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7 새로운교회 주일예배 “노블레스 오블리주”(로마서 14:19-15:3) – 김도완 목사

6월 4, 2024

Series: 주일예배

Book: 로마서

로마서 14:19-15:3/노블레스 오블리주

240407 주일설교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특권을 누리는 귀족은 그에 걸맞는 의무와 책임을 가진다’는 뜻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잘 실천되는 사회는 건강하고 발전합니다. 지도층이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불만이 폭증해 혁명이 일어나 기존질서가 붕괴되고 혼란과 고통을 사회가 겪어야 합니다. 이는 어느 공동체나 똑같이 적용됩니다. 가정에서 가장이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온가족이 고통을 겪습니다. 회사에서 고위층이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모든 직원이 고통을 겪습니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는 믿음이 강한 자들이 져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성도가 고통을 겪어야 하는 그 책임이란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쓴 편지에서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음식규정으로 인한 갈등

오늘 본문의 배경은 로마교회에서 불거진 음식규정을 둘러싼 갈등입니다. 고린도서에서는 우상의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에 관한 갈등이었는데 여기 로마서의 갈등은 정확히 무엇때문인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문맥으로 짐작키로 먼저 21절에 언급된,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 않는 것이 경건에 중요하다고 믿는 어떤 이들이 있었습니다.

(롬 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엄격한 음식규정을 지켜서 소위 코셔푸드만을 먹습니다. 당시에도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런 류의 음식규정이 엄격히 지키는 이가 있었습니다. 반면 20절에 언급된, 고기도 포도주도 모두 하나님이 만드신 것으로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이 아니니 먹어도 괜찮다고 자유를 누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롬 14:20) …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특히 이방인 신자들은 이런 자유를 누리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믿음이 강한 자로 부르고, 여전히 고기와 포도주를 금기시한 이들을 가리켜 믿음이 약한 자로 불렀습니다. 소위 자유를 누리는 믿음이 강한 자와 규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약한 자 사이의 갈등이 불거져 멀리 떨어져 옥에 갇혀 이 편지를 쓰는 사도 바울에게까지 알려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도록 권면합니까?

강한 자의 책임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들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15:1을 보면,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가르쳐왔기에 믿음이 강한 자의 편에 있다는 점을 ‘우리는’이란 표현으로 드러냅니다.

(롬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즉 자유를 누리는, 믿음이 강한 자에게는 책임이 있다, 그것은 믿음 약한 자 곧 이 자유를 누리지 못 하는 자의 약점을 우리가 담당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규정을 준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서 다른 선택지를 고려하지 못 하는 경직성입니다. 즉 그들은 음식을 절제하는 선택 밖에 할 수 없는 경직성을 묶여 있으니 즉 약한 자들에겐 자유가 없으니,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절제할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진 우리가 그들을 위해 스스로 자유를 선택하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더 큰 부담을 지는 것이 옳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영적 노블리스 오블리주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란 또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자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자는 믿음이 약한 자요, 영적 어린아이입니다. 마땅히 자신을 영적 어른이요, 믿음이 강한 자라고 여긴다면 다른 이의 약점을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않고 그 약점이 공동체의 짐이 되지 않도록 자신이 그 짐을 대신 져주어야 합니다. 이런 이의 모델은 누구입니까? 바로 주 예수님이십니다.

(롬 15: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누구를 기쁘게 하셨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셨습니다. 3절에 인용된 시 69:9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비방을 예수님 당신이 대신 다 당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기쁘게 하셨다면 하나님 대신 비방을 받지 않으셨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기에 하나님 대신 십자가에서 모든 비방을 대신 당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이 희생 덕분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고 수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이 강한 자라면 마땅히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2절입니다.

(롬 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러므로 누가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까? 목소리가 크거나 힘이 세거나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기쁘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일을 선하게 하고 공동체에는 덕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교회 왔는데 사람들이 왜 내 말대로 안 하고 나를 인정하지 않지? 화가 납니까? 영적 어린아이입니다. 교회 왔는데 사람들이 위로받고 은혜받고 힘을 얻어 기쁜 모습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어서 내가 무엇을 섬기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마음이 듭니까? 영적 어른이요, 믿음이 강한 자입니다. 모든 새로운교회 성도 여러분, 믿음이 강한 영적 어른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상처입은 치유자 

그럼 사람을 이렇게 믿음이 강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이웃을 기쁘게 하는 영적 어른의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이는 절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인생의 신비입니다. 그것은 바로 약한 자의 고난과 아픔을 아는 마음에서 옵니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알려주는 진리입니다. 형제, 자매, 이웃, 공동체, 시대를 치유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그 자신이 상처를 입어서 상처입은 이의 아픔을 잘 아는 자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상처입은 치유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아시는 분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이사야서의 예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아기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집에 태어나셨습니다. 그 몸을 누일 곳이 동물의 밥통 구유에 누우셨다는 것은 그 부모가 얼마나 가난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팔레스틴의 서민가정에서 민중의 삶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자라신 예수님은 가난하여 셋방을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 분들의 서러움을 아십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헤롯의 칼날을 피해 수년 간 애굽으로 피난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전쟁통에 나라를 잃고 난민이 되어 떠돌며 온갖 멸시와 서러움을 견뎌야 하는 우크라이나인들과 아이티인들과 수많은 난민들의 고통과 슬픔을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적대자들로부터 온갖 비방과 모략, 시기와 정죄를 당하셨습니다. 억울하게 비방을 당하고 모함과 정죄를 당하는 이들의 원통함을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사랑하셨던 제자들의 배신과 외면, 저주를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이들에게 배신당하고 믿었던 이들에게 사기와 거절과 외면을 당하는 이들의 슬픔과 서러움을 주님은 너무나 너무나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허약한 몸으로 모진 고문을 당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수 없을 만큼 그 몸이 상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에서 몸이 찢기고 피를 남김없이 흘리셨습니다. 그렇기에 이 땅에 이 보잘것없는 육신의 온갖 질병과 고통과 수치와 모욕을 당하며 사는 우리의 괴로움을 주님은 정말이지 너무나 잘 아십니다. 이 세상 누구도 이해못하는 고통과 수치를 다 아시는 분이 에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죄와 악에 사로잡히고 고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우리를 이해하시고 공감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을 또 이렇게 묘사하십니다.

(사 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상처 모르는 가해자

반대로 질고를 모를 때 우리는 어떤 어리석은 생각을 합니까? 이사야서 53장 4절을 보십시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어리석고 무심한 자들은 이웃의 고난을 이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저런 고난을 받나, 어떻게 키웠길래 아이들이 저렇게 되나, 어떻게 했길래 가정이 저렇게 되나? 우물 안 개구리는 세상이 한 눈에 다 보이고 책 한 권 읽은 사람은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고난과 질고를 모르는 이는 이웃의 고난도 마냥 쉽고 단순해 보이기만 합니다. ‘좀 잘 하지, 저런 일 안 당하게…’ 본인이 당해보기 전까지는 인생에 고난이 얼마나 불가항력인지, 또 거기에 얼마나 깊은 뜻이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런 이들은 쉽게 상처를 모르는 가해자가 되어 고통받는 형제, 자매에게 더 가혹한 정죄와 조롱의 칼날을 휘두릅니다.

복된 공동체

그런 우리를 깨우쳐 고난의 신비 앞에 고개 숙이게 만들고 형제, 자매의 고난 앞에 긍휼의 마음을 갖게 해주는 것이 바로 고난이요, 질고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할 때, 원치않는 병마를 만날 때 우리는 놀라고 억울하고 원통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때야말로 주님을 아는 때요, 주님을 닮는 때요, 믿음이 성숙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과 질고를 통해 우리는 상처모르는 가해자에서 상처입은 치유자로 거듭납니다. 복된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상처입은 치유자가 많은 교회입니다. 자신의 상처를 형제, 자매의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치유하여 천국이 임합니다. 이런 교회는 복음이 능력있게 역사하여 구원받는 영혼이 날로 늘어갑니다. 이런 교회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기쁘게 하는 교회입니다. 새로운교회가 이런 복된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뉴저지새로운교회 www.saerou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