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34-40/좋은 친구
240609 주일설교
1. 좋은 친구란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누구인가요?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나이가 들수록 좋은 친구를 만나기가 점점 어렵습니다. 좋은 친구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에게 두 명의 친구가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첫째 친구는 평소 연락이 거의 없습니다. 그 친구에게 연락이 올 때는 뭔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입니다. 돈 좀 빌려줘, 이것 좀 도와줘, 나 힘들어… 대화하는 내내 그는 여러분에게 어떤 이익을 좀 얻을까만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야기는 들을 생각도 없고 자기 이야기만 주구장창합니다. 할 이야기가 끝나고 필요한 도움을 받고나면 다시 연락이 두절됩니다. 필요한 것이 없을 때는 여러분을 결코 찾지 않습니다.
둘째 친구는 수시로 연락이 옵니다. 여러분을 그냥 좋아합니다. 여러분의 일과 가족과 취미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는 여러분과 커피를 마시고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좋아하지만 여러분 이야기를 듣기도 좋아합니다. 좋은 것이 생길 때마다 여러분을 생각하고 여러분에게 무엇이든 자꾸 주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과 헤어지고 나서도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아, 이 친구가 나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그 친구와 함께 있으면 여러분이 행복합니다.
자, 누가 좋은 친구입니까? 여러분은 누구와 함께 있고 싶습니까? 여러분이 부자라면 누구에게 더 많은 선물을 주고 싶으세요? 물어보나마나한 질문이지요. 누가 자신에게 필요할 때만 친구를 찾는 이기적인 친구를 좋아하는 이가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필요와 상관없이 친구를 그저 좋아하는 둘째 친구, 좋은 친구를 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러시지요?
2. 하나님의 좋은 친구
그럼 하나님은 어떤 친구를 좋아하실까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요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5) 이제부터는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
주님이 보실 때 우리는 어떤 친구입니까? 많은 이들이 이기적인 친구처럼 주님께 나갑니다. 평소에는 주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삶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고난을 만나고 필요한 것이 생기면 갑자기 주님을 찾습니다. ‘아, 주님,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이번만 도와주시면 열심히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은 그런 이기적인 모습의 간구도 물론 긍휼이 여기시고 들으십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주님은 잊어버리고 다시 자신의 삶에 빠져버립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에는 주님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첫째 친구의 모습과 닮았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원하는 Wish List를 낭독하는 수준을 좀처럼 넘어서지 못 합니다. 주님, 잘 만났습니다. 거기 앉으세요. 잘 들으세요. 첫째, 우리 가정에 필요한 겁니다. 둘째, 내 일터에 필요한 겁니다. 셋째,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겁니다. 다 적으셨어요? 잊어먹지 마세요. 섭섭할 겁니다. 자, 저는 갑니다. 다음에 뵐 때까지 다 해결해 놓으세요. 뭐,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잊으셨어요? 제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다음에 들읍시다. 제가 요청한 거나 빼먹지 말고 잘 해결해 두세요. 갑니다~
우리의 예배는 또 어떻습니까? 아, 주님. 저 마음이 몹시 힘듭니다. 위로가 필요해요. 자, 오늘 은혜 주실 준비 되셨나요? 인색하게 굴지 마시고 은혜를 좀 팍팍 쏟으세요. 찔끔찔끔 주시지 말고요. 저도 그냥 달라는 것 아닙니다. 오늘은 헌금 두 장 넣었어요. 찬양도 좀 열심히 할게요. 봉사도 하잖아요. Give and Take 아시지요? 받기만 하고 은혜는 안 내어놓으시면 정말 섭섭합니다. 자, 예배 시작해 봅시다~
기도도, 예배도 모두 자신이 중심입니다. 기도가 주님과의 참된 대화가 아니라 자신의 일방적인 요구로 끝납니다. 예배가 주님을 향한 참된 경배가 아니라 자신이 위로받는 영적 서비스센터가 바뀝니다.
주님은 우리가 둘째 친구처럼 참 좋은 친구가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의 이야기만 쏟아놓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기도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 높여드리는 진정한 예배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좋은 친구에게 모든 것을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풍요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좋은 친구에게 진정한 동반자가 되어주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눅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그런데 왜 우리는 주님에게 좋은 친구가 되지 못 하고 이기적인 친구처럼 구는 것일까요? 우리의 이기적 본성 즉 죄성으로 인해 자신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주만물이 끌어당기는 힘 중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이기적인 자기사랑의 중력에 갇혀 있습니다. 구원이란 이 자기사랑의 중력에서 벗어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자기사랑의 중력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보다 더 큰 끌어당기는 힘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힘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 무리가 모여 대표 한 명을 예수님에게 보내 예수님을 말로 함정에 빠뜨리려 하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율법사인 그 대표는 율법해석의 전문가로서 예수님의 해석에 신성모독의 요소가 있는지를 밝혀내어 그를 곤경에 빠뜨릴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말문을 막아버린 것처럼 바리새인들도 반박하지 못 할 진리를 들려주셨습니다. 율법 중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신명기와 출애굽기의 말씀을 각각 인용하여 두 개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신 25:5을 인용한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였습니다.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거나, 하나님을 부리거나,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어드리는 대신 구원이란 선물을 얻어내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친한 삶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요, 하나님의 좋은 친구가 되는 삶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중심이 된 삶입니다. 이 삶에 관한 가장 적절한 비유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바대로 바로 결혼일 것입니다.
(사 62:5) 마치 …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는 죽을 때까지 한 몸으로 살기로 서약합니다. 그 결과 저는 결혼식 이후 제 아내와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아내 없이 혼자 무언가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함께 해왔습니다. 둘 중 한 사람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그럴 것입니다. 이런 결혼의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길은 무엇일까요?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삶의 중심에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편하고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반면 이 삶을 지옥처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내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무시합니다. 외면합니다. 속입니다. 소외시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불편하고 피곤하고 괴롭습니다. 하루 종일 운전하고 가야하는 길에 원수를 옆에 태우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내리지도 못 하고 죽을 노릇이겠지요.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결혼의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듯,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복의 길입니다.
성도의 삶은 그 하나님과 결혼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모든 것이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모든 것이 형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심으로 이렇게 하나님과 친밀하게 부부요, 친구요, 자녀로 복된 삶을 살아가라고 초청하셨습니다.
4. 하나님의 사랑을 받다
그런데 이기적인 우리가 배우자를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듯이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도 무척 어렵습니다. 사실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허벅지힘이 세도 우리가 중력을 뿌리치고 하늘을 날아오르지 못 하듯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의 이기적 본성을 거슬러 자기밖에 아무 것도 관심이 없는 우리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온 힘으로 다해 사랑합니까? 그 비밀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그 사랑을 받는 길을 가르치십니다.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하나님이 먼저 아들을 사랑하시고 세상을 사랑하시고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아들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이 사랑 안으로 들어오라고 명하십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먼저 죄인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랑 안에 거하며 사랑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와 예배는 소원을 이루고 위로를 얻는 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마시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이는 마치 부부가 신혼여행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신혼여행에서 부부는 24시간 모든 순간을 오로지 두 사람이 함께 좋은 경치를 보고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누리는데 집중합니다. 둘이서 시간을 같이 보내면 보낼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더 깊어지고 더욱 서로를 사랑하게 됩니다. 신혼여행에서 일을 하거나 다른 친구와 연락하고 놀려는 정신나간 사람은 결혼의 행복을 못 누릴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의 기도와 예배는 마치 신혼여행처럼 상대에게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심, 성령님의 신실하심에 집중하여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즐거워하고 누리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께 집중합니까? 그래서 영적 시각장애인이 된 우리를 위해 주님은 아들과 그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본 자는 이미 하나님을 본 자라고 하셨습니다.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의 성품과 행하심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요 15:10입니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면 그 분의 사랑 안에 머무릅니다. 이 사랑의 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 사랑의 삶은 우리 삶에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줍니다.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은 진정한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줍니다. 이것은 세상의 부귀영화, 성공과 자랑이 주지 못 하는 참된 기쁨이요, 행복이요, 만족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친구가 누리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가 누리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가 누리는 행복입니다. 주님의 좋은 친구가 되어 이 모든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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