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8 새로운교회 주일예배 “신실하신 신랑”(호세아 2:14-20) – 김도완 목사

7월 30, 2024

Series: 주일예배

Book: 호세아

호 2:14-20/신실하신 신랑

Hosea 2:14-20/Faithful Bridegroom

240728 주일설교

1. 위장결혼 당한 

LA에서 청년부사역을 할 때 안타까운 일을 보았습니다. 간혹 비자기간이 끝나도록 신분해결을 못 한 젊은이가 돈이나 이런저런 대가를 약속하고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얻을 때까지 시민권자와 위장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결혼생활에는 진짜결혼에 있는 사랑과 기쁨, 평안과 행복이 있을 리 없습니다. 대신 진짜결혼에는 없는 계산과 불편, 긴장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어디까지 해줘야 신분을 해결할 때까지 저 사람이 결혼을 무효로 하지 않고 참아 줄 것인가, 이런 것까지 내가 해줘야 하나, 생활비는 반씩 부담키로 했는데 차수리비도 반반 해야 하나, 오늘은 몇 시까지 집에 들어가야 하나, 꼭 들어가야 하나… 왜 위장결혼이 진짜결혼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까? 진짜결혼은 사랑이 동기요, 결혼자체가 목적입니다. 그와 함께 하는 것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지만 위장결혼은 결혼은 신분해결이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사랑의 동기는 당연히 없습니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위장결혼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경우는 무엇일까요? 위장결혼을 원한 여자와 진짜결혼을 원한 남자가 결혼한 것입니다. 사랑도 없고 다른 목적을 가진 여자와 결혼한 사랑과 가정을 진정으로 원한 남자는 얼마나 불행하고 고통스러웠을까요? 이 남자를 속인 여자는 얼마나 못 됐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녀를 탓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종 우리네 신앙생활이 그녀의 위장결혼과 닮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집니다. ‘어느 정도까지 헌신하면 내 믿음이 진짜로 인정받을 수 있나? 어느 정도 봉사하면 구원의 백성이 되거나 그 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까? 주일성수만 하면 되나, 수요기도회도 가야 하나? 주정헌금만 하면 되나, 십일조도 해야 하나? 봉사만 하면 되나, 선교도 다녀와야 하나? 아프리카의 아이 후원은 한 명만 하면 되나, 내 수입이면 열 명은 해야 하는 건가?’ 왜 이런 계산과 의문이 생길까요? 우리의 신앙의 목적이 죽어서 지옥 대신 천국가는 시민권일 뿐 신랑 예수님과의 결혼생활자체가 아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위장결혼과 많이 다릅니까? 이런 결혼을 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요? 이 배신과 고통을 겪으신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답을 얻기 위해 로마서의 이 유명한 말씀으로부터 시작해 보십시다.

2.  분의 의로우심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영어로는 rightoeusness로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쉬네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 구원에 법정적 의미와 관계적 의미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의로움도 역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법정적 의미로 죄없음, 깨끗함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의 곧 모든 죄를 씻어 죄없는 깨끗한 상태가 복음에 나타나 죄인의 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관계적 의미로 ‘관계에 부과된 의무를 충실하게 이룸’이란 뜻입니다. 사장이 직원과 맺은 계약, 임금과 근무환경조성 등의 의무를 다 할 때 그 사장은 의롭습니다. 직원이 사장과 맺은 계약대로 충실하게 노동을 제공할 때 그 직원은 의롭습니다. 즉 하나님이 당신백성과 맺은 계약의 의무를 다 할 때 하나님은 의롭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곧 하나님이 계약, 약속에 신실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무슨 계약을 맺으셨습니까?

(신 30: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율법을 지키는 의무를 다 하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어 복주는 의무를 다 하리라.’ 이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맺은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결혼서약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와 함께 살자. 나는 신랑의 의무를 다 하리라, 너는 신부의 의무를 다 하라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위장결혼한 신부였던 것입니다. 신랑이신 하나님과 그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복에만 관심이 있어서 그 복을 더 얻을 수 있다면 다른 남자 곧 우상도 쫓아다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결혼을 원했으나 배신당한 신랑 하나님은 상처받고 고통받았습니다. 그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답이 바로 오늘 읽은 호세아서입니다.

3. 신실하신 신랑

선지자 호세아는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음란한 여자 고멜과 결혼하라는 믿기 힘든 명령을 받습니다. 이 명령은 호세아의 삶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상처와 고통 그리고 신실하심을 비유로 보여주기 위한 실물예화였습니다. 호세아는 극진히 고멜을 사랑했으나 음란하고 무지한 그녀는 악한 남자들의 꾐에 빠져 도망가기 일쑤였습니다. 고대근동에서 이런 부정한 여자는 정말 운좋은 남편을 만났다면 그저 버림을 당하는 것으로 끝났겠지만 어지간한 남편이라면 동네사람들 앞에 끌려나와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매번 호세아에게 명하시기를, 악한 남자에게 이용당하고 학대받는 고멜을 정결한 여자를 사올 때 주는 돈보다 더 큰 돈을 주고 사오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큰 고통을 감내하며 부정하고 음란하고 어리석어 우상을 숭배하고 침략당하고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번번이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호 2:14) “그러므로 내가 저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호 2: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어리석은 그녀를 타이르고 학대받은 그녀를 위로하고 정결한 여인의 지참금을 주듯 기름진 포도원과 풍요로운 골짜기땅을 주고 애굽에서 해방하여 가나안땅에 들이던 때 신혼시절처럼 그녀를 다시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정하고 더럽고 추한 죄인에게 왜 이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에게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호 2: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호 2: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호 2: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위장결혼을 한 여자와 같은 죄인을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너무나 사랑하셔서 죄인의 입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내 남편이라고 고백하는 그 날이 올 때까지 당신의 약속을 지키고 당신의 의무를 다하고 결코 약속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신실한 남편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끝없이 배신하고 도망하는 그 음란한 신부를 영원히 되사오시기 위해, 그 무지하고 어리석은 신부를 깨우쳐 마침내 그 입에서 여호와만이 나의 참신랑이라고 고백케 하시려고 하나님은 무엇까지 하셨습니까? 마침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그 핏값으로 죄값을 모두 치러 죄인을 마귀의 손에서 완전히 사서 당신의 품에 안으셨습니다. 마침내 성령님을 보내어 죄와 의와 심판과 구원을 알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깨달아 그 앞에 무릎꿇고 영원히 하나님만을 신랑이라 고백하며 경배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이르도록 결코 변하지 않는 사랑,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 주리라’는 약속을 결코 어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입니다.

4. 사랑의 부름

바로 이 신실하심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구원은 어떤 인간의 신실치 못 한 의로 아닌 바로 이 하나님의 신실한 의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래서 하나님은 보내실 메시야의 이름에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리라는 다짐을 담으셨습니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그 약속의 성취라고 다시 한번 그 이름을 증거로 주셨습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의 이 신실하심으로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이 신실하심으로 우리는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짐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그 백성과 그 자녀와 그 거룩한 신부로 영원히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 신실하심을 깨달은 자들은 자연히 이처럼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은 죄인을 돌이키려 징계하시되 영원히 하지 못 하십니다. 치유하시고 고치십니다.

(호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또한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서 일으키실 것입니다.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폭포수처럼 쏟아부어진 신랑 여호와의 신실한 사랑을 깨달은 죄인들은 그 분께 돌아가 모든 헛된 바람과 욕심을 내려놓고 오직 그 분을 더 알고 더 사랑하고 더 섬기고자 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부터 진짜결혼생활이 시작됩니다. 진짜 구원의 삶, 영생이 시작됩니다. 이 삶에는 어디까지 섬기면 벌받지 않을까, 어디까지 드려야 칭찬받는 것일까, 어디까지 해야 구원을 보장받을까 따위의 계산도, 긴장도, 두려움도 더 이상 없습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오직 한없는 사랑과 긍휼과 인내와 신실하심으로 영원히 죄인을 구원하신 신랑되신 하나님을 향한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사랑과 감사와 찬양만 있을 뿐입니다. 정결하고 거룩하고 신실하신 주님께서 도대체 이 추하고 음란하고 무지한 죄인을 왜 사랑하십니까? 도대체 왜 이 죄인을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이토록 끈질기게 사랑하고 용서하고 위로하십니까? 왜 존귀하신 아들 예수님을 내어주시기까지 저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왜입니까, 왜? 도대체 내가 어떻게 사랑하고 섬기고 경배하면 이 감사를 다 표현할 수 있을지요! 그제서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음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할렐루야! 신실하신 신랑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 영원히 그 분만을 찬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