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3편/영생의 복이 있는 곳
240526 전교우봄소풍
1. 공동체의 피곤함
현대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공동체 생활을 피하는 교인이 많다는 점입니다. 교회규모가 클수록 이런 경향은 더 심해서 소그룹모임이나 성경공부, 봉사활동 등을 피하고 예배만 드리는 교인의 수가 많습니다. 이런 경향을 최근 더 가속화시킨 것이 온라인예배중계의 보편화와 팬데믹입니다. 이제 교회에 안 가도 온라인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인이 생겨났습니다. 이래저래 대면하여 공동체생활을 하는 이들의 비율은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왜 대면활동, 공동체활동을 회피하는 것일까요? 현대사회의 개인주의화가 한 몫 한다고 믿습니다. 저처럼 내향적 성향의 사람은 대면활동이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또는 대인관계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아예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은 채 하나님만 바라보며 신앙생활하는 것을 원하기도 합니다. 이런 필요를 가진 이들에게 온라인예배는 축복과도 같습니다. 그러면 대면관계의 피로감을 피할 수 있는 온라인예배나 현장예배를 드려도 인관관계를 맺지 않는 방식의 신앙생활은 현대인에게 맞는 새로운 형태의 신앙생활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답을 줍니다.
2. 공동체의 아름다움
다윗이 성전에 올라가며 부르는 노래라고 제목이 붙은 짧은 시편은 먼저 공동체 생활의 아름다움을 노래함으로 시작합니다.
(시 133: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형제가 왜 연합하여 동거할까요? 이스라엘의 토지제도 때문입니다. 가나안 정착 초기 하나님의 법에 의해 지파별로 분배한 땅은 다시 가족별로 제비뽑아 나누었습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각 가족의 땅은 자녀들에게 공동상속되었습니다. 이 말은 아버지의 땅을 형제들이 공동상속 및 공동경작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상식으론 당연히 아들의 수대로 균등하든 좀 차등을 두든 나누어주어야 합니다만, 당시 이스라엘은 나누지 않고 공동상속시켰습니다. 가족의 땅을 여러 형제가 함께 상속을 하고 경작을 하다보니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갈등이 생깁니다. 개인주의가 상식인 된 현대인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입니다. 오늘날은 부모, 자녀도 성인이 되면 동거하기 불편합니다. 하물며 형제, 자매라니요! 우리에게 이 시편을 쓰라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니 얼마나 불편하단 말인가, 정도가 될 겁니다. 그런데 시인은 정반대로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노래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아름답단 말일까요? 2절이 그 답입니다.
(시 133: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시인은 두 개의 비유를 노래하는데 그 첫째는 제사장 아론이 임직할 때 머리에 붓는 향유입니다. 이 향기로운 기름은 머리에서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내려 저 아래 옷깃까지 흘러 아름다운 향기를 온 몸에 풍기게 합니다. 이 향기로운 기름은 머리에 붓지만 머리만 향기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을 향기롭게 합니다. 왜냐하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비유는 규모가 더 큽니다. 이스라엘 땅 전체를 기름지게 하는 이슬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시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헐몬은 이스라엘땅의 가장 북쪽에 있는 산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백두산 같은 위치와 상징적 지위를 가집니다. 그 산에 내리는 이슬은 남쪽으로 흘러 단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와 요단강을 이룹니다. 이스라엘땅 전체를 기름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비가 적고 건조한 이스라엘 땅에 매일 새벽 내리는 이슬은 그야말로 축복입니다. 이 복된 이슬은 남부가나안에 자리한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산 위에도 내린다고 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에 있는 산이나 남쪽에 있는 산이나 같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의해 적심받고 기름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헐몬산이나 시온산이나 같은 이스라엘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비유는 한 몸을 이룬 공동체에 임하는 복을 노래합니다. 향기로운 기름이나 땅을 기름지게 하는 이슬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상징합니다. 이 복은 한 몸을 이룬 공동체에 임하여 모든 이들을 복되게 합니다. 이 몸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 이 몸과 분리된 이들은 이 복을 누리지 못 합니다. 이 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 중의 복 영생입니다.
3. 공동체의 복
공동체 생활은 많은 불편함과 피로를 줍니다. 그 불편함은 오래 혼자 살던 이가 친구나 이웃과 함께 동거를 시작해 보면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때로는 피로를 넘어 큰 상처를 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공동체생활이 이렇게 아름답다고 노래합니까? 그 이유는 이 시가 노래하는 것처럼 불편과 피로, 상처를 압도하고도 남는 큰 복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에는 분명 불편과 피로 그리고 상처가 있지만 이보다 훨씬 더 큰 복과 위로, 은혜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혼자 살지 않고 결혼하고 자녀와 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한인들이 없는 저 중부, 남부지방에 가지 않고 북동부 뉴욕 인근이나 서부 엘에이 근처에 몰려사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저 집값 싼 산골에 들어가 살지 않고 집값 비싼 도시 근처에 사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몰려사는 곳에는 사기꾼도 많고 못된 사람도 많고 그래서 나쁜 일을 당할 확율도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사는 삶의 행복이 사기꾼도, 악인도 없는 곳에서 혼자 사는 외로움과 불편함보다 훨씬 큽니다.
인간은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창세기도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직후 ‘인간이 혼자 사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아니하여서‘ 하와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인간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이듯 성도는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이루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4. 공동체의 능력
사도 바울은 성도의 마땅한 삶을 이렇게 권명합니다.
(히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성도는 모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반대로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 서로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약한 자들이 없나, 쓰러진 자들이 없나 돌아보고 돌보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서로 더 사랑하고 더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려면 반드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혼자서도 물론 조용히 누군가를 섬기고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함께 하는 것만큼 성과를 거두기 힘듭니다. 사랑과 선행을 막으려는 마귀의 공격을 혼자서는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서가 가르칩니다.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연합한 것이 낫고, 두 사람보다 세 사람이 연합한 것이 훨씬 강력하다는 뜻입니다. 바로 공동체의 능력입니다. 거룩한 삶, 의로운 열매를 맺으려는 영적 싸움에 임하기 위해서도 공동체는 필수입니다. 혼자서는 절대 영적 싸움을 이기지 못 합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모이면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불같은 고난을 통과하여 탄생하지 않았습니까? 공동체였기에 가능했습니다. 혼자라면 누구라도 넘어졌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고난이 오든 공동체라면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성령으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주님의 영 곧 성령님과 동행하려면 반드시 공동체로 모여야 합니다. 홀로 성령님을 체험하는 예외적인 상황이 없지 않지만 공동체를 떠나 있으면 점점 더 성령님을 경험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배만 해도 보십시오. 우리가 주일마다 드리는 뜨거운 찬양과 기도와 말씀의 은혜를 홀로 큐티하면서 매번 체험할 수 있습니까? 활활 타오르던 장작더미에서 장작 하나를 빼서 두면 금방 불이 꺼져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배만 드리고 구역이나 봉사를 피하는 것은 결코 건강한 신앙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거나 멀리 출장을 가서 부득이하게 온라인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신앙을 온라인으로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부부싸움을 해도 함께 사는 것이 행복이듯이, 부대끼는 것이 피로하고 때로 짜증도 나고 상처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와 더불어 신앙생활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이 공동체는 성령님이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통해 부으시는 영생의 복을 누리는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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