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새로운교회 주일예배 “물과 성령으로”(요한복음 3:1-8) – 김도완 목사

6월 4, 2024

Series: 주일예배

Book: 요한복음

요한복음 3:1-8/물과 성령으로

240519 주일설교

1. 얼마나 착해야 구원받는가

전도할 때 받는 질문 중 하나가 ‘기독교인들을 보니까 비기독교인보다 특별히 더 착한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교회를 가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질문을 받고 보면 전도하던 기독교인도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 착한 사람만 있는 것 같지는 않는 것이 사실이고 교회 밖에도 더 착한 사람도 많은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니 전도하기가 망설여지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더 착한 사람이 마땅히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더 착한 행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착한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착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에게 주시는 구원은 보상입니다. 복음은 구원이 보상이 아니라 은혜라고 선언합니다. 즉 죄인에게 구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얼마나 착하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에 연결되었느냐에 따라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착시현상이 생깁니다. 종종 구원받은 이가 별로 착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의 본질을 이해하면 이 착시현상이 사라집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찾아온 바리새인 니고데모와의 대화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곧 율법을 따라 착하게 살도록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율법은 상과 벌을 이용하여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지켜 선하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니고데모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노력했고 그리고 다른 이들을 그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아와 무엇을 해야 영생에 이를 수 있겠느냐고 질문했던 부자 청년처럼 이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니고데모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막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렇게 해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배우고 가르치고 지켜도 자신의 본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찾아온 때가 밤이었다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것이기도 했겠지만 그의 마음이 무지의 어둠에 덮여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를 덮고 있는 무지의 어둠을 예수님은 진리의 빛으로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능을 다스리는 방식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2. 물로 거듭나야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구원은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되느냐, 얼마나 많은 선한 일을 하느냐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본성으로 태어난 존재는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해도 구원받지 못 합니다. 선한 일로는 그의 죄를 씻음받고 본성이 새로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할 때 마음에 감동과 보람이 있던데요. 이는 마치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마음에 만족이 오는 것과 같습니다. 금방 다시 배고파집니다. 아무리 먹어도 다시 배고픈 것처럼 선한 일을 할 때의 자기만족감은 위기와 두려움이 맞닦드리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기적이고 충동적인 본성으로 돌아갑니다.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베풀 여유도 생기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야 선한 일도 하지, 조급한 상황이 찾아오면 다시 악하고 이기적인 본성이 솟아납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본성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선과 의와 진리를 욕망하는 본성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그런 본성으로 다시 태어납니까? 그 방법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입니다.

(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먼저 물로 거듭 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물은 물세례를 의미하고 이는 세례를 베푸는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 아래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물로 거듭남은 교회의 가족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거듭남의 외적 증거입니다.

3. 성령으로 거듭나야

이어서 성령으로 거듭남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증거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을 모실 때 우리의 본성이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의 영 성령님을 모시면, 분리되어 있던 하나님께 다시 연결되면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이 됩니다. 이전 것, 죄와 악으로 실패한 첫창조물, 멸망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고 야만의 본성을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존재는 지나갔습니다. 완전히 새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새존재는 당연히 새로운 본성을 타고 납니다. 그 본성은 죄와 악을 벗고 하나님의 형상을 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과 영광을 품었습니다.

이는 비유하자면 꽃나무에서 꺽어서 화병에 꽂아둔 꽃과 같습니다. 꽃은 줄기가 품고 있는 수분이 바닥날 때까지 한동안 아름다운 색을 드러내고 향기를 풍기지만 점점 색이 바라고 향기는 사라집니다. 이 꽃은 결국 바짝 말라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이전 인간의 현실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모든 도덕성, 윤리의식, 이타심을 다 동원해서 의롭게 살아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타고난 악한 본성을 바꾸지는 못 합니다. 결국은 그 본성이 이끄는 대로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으로 향합니다. 그 곳을 성경은 지옥이라 부르고 그 운명을 멸망이라 부릅니다.

이 꽃은 어떻게 살아납니까? 살아있는 꽃나무에 접붙힘을 받으면 다시 살아납니다.

(롬 11:17) …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그리스도)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꽃나무로부터 수분과 양분을 다시 공급받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꽃나무는 기름진 대지의 끝없는 수분과 양분을 빨아들여 꽃에 공급하고 이 꽃은 그 양분으로 열매를 맺어 다시 생명을 낳습니다. 이 상태가 성령님께 접붙힘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이제 자신의 도덕성과 노력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성도의 영을 그리스도에게 접붙히십니다. 이제 성도는 성령님을 통해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로부터 의와 사랑과 자비와 거룩과 영광을 공급받습니다. 이제 성도는 자신의 힘으로 살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삽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이것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인 참교회에 속하고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을 모신 이는 그리스도에게 다시 연결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4. 건축중인 건물

그러면 왜 거듭난 성도인데도 두드러지게 변화된 본성으로 사는 것처럼 안 보이는 이들이 많습니까? 나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의지하는데 나는 왜 여전히 이렇게 부족한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럴까요?

거듭남은 한번의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거듭 난다는 말은 다시 태어나는 뜻 아닙니까? 막 태어난 생명은 어떤 상태입니까? 병원에 가보세요. 모두 아기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어깨 딱 벌어진 청년으로 태어나는 이는 없습니다. 당연히 미숙합니다. 육체로는 성숙하지 못 하여 생존을 타인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정서적으로도 미숙하여 자기중심성을 벗지 못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의 표현을 빌리면 아직 건축중입니다.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지어져 가느니라! 건축중입니다. 여기저기 땅을 파놓고 돌과 흙과 자재가 여기저기 쌓여있고 철골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고 벽도 아직 올라가다 말았습니다. 당연히 아직 비와 바람과 추위를 막기에 불충분합니다. 그럼 보기 흉하고 제대로 쓸 수 없다고 건축중인 집을 부수고 내어버리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완성될 집이 어디 있을까요? 훌륭한 건축가는 아직 흉하고 쓸모없는 집터를 보며 완성된 아름답고 튼튼한 집을 바라보는 비전을 가진 사람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도 베드로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도 많은 실수와 미숙함이 있었다는 것을 사도행전을 기록합니다. 위대한 건축가이신 성령님은 완성된 성전이 될 그들의 미래를 바라보시며 만들어 가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건축 중입니다.

5. 자라나는 생명

또 우리는 자라고 있습니다. 우는 아기를 보고 돈도 못 벌어오는 것이 밥달라고 떼만 쓰냐, 하는 어른이 없습니다. 아, 사랑이 많이 필요하구나. 사랑을 받아야 커서 사랑을 줄 줄 아는 성인이 되지. 암… 성숙한 성인은 그 아기가 장성한 성인으로 자랄 것을 바라보고 돌봅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성령님은 이미 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성령님)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그러므로 여러분 주변에 그리스도인이 왜 저럴까 하는 이를 만나면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 저 사람은 아직 건축 중이구나. 자라는 중이어서 돌봄이 많이 필요하겠구나. 이제 믿음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며 말씀해보십시오. 형제님, 아직 건축중이시군요. 자매님, 사랑이 많이 필요한 때로군요. 건축 중인 형제는 반드시 거룩한 성전이 될 것입니다. 자라는 중인 자매도 그리스도처럼 장성한 성인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의 손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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