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1장/요나의 길과 예수님의 길
240315 주일설교
1. 시기와 질투의 삶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시장거리에 마주보는 가게의 두 장사꾼이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한 장사꾼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그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하는데, 단 조건이 건너편의 장사꾼은 그 소원을 두 배로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황금덩어리를 하나 얻으면 경쟁자는 두 개를 얻고 그가 아들을 얻으면 경쟁자는 두 명의 아들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요? 그는 천사에게 자신의 한 쪽 눈을 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경쟁자는 두 눈이 다 멀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자신보다 잘 되는 것을 견딜 수 없고 원수를 망하게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을 파괴하는 것도 할 수 있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꼬집는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런 본성을 드러내며 혹은 숨기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적은 없었습니까? 당연히 이런 삶이 행복할리 없습니다. 물론 이런 삶은 하나님의 창조의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삶을 원하실까요? 어떻게 하면 이런 본성을 벗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요나서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여호와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2절입니다.
(욘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악과 독으로 멸망할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시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하셨던, 바로 그 제자의 삶입니다. 신약시대의 예수님은 그렇다쳐도 구약사대의 하나님도 이런 삶을 원하셨습니까? 이런 삶을 애초부터 하나님이 원하셨습니다.
(창 12:3)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땅의 모든 족속에는 이스라엘에게 원수인 앗수르처럼 우리에게 원수와 같은 이들도 포함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들을 포함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사랑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구원받기를 원하셨기에 이 자리에 부르셨습니다. 은혜의 하나님은 우리도 당신을 닮은 사랑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3. 인간이 택한 삶
그러나 다른 인간들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자녀들마저도 이런 삶을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까지 모든 인간이 택한 것은 미워하고 복수하려는 삶이었습니다. 3절입니다.
(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하나님이 가라시는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북동쪽 오늘날의 이라크인데 요나가 가려는 곳은 서쪽끝 다시스 오늘날의 스페인입니다. 정반대의 길로 가는 이유는 3절이 두 번이나 강조하듯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바라는 사랑과 평화의 삶이 아닌 미움과 다툼의 길로 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인간은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을까요? 여호와께서 폭풍우로 요나가 탄 배를 돌이키려 하시자 요나는 차라리 자신이 죽음으로써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꺾으려 하였습니다.
(욘 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인간은 정말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하나님을 거역하려 합니다. C.S.루이스는 인간의 교만에 대해 말하기를, ‘인간이 죽는 한이 있어도 최후까지 거절하려는 것은 자아를 하나님 앞에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교만하고 고집이 세다는 뜻입니다. 이를 가리켜 구약성경에서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앞에서조차 교만한 목을 굽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4. 추락하는 인생
이런 삶의 결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추락입니다. 요나는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욥바에서 배에 올랐지만 그 배 밑층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다시 바다 밑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물고기 뱃속 곧 절망의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은 계속 추락합니다. 영성이 추락합니다. 인성이 추락합니다. 운명이 추락합니다. 마침내 영원한 멸망의 자리까지 추락합니다. 그것이 지옥입니다.
이 추락은 성도를 세상을 축복하는 사명의 자리에서 세상을 망하게 하는 저주의 자리로 밀어넣습니다. 6절입니다.
(욘 1: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하나님을 떠난 성도는 이방인인 선장에게조차 꾸지람을 듣습니다. 선장은 요나를 ‘자는 자’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잠에 빠진 성도에 대한 비유입니다. 선장을 비롯한 이방인 선원들은 자신과 동료와 배의 운명을 건져보겠다고 부르짖어 간절히 기도하는데 정작 하나님의 자녀인 요나는 잠에 빠져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으로부터 비난받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성도는 오히려 세상을 망하게 만듭니다. 14절입니다.
(욘 1: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하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 요나때문에 자신들이 멸망받을까 두려워 떱니다. 이는 세상의 축복과 위로와 소망이 되어야 할 성도가 세상의 짐과 부담과 저주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정말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꼭 이와같지 않은가 두렵습니다. 세상이 교회로 인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다고 원망하지 않습니까? 교회를 꾸짖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거역하면 교회도 세상의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됩니다. 교회가 가야할 길은 당연히 요나의 길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요나의 길을 갔습니다. 노아의 홍수사건의 교훈입니다. 그 후에도 인간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바벨탑의 반역사건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들과 다른 순종의 길을 가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을 택하셨지만 그들도 역시 요나의 길을 갔습니다. 마침내 인간에게서 어떤 소망을 찾을 수 없을 때 반대로 순종하는 길을 가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5. 순종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길은 요나의 그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사뭇 다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갔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니느웨보다 더 추하고 더러운 이 땅에 천한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요나가 배밑층에 내려가 평안히 잠들 수 있었겠습니까?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으며 선장이 자신을 깨워 꾸짖을 때는 또 얼마나 수치스럽고 모욕적이었겠습니까? 예수님도 똑같이 풍랑이 이는 배에서 주무셨지만 주님에게는 완전한 평강이 있었습니다.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는 폭풍이 두려워 당신을 깨운 제자들에게 오히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눅 8: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요나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 하셨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던져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죄 때문에 칠흙같이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갇혀 절망과 두려움과 싸워야 했지만 예수님은 인류의 죄 때문에 칠흙같이 캄캄한 무덤에 삼일을 갇혀 부활과 승천을 기다리셨습니다. 요나는 물고기가 토해 놓은 후 마지못해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만 예수님은 무덤에서 나와 큰 기쁨으로 온 세상에 전파할 구원의 복음을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요나와 달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심으로 완전한 의의 길을 가셨습니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6. 순종의 길
예수님은 요나를 비롯한 온 인류가 지은 거역의 죄를 십자가를 지기까지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다 씻으셨습니다. 그 순종의 길에 보혈로 죄사함받은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성령님으로 도우셔서 우리가 도저히 갈 수 없는 순종의 길을 가게 만드셨습니다. 이 순종의 길에는 거역의 길과 다른 평안과 생명이 있습니다.
똑같이 인생의 풍랑을 만나도 거역의 길에는 두려움과 수치가 가득하지만 순종의 길에는 평안과 담대함이 충만합니다. 똑같이 생명을 던져도 거역의 길에는 절망과 고통이 가득하지만 순종의 길에는 소망과 기쁨이 충만합니다. 똑같이 사역에 헌신해도 거역의 길에는 무거운 짐과 염려가 가득하지만 순종의 길에는 영생과 영광이 충만합니다. 이런 인생의 역전이 온전한 순종으로 의를 다 이루신 예수님으로 인해 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불순종으로 가득하던 세상에 순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이 온 세상에 가득해졌습니다. 2천 년 전 갈보리언덕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시작된 순종의 해일은 불순종의 땅을 덮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있습니다. 바로 그 성령님의 역사가 이 곳에 레오니아에서 새로운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새로운교회 모든 성도들은 그러므로 요나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순종의 길, 평안의 길, 생명의 길 가시는 새로운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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