 것입니다. 자신의 전사소식이 적군의 사기를 올리고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도 이순신 장군처럼 사람들에게 자신에 관한 소식을 전하기를 금지하십니다. 예수님이 두 시각장애인의 눈을 고쳐주신 후의 상황을 30절에서 보십시오.
(마 9:30) 그 (시각장애인들의)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마 9: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물론 별소용이 없긴 했습니다. 이 곳 외에도 여러 번 예수님은 치유와 기적을 행하신 후 이를 알리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왜 금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능력이 널리 퍼질수록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질문은 치유를 위한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알려줍니다. 주님이 치유의 능력을 알리지 못하도록 막으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2. 복음전파가 더 중요하기에
첫째는 치유와 기적의 소문이 하나님나라 복음전파를 방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장을 보면 가버나움 베드로의 집에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면서도 당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 하셨습니다.
(막 1: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그리고 다음 날 사람들이 몰려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예 다른 마을로 떠나버리셨습니다.
(막 1:37)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막 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나는 당장 사람들을 고치러 온 것이 아니라 영원히 구원하러 왔다. 소문이 퍼져 병자들이 몰려와 그들을 고치느라 복음전파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뜻입니다. 이는 치유와 기적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픈 사람에게 병이 낫는 것보다 세상에서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억만금인들 주고 낫고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복음은 그토록 중요한 육체의 치유와 생명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병자치유로 복음전파가 방해받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의 제일의 사명도 이것입니다. 치유와 기적은 당장 눈앞의 고통을 해결하지만 영원히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 합니다. 당장은 나음받아도 결국은 다시 늙고 병들어 죽습니다.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도 또다른 문제가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치유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더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문제가 해결받느냐 않느냐를 넘어서서 하나님나라를 더 사모하는 기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3. 그럼에도 치유하시는 이유
그럼 아예 치유는 하지 말고 복음전파만 하지, 왜 치유하고 기적을 행하셨습니까? 거기에도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은 길가시다가 나인성의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셨습니다.
(눅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주님의 치유사건은 거의 예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거나 그들이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한 뒤 일어납니다. 영생의 중요성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당장 겪는 고통이 대수롭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고통은 고통입니다. 주님은 고통받는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주님은 고통받는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런 주님에게 나갈 때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십시오. 주님은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 하십니다.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시고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복음전파가 그토록 중요한데도 치유와 기적을 행하신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복음을 이해하는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치유와 기적을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요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표적은 영어로 사인입니다. 뉴욕까지 30마일 사인은 그 자체는 뉴욕이 아닙니다. 뉴욕을 가리킵니다. 치유나 기적은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나라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나라가 어떤 곳인지 이해시키고 믿게 돕습니다. 뉴욕사인만 보고 가는 사람은 뉴욕을 본 것이 아니듯 치유나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알거나 하나님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더 깊이 믿고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시한번 강조합니다만, 우리가 인생의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도 고통이 빨리 해결되기만 바란다면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깊어지고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는 소망이 커지도록 구해야 합니다. 문제가 해결되어도 하나님을 더 알지못했다면 그 기도는 헛것입니다. 다른 종교인들도 다 하는 기도일 뿐이요, 이것이 기복적인 신앙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나라를 더 사모한다면 그 기도는 응답된 것입니다.
4. 오해를 막기 위해
다시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치유하셨고 그것이 복음이해에도 도움이 된다면 예수님은 왜 치유와 기적의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 하셨습니까? 그 첫 번째 이유가 치유의 소문으로 하나님나라 복음전파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라면 두 번째 이유는 사람들의 오해가 증폭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계속 소문이 퍼지지 못 하도록 말리기만 하시던 예수님이 공생애 후반기의 어느 시점에서는 단서를 하나 붙이셨습니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후 변화산에 올라가 영광스럽게 변하신 후입니다. 마가복음 9장입니다.
(막 9: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막 9: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여기서도 알리기를 금하셨지만 당신의 죽음과 부활 때까지만이라고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즉 그 후에는 이 모든 치유와 기적을 전해도 되고 전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전에는 전하면 안 되고 그 후에는 전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렌즈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와 메시지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예수님이 무엇을 주실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처음부터 왜 이런 조건을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 전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종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속시원히 당신의 뜻을 밝혀보여주지 않으시나요? 죄송하지만 우리가 이해를 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유치원생에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가르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그래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실 수 있지 않나요? 그렇게 하셨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눈높이를 맞추어 온갖 비유로 다 가르치셨고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쉽게 설명한 버전으로도 우리가 이해못하는 이유는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나라를 아는 것입니다. 성경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5. 램프의 요정이란 오해
아무튼 죽음과 부활이 일어나기 전에 예수님의 치유와 기적의 소문이 퍼지면 사람들은 오해를 할 것이기에 예수님은 알리기를 금하셨습니다. 그럼 그들이 어떤 오해를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속한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오해를 빌라도도 했기에 던진 질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군사적 지도자가 로마군을 몰아내고 자유와 해방, 풍요와 안전을 가져다줄 것이란 메시야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고 가르치셨지만 제자들마저도 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기적을 본 이들의 오해는 더욱 강하고 빠르게 증폭되어 들불처럼 번져갔고 이는 예수님에게는 커다란 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직 방문하지도 못 한 마을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하나님나라에 대해 배우지도 못 한 상태에서 놀라운 치유와 기적의 소식만 먼저 듣고는 자기마음대로 예수님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오해를 굳게 믿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속이 탔습니다. “이봐, 자네들이 전후맥락을 뚝뚝 끊어버리고 치유와 기적만 전하면 사람들은 오해한단 말이야. 내가 이런 치유와 기적을 전하러 온 줄로만 알고 굳게 믿어버린다니까. 그러면 내가 그들을 만나 하나님나라에 관해 아무리 설명해 봐야 도무지 이해하지 못 한다고. 아이고, 골치야…”
그러므로 하나님이 잘 믿으면 부자되게 해주신다고 가르치고 병낫고 문제해결받는 것이 큰 신앙이라고 가르치는 많은 교회는 미안하지만 잘못되었습니다. 모르고 그렇게 가르치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알고 그렇게 가르치고 믿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런 그릇된 신앙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6. 예수님이 전하시려는 나라
하나님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예수님 말씀은 저기 죽어서 가는 곳이란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는 사람들이 바라는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서 살아가는 나라로서 영적인 생명과 영적인 풍요와 영적인 부귀를 누리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세상법이 아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 부귀와 영화가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을 구하는 삶이 곧 하나님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라를 전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라가 임하기를 가로막던 죄의 권세를 당신의 죽음으로 깨뜨리셨습니다. 이 나라가 임하기를 가로막던 사망권세를 부활로 무너뜨리셨습니다. 이 나라가 완성될 때 재림을 약속하시면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런 나라를 이해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 나라는 당시 사람들을 괴롭히던 모든 질병과 고통이 심판받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오늘 우리를 아프게 하는 질병과 시련도 모두 끝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묘사한 이 아름다운 선언을 들어보십시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을 듣고 믿고 소망하는 것이 당장 우리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 나라의 영광과 풍요를 당장 배부르고 안전하고 안락한 삶으로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나라를 향한 소망을 더 굳게 붙들도록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의 바람대로 되지 않는 것도 허락하십니다.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나라가 굳게 붙드시는 천국백성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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