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6 새로운교회 주일예배 “사람이 과연 바뀔까”(요나 3:1-10) – 김도완 목사

6월 15, 2024

Series: 주일예배

Book: 요나

요나 3:1-10/사람이 과연 바뀔까

240616 주일설교

1. 사람은 과연 바뀌는가

2004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학교수살인사건이라 이름붙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경찰행정학과 교수였던 이윤근 교수는 1974년 초등학교 후배인 전용술이 살인과 강도로 사형판결을 받자 그의 갱생가능성을 믿고 지극정성으로 옥중뒷바라지를 하고 구명활동을 벌인 끝에 마침내 20년 만인 1993년 모범수로 석방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석방 후에도 이교수는 수백 만원씩 생활비를 여러 차례 대어주며 그를 도왔지만, 그는 오히려 사업자금을 요구하다가 나무라는 이교수에게 앙심을 품고 마침내 2004년 칼을 휘둘러 자신의 은인을 살해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한동안 한국사회에는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이 관용어는 사람의 천성은 좀처럼 바뀌지 않기에 문제있는 사람을 계몽하고 교화하는 것이 별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비슷한 의미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제 버릇 개 못 준다 등의 속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사람이 바뀌는 것이 가장 큰 기적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그만큼 사람이 바뀌는 것은 어렵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이 일어나듯 사람이 바뀌는 일도 흔치 않지만 분명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 희망이 없다면 우리의 교육과 계몽은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 단지 죽어서 지옥이 아닌 천국 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성품과 삶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사람이 바뀐다는 희망 없이는 구원의 희망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뀔 수 없다면 전도는 왜 하고 설교는 왜 하고 양육과 성경공부는 왜 하겠습니까? 그냥 신앙고백만 받고 죽어서 천국 가기만 기다리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성경말씀처럼 우리는 바뀌어야 하고 또 바뀔 수 있기에 저는 설교를 하고 여러분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공부하고 순종하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그럼 그렇게 바뀌기 어려운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무엇에 의해 바뀔 수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믿고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오늘도 기도하며 순종하려고 애를 씁니까? 그 답을 드디어 회개운동이 일어난 니느웨의 사례를 통해 찾아봅니다.

오랜 만에 요나서로 돌아와 3장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큰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놓은 후부터 시작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거듭되는 명령에 결국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니느웨는 놀랍게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회개를 시작하였습니다.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 진노를 멈추실 것을 기대하고 회개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니느웨는 악독함으로 악명이 높은 앗수르제곡의 수도였습니다. 그 도시의 교만하고 포악하고 야만적인 이들을 회개에 이르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표면적으로는 분명 요나의 선포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충분치 않은 답입니다. 그들을 회개에 이르게 한 진짜 힘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것은 결코 포기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입니다.

2. 하나님의 의지로

이미 살펴보았다시피 요나는 니느웨에 복음을 선포하기를 싫어했습니다. 요나의 바람대로 했다면 니느웨는 멸망해야 마땅했고 멸망했을 것입니다. 1-2장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기 싫었던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회개할 생각도 없는 니느웨를, 그것도 당신의 종마저 싫다고 도망가는 마당에 주님도 굳이 구원하려 애쓰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그러나 큰파도를 일으켜 요나의 갈 길을 막아서십니다. 다시스로 가는 길이 막힌 요나가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해서라도 니느웨의 구원을 막으려 하자 이번에는 큰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게 하셔서 죽음 대신 3일간의 철저한 회개의 기도를 드리도록 만드셨습니다. 그 후 요나에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당신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욘 3: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 3: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어 회개를 선포케 한 힘은 요나의 뜻도, 요나의 노력도 아닌 거듭거듭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명령하시고 파도와 큰물고기를 준비하시어 불순종하는 종이 순종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구원의지입니다. 어떻게든 죄인을 구원하시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힘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죄인을 구원하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자비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이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드리신 제사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무엇까지 주실 수 있습니까? 인터넷에 보니까 연인과 헤어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답니다.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겁니다. 선듯 빌려주는 이에게는 점점 액수를 높이랍니다. 그러면 연인이든, 친구든, 심지어 가족이라도 돈문제가 얽히는 순간 관계가 깨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되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독생자, 유일한 하나님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 때문에 죄인이 구원얻습니다. 이 하나님의 고집 때문에 기어이 죄인은 구원을 받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기다리시고 인내하시고 기어이 아들까지 내어주신 구원의 고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고집 때문에 요나는 결국 굴복하고 니느웨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나와 달리 하나님의 뜻에 스스로 순종하여 세상을 위해 십자가로 가신 이가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 하나님의 구원의지와 예수님의 기쁜 순종과 희생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사랑의 능력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죄인을 구원하고 세상을 치유합니다. 여러분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3. 복음의 능력으로

죄인을 변화시켜 회개에 이르게 하는 두 번째 힘은 복음 그 자체의 능력입니다. 이는 요나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그가 어떤 자세로 회개를 선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욘 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욘 3: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는 제대로 돌아보려면 3일이나 걸리는 큰 성인데 요나는 그 성을 며칠이나 다니면서 회개를 외쳤습니까? 겨우 하루입니다. 산술적으로 그 성에 사는 이들의 3분의 2는 이 회개의 촉구를 듣지 못 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의 외침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이 죄인지, 살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6절을 보면 이 소식이 돌아돌아 니느웨 왕에게까지 들립니다. 이 말은 요나는 도시 중심에 있었을 왕궁까지 가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요나가 여전히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았으며, 니느웨가 회개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외침의 시간도 턱없이 짧았으며 외침의 태도 또한 얼마나 무성의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회개의 힘이 선포자의 자질이나 노력에 달려있다면 니느웨는 절대 회개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니느웨의 모든 백성이 회개를 시작합니다. 이는 무엇을 보여줍니까? 회개의 능력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선포되는 메시지 그 자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은 누가 선포하든 그 능력으로 인해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이는 마치 총의 능력과 같습니다. 종종 미국에서는 아동관련총기사고가 일어납니다. 연방 질병예방센터 CDC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21년에만 총 2,590명의 어린이가 총기 관련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청소년들의 잘못된 총기사용으로 인한 사망부터 부모가 부주의하게 보관한 총을 만지던 유아들의 의해 일어난 또래 형제, 친구의 사망사고까지를 포함합니다. 3세, 4세 아이들이 장난감인 줄 알고 놀다가 방아쇠를 건들어 발사된 총알에 의해 형제나 친구, 가족이 사망하는 것입니다. 총의 방아쇠는 얼마나 예민한지 아이의 손가락 힘으로도 얼마든지 격발됩니다. 그 총탄의 위력은 가냘픈 아이가 당기든, 거구의 장정이 당기든 상관없이 날아가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총알은 노련한 설교자가 선포하든, 어눌하고 미숙한 신학생이 전하든, 신실한 성도가 전하든, 흔들리는 미약한 초신자가 전하든 그 자체로 강력한 능력으로 날아가 죽어가는 영혼의 심장에 박혀 그를 살려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은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에는 사람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가득합니다. 이 능력은 죄인에게 회개를 일으키고, 불신자에게 믿음을 일으켜 믿음의 완성에 이르게 만듭니다. 죄인이 변화받아 의인이 되는 것은 오직 이 복음이 일으킨 믿음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자신이 보잘 것 없어 보여도 복음을 전할 용기를 얻습니다. 이 능력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고집 센 불신자에게도 믿음을 기대하고 전할 소망이 생깁니다. 이 능력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이라도 치유되고 회복되고 구원되리라는 소망을 갖고 하나님나라를 전할 믿음이 생깁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우리가 믿을 바요, 소망이요, 담대함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에게도, 우리 교회에도, 저 회개치 않는 죄인에게도, 멸망할 악인에게도 소망은 바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구원의지와 강력한 복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이, 복음의 능력을 붙드는 이는 그러므로 낙심치 않고 의로운 고난을 감당하며 섬김의 땀과 선교의 눈물을 기꺼이 감당합니다.

사랑하는 새로운교회 성도 여러분, 요나처럼 억지로 전하는 복음에도 악한 니느웨가 회개하였다면 예수님처럼 기쁨으로 순종하여 전하는 복음에는 얼마나 큰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그 능력으로 오늘날 온 세상이 복음과 교회로 가득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겸손히 순종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