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4:1-11/요나를 위한 변명
240630 주일설교
1. 화낼 만 하다
예전에 한 교우가 상담하기를, 전도하려는 친구가 교회 이야기를 꺼내면 화부터 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내 인생에 왜 이토록 힘든 고난을 많이 주느냐‘며 항변하는데 그 교우께서 보기에도 정말 그 친구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뭐라 할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에 질병까지 찾아와서 고통받고 있는데 자녀문제로 또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3종세트를 혼자 다 겪고 있는데 하나님께 화를 낸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겠나, 저 사람은 그럴 만 하지… 여러분도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습니까? 이 때 과연 하나님은 무어라 하실까요? 그 때 우리는 정말 정당하고 옳은 것일까요? 그 답은 요나와 하나님과의 대화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나서 4장을 읽었습니다. 요나서의 사건은 3장에서 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이 심판을 거두시는 것으로 끝납니다. 4장은 이 사건에 대한 요나와 하나님 사이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는 요나가 격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욘 4: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욘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
요나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처음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이미 하나님과 많은 대화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대화를 통해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여호와의 성품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이해할 수 없어서 거역하고 도망쳤던 것입니다.
(욘 4:2) …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이런 요나의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섬기기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에 동의가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의문과 불만이 사라지지 않기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 합니다. ‘하나님,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순종이 안 됩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이를 잃었는데 항상 기뻐합니까? 어떻게 우리 집을 풍비박산나게 만든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합니까? 어떻게 이런 고통스러운 질병과 온갖 어려움을 안고 범사에 감사합니까?’ 그래서 요나처럼 화가 나 있습니다. 휴화산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태로 연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요나는 너무나 화가 나 죽을 정도였습니다.
(욘 4: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2. 누가 옳으냐
요나는 정말 할 말이 있습니다. 니느웨가 어떤 도시입니까? 조국 이스라엘을 짓밟은 원수 중의 원수 앗수르의 수도가 아닙니까? 러시아의 폭격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모두 잃은 우크라이나의 어느 아빠에게 모스크바에 가서 푸틴과 러시아 군인들을 축복하라면 기쁘게 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가능합니까? 그런 요나에게 하나님은 무어라 하십니까?
(욘 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가 원수 니느웨의 멸망을 바라고 화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원수 니느웨를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옳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요나가 더 잘 이해됩니다. 요나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됩니다. 원수사랑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교회에 처음 출석한 새교우와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교회에 온 이유 중 하나를 성경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니 ‘원수를 사랑하라‘고 써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사람이 쓴 글이 아니야, 사람이 썼다면 이런 요구를 썼을 리가 없어,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이 쓰신 글이 맞네‘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요나와 우리에게 하나님은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바로 박넝쿨의 비유입니다.
요나는 여전히 분노로 가득하여 성읍 동쪽에 나가 뜨거운 햇살을 피하고자 초막을 짓고 며칠이고 니느웨성이 무너져내리기만 기다립니다. 어느 날 얽기설기 만든 초막의 틈을 박넝쿨이 타고올라 메워서 뜨거운 중동사막의 햇살을 막아 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요나가 박넝쿨 덕분에 즐거워하고 있으려니 다음 날 벌레가 갉아먹고 뜨거운 사막의 동풍이 불어 박넝쿨이 말라 죽어 뜨거운 햇살이 다시 초막틈 사이로 내리쬐어 덮고 어지러워 죽고 싶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 다시 죽고 싶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욘 4:8) …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그러자 하나님은 다시 한번 요나에게 그가 화내는 것이 옳은 지를 물으십니다.
(욘 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요나는 이 장에서 네 번이 죽겠다, 죽고 싶다는 표현을 쓰며 화를 냅니다. 이 쯤 되면 프로화낼러, 상습자해공갈단입니다. 요나에게 한국사람의 피가 흐르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툭하면 죽고 싶다고 하지 않습니까? 힘들어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지루해 죽겠다, 좋아 죽겠다… 오늘도 보고싶어 죽겠다고 하셨지요?
3. 누구의 박넝쿨이냐
아무튼 자신이 화내는 것이 옳다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왜 그가 아닌 하나님이 옳은 분이신지를 설명하십니다. 요나를 기쁘게 했고 그가 빼앗겼다 생각해 화나게 만든 박넝쿨이 요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0절입니다.
(욘 4: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박넝쿨은 누구의 것입니까? 박넝쿨을 얻기 위해 요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주셨습니까?
(욘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가 좋아하고 아끼고 누리는, 우리의 것이라고 여기는 소중한 것이 모두 이 박넝쿨과 같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건강은 우리의 것입니까? 태어나보니 나는 두 발로 걷고 두 눈으로 보고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생명은 우리의 것입니까? 태어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했습니까? 자유는 우리의 것입니까? 태어나보니 자유로운 시대의 대한민국, 세계최강국 미국에서 삽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우크라이나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우리의 공입니까? 모두 거저 받은 것 아닙니까? 하지만 돈은 내가 벌고 공부는 내가 한 것 아닌가요? 농사를 보십시오. 농부가 아무리 부지런히 땅을 갈아도 비가 안 오고 해가 안 뜨면 농사는 끝입니다.
(시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공부도 마찬가지,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노력은 성취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90%의 환경과 운과 유전의 공에 비하면 우리 스스로의 노력은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 성취를 잃었다 하여 아까워하고 격분하는 것은 그것은 은혜로 주신 하나님 입장에서는 무척 이상한 일입니다. 이는 마치 힘들게 손으로 농사짓는 농부의 자립을 위해 정부가 무료로 트랙터를 10년간 빌려주기로 했다가 되찾아가려니까 화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트랙터를 가져가면 나는 뭘로 농사를 지으라는 말이야?’ ‘이건 원래 당신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되찾아 가려는데 화를 냅니까?’ 그러게요, 왜 화를 낼까요? 요나도 착각하고 우리도 착각하는 바는 자신이 누리면 자기 것인 줄 압니다. 그러므로 박넝쿨을 잃은 요나가 화를 내는 것이 옳지 않듯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고난과 상실로 인해 분노하고 원망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4. 니느웨는 하나님 것이다
반면 하나님이 니느웨에 심판을 내리지 않는 것은 왜 옳은 것입니까? 박넝쿨은 요나의 것이 아니지만 니느웨는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욘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내가 창조한)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니느웨의 12만 명의 백성은 비록 좌우를 분별하지 못 하는 자들 즉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 하는 죄인들이지만 당신이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들이고, 많은 가축들조차 당신의 사랑과 지혜를 쏟아부은 피조물인데 아까워서 어떻게든 용서하여 구원하려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얻은 생명과 건강과 돈과 가족과 성취도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당신의 사랑과 능력으로 창조한 피조물을 잃는 것이 얼마나 아깝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지극히 옳습니다. 아무도 창조주이신 모든 것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죄인사랑을 그르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자격은 요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 당신이 죄인을 사랑하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인정해도 왜 우리에게까지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자꾸만 명령하시는 것입니까? 왜 싫다고 도망하는 요나를 굳이 돌이켜 세워서 보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거듭거듭 설명하고 설득하십니까? 다른 선지자를 보내시거나 이스라엘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구원하시면 안 됩니까? 도대체 무엇을 바라시기 때문입니까?
5. 요나와 함께 기뻐하고픈 하나님
요나가 하나님의 기쁨을 같이 누리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 즐거운 것을 누릴 때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멋진 나이아가라, 그랜드캐년에 가도 혼자 가보십시오. 금방 시시해집니다. 오래 있고 싶지 않습니다. 좋으면 좋을수록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보고 누리고 수다떨고 즐기고 싶습니다.
눅 15장에서 잃은 돈을 찾은 여인, 잃은 양을 찾은 목자,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마지막 행동은 무엇입니까? 온 동네 사람을 불러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되고 영원한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하십니다. 이 기쁨은 돈과 성공이 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이야말로 하나님이 진정 자녀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쁨을 홀로 도저히 누릴 수가 없어서 자녀를 초청하십니다. 큰아들아, 너도 질투와 욕심의 족쇄를 벗어버리고 이 천국의 기쁨을 누리기를 바란다. 요나야, 너도 미움과 분노의 늪에서 벗어나 이 영원한 기쁨을 누리기를 바란다. 도완아, 너도 허영과 미련의 눈가리개를 벗어버리고 이 완전한 기쁨을 누리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 초청에 응답하는 것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큰 수혜자가 사실은 큰아들 자신이라는 것, 요나 자신이라는 것,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가능합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이 니느웨보다 의로워서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 했습니다. 큰아들은 자신이 작은 아들보다 자격이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우리도 늘 그런 착각을 하면서 삽니다. 교회 다니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선교하는 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의로운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의로우십니다. 우리는 아들의 의로움을 거저 받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을 뿐입니다. 즉 우리에게 죄인을 정죄하고 미워할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눅 15장과 욘 4장은 모두 열린 결말로 끝납니다. 아버지의 초청에 큰아들이 어떻게 응답했는지, 여호와의 설득에 요나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 응답을 우리가 기록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응답이 곧 그 답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의 천국잔치로의 초청에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완전히 선하시고 항상 옳으신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천국잔치를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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