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3편/왜 복음인가
240512 주일설교
1. 왜 유대인의 신을
예전에 한 교우가 제게 상담을 하시기를, 동생을 전도하려는데 ‘왜 우리가 민족고유의 종교를 안 믿고 유대인의 종교를 믿느냐‘고 묻는데 뭐라 답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이들도, 예수님도 제자들도 유대인들이었고 초대교회성도들이 모두 유대인이었으니 기독교를 유대인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해 보신 적이 없는지요? 그래, 맞아. 한국사람이 왜 유대인의 종교를 믿어야 하지? 만약 그런 생각이 든다면 먼저 한국고유의 종교는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조선말기에 한인들이 만든 동학과 천도교밖에 없습니다. 불교? 인도에서 시작되어 고구려 때 들어왔습니다. 유교와 조상제사? 조선초 중국에서 왔습니다. 무속신앙은 고대몽골에서 유래한 것으로 봅니다. 우리 것이니 그럼 한인들은 천도교만을 믿어야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리스사람이 시작한 민주주의정치체제에서 살아가죠? 왜 영국인들이 고안한 자본주의경제체제에서 살아갑니까? 왜 미국사람이 만든 자동차를 타고 왜 유럽인들이 발견한 전기를 사용하고 양복을 입고 사나요? 왜 이탈리아 사람들이 만든 파스타를 먹나요? 왜 예멘사람들이 만든 커피를 마시며 살아갑니까?
현재 우리 삶의 방식 중 우리 민족 고유의 것이란 거의 없습니다. 그 방식이 유용하고 옳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지, 우리 고유의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니 종교에만 이 논리를 적용하는 것은 불신앙을 포장하는 핑계일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기 힘들다는 많은 이유가 이처럼 그럴싸한 핑계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은 복음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 현재 삶의 의미를 주고 장래 삶의 소망을 줍니다.
2.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왜 이런 모습일까요?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이며 결국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이에 대해 복음만큼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답을 줄 뿐 아니라 그 답을 증명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불교와 힌두교는 세상의 근본문제가 고통이라고 가르치고 이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합니다. 이는 암환자의 근본문제가 통증이라고 진단하고 진통제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암환자의 근본문제는 몸 안의 암덩어리요, 통증은 그 암덩어리가 만들어내는 증상일 뿐입니다. 암환자를 살리려면 통증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암덩어리를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합니다. 복음은 세상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이 고통의 뿌리에 있는 죄임을 고발하고 그 죄의 암덩어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유일한 길을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 시 103편이 노래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죄를 완전히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10절과 12절을 보십시오.
(시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 (시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죄는 반드시 심판으로 대가를 치릅니다. 죄 짓고도 잘만 살던데요? 단기적으로, 부분적으로 보면 그런 착시현상이 생깁니다. 그러나 삶을 통합적이고 길게 보면 어떤 죄도 대가를 치르지 않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죄도 반드시 심판으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 심판은 영원한 멸망이요, 지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죄의 대가를 우리가 치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동과 서는 서로 만날 수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우리가 만나지 못 하도록 영원히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십니다. 동과 서는 서로 먼 것이 아니라 서로 절대 만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로써 우리 인생이 죄의 무거운 짐을 벗고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만드십니다. 할렐루야!
3.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어떻게 이토록 완전히, 완벽히 죄를 우리에게서 제거하실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은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8절 이하를 보십시오.
(시 103: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03:9)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 (시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도대체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길래 이토록 긍휼이 많은 분이라고 감격합니까? 바로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내어주셔서 모든 죄인의 죄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그 분이 당한 고난과 수치와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영원히 우리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사라졌습니다. 씻김받았습니다. 할렐루야!
날마다 이 복음의 선포를 듣는 우리에게 이 선언이 너무 익숙해서 놀랍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순절로 온 세상에 이 복음이 선포되기 전에는 세상이 들어보지 못 한 놀라운 소식입니다. 그 이후에도 복음을 듣지 못 한 곳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아직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 한 소식입니다. 물론 죄가 삶의 근본적인 문제임을 들은 이들은 물론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지 못 했기에 스스로 죄를 해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 방법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죄인이 스스로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잘 지킴으로, 이슬람은 코란에 전적으로 복종함으로 그리고 불교나 힌두교는 수행으로 자신의 업보를 씻음으로 죄값을 해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방법은 매우 합리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데 불가능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죄를 말끔히 씻을 만큼 충분히 율법과 계율을 지키고 수행으로 공덕을 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바닷물을 말끔히 다 퍼내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미션입니다. 이들 종교를 모두 자력구원종교로 분류합니다.
반면 유일하게 타력구원종교로 분류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복음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이 미션을 하나님께서 친히 수행하셨다고 선언합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가 씻을 수 없는 모든 죄를 대신 씻으시고,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의를 대신 다 이루시고 그 모든 죄사함의 효과와 의의 공로를 우리에게 거저 주셨습니다. 거저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겸손하게 그 은혜를 받아들이라고만 하십니다. 겸손히 두 팔 벌려 받기만 하면 그 모든 은혜를 거저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를 성경은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 분이 이루신 공로를 거주 주십니다. 거저! 그러니 하나님은 얼마나 긍휼이 많은 분이신지요! 예수님은 얼마나 놀라운 구원을 주시는 주님이신지요! 복음은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는 삶, 이런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는 삶을 선물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에 임하는 모든 놀라운 복의 샘근원입니다. 3-5절입니다.
(시 103: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 103: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시 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죄사함에서 시작하여 모든 좋은 것을 채우셔서 우리 인생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날아오르게 하시는 분이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4.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복음은 더 나아가 덧없는 우리의 삶에 영원한 목적과 의미, 참된 만족을 주십니다. 불교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공 즉 허상이라고 합니다. 현대무신론은 우리 삶이 아무 목적도, 이유도 없이 우연히 내던져진 먼지와 같다고 합니다. 세계도, 인생도 다 무의미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을 허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한 계획과 놀라운 능력으로 창조하신 실재이며,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존재였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은 세상을 다스릴 목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고 선언합니다. 성경의 이 가르침 때문에 인류는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세상을 돌보는 것이 인류의 사명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 인생에 참된 목적과 의미를 주었습니다. 본문 14절 이하는 하나님을 떠난 인류가 그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가 어떤지를 묘사합니다.
(시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시 103:16)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쏟아부어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 삶에 영원한 목적과 의미, 가치를 부여해 주십니다. 17-18절입니다.
(시 103: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시 103:18)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예수님의 부활은 먼지와 같던 우리에게 영원에 이르는 소망 곧 부활의 약속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이 찰라처럼 짧고 부질없는 인생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소망으로 인해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이처럼 가치없는 삶에 생명을 불어넣기에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그러므로 죄인을 구원하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가정을 회복하고 사회를 치유하고 문명을 일으킵니다.
5.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
최근 우리 교회 한 교우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얼마 안 되는 한인학생들이 모여 주말이면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임이 있어서 참여했답니다. 한편 같은 학교의 다른 한쪽에서는 주말마다 술파티, 포커파티, 골프파티를 하는 한인친구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들이 주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새로운교회 와서 교제하며 서로 소개를 하다보니 같은 학교학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 술파티, 포커파티 하던 모임의 한 친구였습니다. 그가 그저 교회에 다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중남미 니카라과에 단기선교사로 3년을 헌신하여 섬기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술파티, 포커파티의 멤버가 하나님나라 파티에 참석하고 선교사로까지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복음의 그 비밀입니다. 그 비밀이야기가 궁금하시면 오는 수요일에 마가의다락방기도회에 와보십시오. 그 술파티 멤버의 간증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기적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과 자비를 우리 삶에 부으셔서 기적을 일으킵니다. 복음은 이처럼 생명을 구원하는 진리이기에 우리는 복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다. 여러분 삶에 복음의 진리로 인한 기적이 날마다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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