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35-39/기독교인으로 부르신 목적
John 1:35-39/Purpose of being called as a Christian
240721 주일설교
1. 구원에의 오해 misunderstanding about salvation
대학시절 섬기던 기독학생회에서 4영리를 배워서 노방전도를 나갔습니다. 벤치에 앉은 한 학생을 만나 열심히 사영리를 전했는데 그 자리에서 순순히 듣고 믿는다 하고 영접까지 하는 것입니다. 기뻐서 손을 잡고 기도하고 가까운 교회에 출석하도록 격려하고 헤어졌습니다. 한참 후에 캠퍼스에서 그 학생을 또 만났는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이 분명 믿었으니 이대로 계속 교회를 안 다녀도 이미 구원받은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기 전에 회개하고 교회를 다니게 만들 것인가? 혹은 교회를 계속 안 다니는 것을 보면 그 때 믿은 것이 진실한 것이 아니었다고 할 것인가? 그 후 목회자가 되어 보니 이런 예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이 뉴저지에도 한 때 교회에 출석했고 심지어 뜨겁게 섬기기까지 하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난 가나안교인 소위 안나가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이들의 구원은 어떻게 될까요?
첫째 생각, 한 때 믿었으니 교회를 안 다녀도 이미 구원받은 것이다! 이는 이단 구원파의 논리로 이대로라면 우리도 교회를 굳이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구원은 결정된 것 아닙니까! 둘째 생각, 그가 구원받은 성도이니 하나님이 어떻게든 그를 교회에 다니게 만들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지만 신앙의 열심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문제가 따라오고, 실제로 현실을 보면 그대로 안 다니다가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갈등을 해결하고자 셋째 생각을 합니다. 교회에 안 다니는 것을 보면 ‘한 때 믿었던 것처럼 보였던 그의 믿음은 사실은 진짜가 아니었다’는 해석입니다. 성령님에 의해 성도의 견인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선택받은 백성이 아니었고 믿는다한 고백도 진짜가 아니었다는 생각입니다. 어느 것이 맞을까요? 세 가지 생각 다 구원에 대한 오해입니다. 이런 오해를 하는 이유는 믿음과 구원을 일회적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선포는 이를 법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이는 구원이란 거대한 실재의 한 측면을 분명히 담고 있지만 모두 담고 있지는 못 합니다. 법정의 판결은 일회적 사건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지속적인 관계에 가깝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쓰신 표현입니다.
2. 믿음과 따름과 동거 Faith, following, and living together
누가복음, 마태복음에 이어 제자를 부르시는 같은 장면을 오늘은 요한복음으로 살펴봅니다. 이 대목을 잘 이해하면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큰 도움을 얻습니다. 공관복음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실 때 쓰신 표현은 ‘나를 따라오라’입니다.
(막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다른 이들에게는 믿으라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은 똑같이 제자를 부르시는데 ‘거하라’는 표현을 씁니다.
(요 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제자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여기서 쓰인 거하다는 헬라어단어 메노는 ‘떠나지 않고 머무르다’는 뜻과 함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할 때 쓰입니다. 즉 예수님이 당신 안에 거하라,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거하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항상 머무르며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처럼 한결같이 지내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럼 믿음과 따름과 거함은 서로 다른 것일까요? 아닙니다. 모두 같은 관계를 묘사하는 서로 다른 표현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신뢰합니다. 그렇기에 스승을 따릅니다. 스승을 따름은 스승과 동거함과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 곧 신뢰는 하는데 따르지는 않는다, 따르기는 하는데 신뢰하지 않는다, 함께 동거하는데 신뢰하지는 않는다, 모두 온전한 관계가 아닙니다. 온전한 관계에서는 신뢰하기에 따르고 동거합니다.
여기서 믿음만 따로 떼어내어 구원의 조건으로 이해하는데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혹은 따름이나 동거는 믿음과 달리 행위이니 구원과 상관없다고 여기거나, 믿음으로 구원은 일단 얻고 성화에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태라는 식으로 오해하는데서 문제가 커집니다. 구원은 믿기로 결정하는 사건에서 시작하여 따르고 동거하는 지속적 상태를 포함하는, 회복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전체를 의미합니다. 이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성경은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합니다.
3. 회복된 관계로서의 구원 Salvation as a restored relationship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입니다. 또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있습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성도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상태를 가지와 포도나무의 관계로 비유했습니다. 이 관계의 특징은 지속성입니다.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하는 것은 관계가 아닙니다. 그건 죽은 가지입니다.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떨어져 있는 것, 관계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비유로 왕과 백성의 관계가 있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가 있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있습니다. 더욱 생생한 비유로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 결혼의 비유는 구원의 실재를 아주 생생하게 묘사해줍니다.
(사 62:5) …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결혼식이 결혼의 전부입니까? 결혼식은 몹시 중요하지만 결혼의 전부가 결코 아닙니다. 결혼의 시작이지요. 우리가 믿기로 결정하고 신앙고백하는 순간은 결혼서약과 같습니다. 결혼서약은 약속이지 결혼 그 자체가 아닙니다. 어떤 이가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집을 나가서 다른 이와 삽니다. 이들은 결혼한 것입니까? 제대로 된 결혼이라 할 수 없습니다. 결혼은 서약으로부터 시작되어 서약대로 배우자에 대한 헌신으로 지속되고 마지막까지 충성함으로 완성되는 것처럼 구원 역시 신랑되신 주님만 사랑하기로 신앙고백함으로 시작되어 주님 안에 거함으로 지속되고 마지막까지 충성함으로 완성되는 관계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도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관계로 초청받아 믿음으로 순종하여 그 분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면은 그러므로 행복한 부부생활을 위한 지침과 매우 닮아있습니다. 사랑으로 연합한 부부에게 서로 진실하고 성실하고 충성하고 섬길 것을 권합니다. 이 때 몇 퍼센트 이상으로 진실해야 부부이고 몇 퍼센트 이하로 충성하면 부부가 아니라고 계량화할 수 없습니다. 이 진실과 성실과 충성은 모두 각자의 기질과 능력과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른 것이고 보편적인 계량화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리를 어느 정도 맛있게 해야 계속 아내로 인정할 수 있습니까? 연봉을 어느 정도 이상 가져와야 계속 남편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까? 지극히 낮은 수입을 버는 남편과 맛난 요리를 할 재간이 없는 부부임에 틀림없는 장애인 부부가 평생 진실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반면 재벌이나 다름 없는 남편과 최고의 미녀로 인기절정인 할리우드스타부부가 1년도 못 되어 가정이 깨지는 것만 보아도 눈에 보이는 것으로 관계의 참됨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구원이란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 속으로 들어와 그 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관계이자 삶입니다. 믿음이라 여기는 동의하는 생각, 사랑하는 열정, 순종하는 헌신이 모두 이 관계와 삶 속에 들어있습니다. 이 삶과 관계를 사도 요한이나 사도 바울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거하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4. 그리스도와 동거하는 교회 Church Living Together with Christ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그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이가 참으로 믿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아십니다. 문제는 영을 완전히 꿰뚫어 볼 수 없는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지요. 그 답은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참믿음의 공동체로서 눈에 보이는 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엡 1:22) …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에베소서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며, 고린도전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모임 이상의 것입니다. 성경과 복음과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세워진 공동체로서 보이지 않으시는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친히 다스리시는 몸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습니다. 마치 출애굽 후 광야에서 성막 위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머물렀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쏟아부어집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고 고백되고 순종되어서 멸망할 죄인을 천국백성으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교회에서는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따르고 동거하고 천국을 누리는 삶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동거하는 이는 교회에 거합니다.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물론 가시적으로 교회 안에 몸담고 있지만 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 한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시적으로 교회를 떠나 있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한 이는 없습니다. 나무에서 분리된 가지가 살 수 없듯이, 목자를 떠난 양이 생존할 수 없듯이 몸된 교회를 떠난 이가 그리스도와 연합을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는 이런 영광과 은혜와 영생이 있기에 예수님은 교회에 천국열쇠를 주었다 하시고 땅에서 즉 교회에서 문을 잠그면 천국문이 잠기고 교회가 문을 열면 천국문이 열린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주신 놀라운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삶, 영생의 삶은 교회를 떠나 지속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왜 제자로,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습니까? 교회를 통해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신부가 되어 천국을 함께 살며 누리시려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부르신 신랑, 그리스도와 동거하고 있습니까? 주님과의 동거가 더욱 가깝고 뜨겁고 친밀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