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5:1-11/기독교인이 되는 순간
240707
1. 시골의사의 회심기 A country doctor’s conversion story
최근 온라인에서 시골의사TV라는 채널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시골에서 의사생활을 하는 이가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는 채널인데요, 이 의사가 교회에 다닌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묻더랍니다. 의사면 나름 과학자인데 과학과 상관없어 보이는 종교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교회를 다니다가 스무 살이 넘어서는 교회에 발길을 끊었는데 한 번은 친한 과선배가 억지로 자기교회 부흥회를 가자고 해서 마지못해 따라갔답니다. 조그만 교회에서 이름도 잘 모르는 목사님이 늘 듣던 평범한 설교를 하는데 설교 중에 갑자기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이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죄인도 그냥 죄인이 아니고 악인 중 악인이고 죄인 중 괴수였습니다. 혼자서 흑흑대며 우니까 그 선배가 괜찮냐며 이상하게 쳐다보더랍니다. 그 날 이후 성경을 읽는데 예전에는 그저 전설처럼 들리던 이야기가 모두 진리로 믿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한 경험은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의로우심과 성경의 진리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대개 예배와 기도, 묵상과 성경읽기 중 서서이 일어나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완고한 회의론자 혹은 불가지론자들이 이런 경험을 통해 기독교인으로 변하기에 대단히 신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흔히 회심 혹은 거듭남이라고 부르는 이런 영적 경험은 도대체 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일까요?
2. 성령님으로 인한 각성 Awakening by the Holy Spirit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이런 경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요 16:7) … (내가) 가면 내가 그(성령)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사람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는 유일한 분은 성령님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에 대해 깨우치시기도 합니다. 죄의 결과로 피할 수 없는 심판에 대해 경고하시는 이도 성령님이십니다. 이 죄와 의와 심판을 모두 깨달으면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양가감정상태에 빠집니다. 첫째는 죄로 인한 수치와 심판으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둘째는 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으로 인한 안도감과 감격입니다. 이 두 가지 각성이 동시에 일어날 때 사람의 마음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던 무지와 교만의 여리고가 무너집니다. 그 결과로 쏟아져나오는 것이 눈물입니다.
시골의사가 회심한 그 순간은 바로 성령님이 임하신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게 된 순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181cm인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서장훈씨 앞에 서는 순간 자신이 오히려 작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자신이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다가 완전히 의로우신 분 앞에 서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추한 죄인인 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자신이 괜찮은 사람인 줄 알고 있다면 성령님 앞에 서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지와 교만의 성벽에 갇혀 죄와 심판의 운명을 모른 채 우물안 개구리처럼 자신만의 왕국에서 살아가는 벌거벗은 임금님일 뿐입니다. 참된 회심과 거듭남의 삶은 성령님 앞에 서는 이 은혜의 경험없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3. 베드로의 각성 Peter’s awakening
그 사례 중 하나가 사도 베드로의 회심입니다. 오늘 본문은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이 베드로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배에 앉아서 육지에 모인 무리를 가르치시던 예수님이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반신반의하며 순종하였다가 엄청난 물고기를 잡은 베드로는 예기치 않은 반응을 보입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았으면 놀라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할텐데 그는 오히려 두려움과 죄의식을 느낍니다. 8절입니다.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예수님이 뭐라 하셨나요? 누가 베드로에게 무슨 죄를 지었다고 꾸짖었습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자신이 죄인이라고 자백을 합니까? 이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신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호소합니까? 이 순간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이해가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이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무엇이라 이해했습니까?
(눅 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5절을 보면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저 예수님은 지혜로운 말씀을 들려주는 훌륭한 랍비, 지혜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밤새 수고하고도 잡지 못 한 물고기를 자신들의 경험과 정반대로 얕은 물가가 아닌 깊은 물속에 물고기가 있다는 말씀으로 두 척의 배가 감당하지 못 할 물고기를 잡게 만드신 분의 능력을 순간 깨달으면서 이 분이 지혜의 스승을 넘어선 신적 영광을 가진 분이라는 이해를 얻었습니다. 다시 8절을 보면 그래서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릅니다.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4. 진리로부터 도망치는 이들 Those who run away from the truth
베드로만 이런 경험을 한 것이 아닙니다. 동료들 역시 크게 놀랍니다.
(눅 5: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눅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그들은 예수님의 영광과 능력에 놀라고 자신들의 죄인됨에 두려웠습니다. 이 두려움을 대하는 사람들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많은 이들이 도피를 선택합니다. 진리를 마주 하고 느끼는 두려움을 피하여 도망칩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로마총독 벨릭스가 그러했습니다.
(행 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그는 진리가 주는 두려움과 불편함으로부터 도망쳐 풍요와 안락함의 동굴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사냥꾼이 두렵다고 구멍에 머리를 들이밀고 보지 않으면 피할 수 있으리라 믿는 어리석은 꿩의 생각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피한다고 죄가 사라지지 않고 모른 척 한다고 심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험이 다가오는데 시험공부 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시험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택하는 방법입니다. 교회를 안 가기를 선택합니다. 말씀을 안 듣기를 선택합니다. 교회를 안 갈 수 없고 말씀을 안 들을 수 없다면 달콤한 말씀을 주는 교회를 선택합니다. 혹은 불편한 말씀은 걸러서 듣고 달콤한 말씀만 듣기로 선택합니다. 심판을 피해 숨지만 사실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멸망의 길입니다.
5. 진리 앞에 무릎 꿇기 Kneel before the truth
베드로와 제자들 역시 죄의식과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어떻게든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떠나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그 두려움을 피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다시 8절을 보십시오.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그들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불렀습니다. 주님께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떠나주시는 은총을 구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러나 그 두려움을 피하는 구원의 길이 주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길임을 몰랐습니다. 물론 그의 무지함을 예수님은 꾸짖지 않으십니다. 그가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은혜를 구한 것만으로도 주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죄와 심판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두려워하며 떠나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가 그 분의 의로 해방을 얻는 것입니다.
(눅 5:10) …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오히려 당신의 제자가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범지대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그 동네의 모든 아버지, 삼촌들은 경찰을 무서워합니다. 도망다닙니다. 아이에게도 경찰만 보면 도망다니라고 가르칩니다. 그 아이가 인생을 평안하게 사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 동네 어른들처럼 범죄를 저지르면서 경찰을 피해 평생 도망다니는 삶입니까? 아니면 열심히 공부해서 경찰대학에 가서 더 이상 범죄로 생계를 이어갈 필요없이 뛰어나고 풍요로운 경찰간부로 살아가는 삶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망다니지 말고 당신에게로 와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죄와 심판의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로의 부름은 성도에게 의무나 책임이 아니라 놀라운 은총과 해방의 길입니다. 스스로의 지혜로 물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인생은 밤새 고생해도 아무 성과가 없는 허무한 길이지만 사람을 낚는 제자의 인생은 말씀대로 그물을 던지기만 하면 감당하지 못 할 만큼 성과를 거두는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6. 우리를 주목하시는 예수님 Jesus pays attention to us
성령님의 은총으로 자신의 죄와 다가올 심판을 깨닫고 예수님의 의와 은총을 깨달은 베드로와 동료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전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눅 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배와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제자의 길은 그러므로 성령님으로 인한 깨달음을 얻고 주님 앞에 엎드려 그 은총을 입을 때에 일어나는 기적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 이전에도 이미 자신의 결단으로 주님을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4장을 보면 그는 예수님의 갈릴리사역의 베이스캠프로 자신의 집을 제공하여 예수님을 모셨고 그의 장모를 고침받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베드로의 집에 몰려들어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벌어진 날 아침 예수님이 무리에게 설교하실 때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고 그물을 씻으며 예수님의 사역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나 부분적으로만 따르는 제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침에 밤새 헛수고를 한 피로와 걱정에 사로잡혀 그물 씻고 있는 그를 보셨습니다.
(눅 5: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주목하여)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주목하여 보시고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고단함, 죄와 심판의 두려움에서 해방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서야 베드로는 고단하고 두려운 삶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의 길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주목하여 보십니다. 여러분에게 자유와 해방, 생명과 복의 삶을 선물하기를 원하셔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명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성령님을 보내셔서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주저하고 망설이는 자리에서 벗어나 전적인 순종과 제자의 길로 부르십니다. 그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은총을 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낚는 어부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