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4 새로운교회 주일예배 “생명을 낳는 생명”(요한복음 1:40-51) – 김도완 목사

8월 3, 2024

Series: 주일예배

Book: 요한복음

요 1:40-51/생명을 낳는 생명

John 1:40-51/Life that gives birth to life

240804 주일설교 구원4

1. 니콜라스 윈턴 

<영상> 영상에서 보신 것처럼 니콜라스 윈턴경은 2차 대전 전 나찌의 만행에 수용소의 이슬이 되었을 어린 아이 669명을 자신의 재산을 써서 위험을 무릎 쓰며 구해내었습니다. 여러분이 그의 입장에 놓인다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소중한 재산을 들여 위험을 무릎쓰며 그들을 구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바보같이 일면식도 없는 남의 나라 아이들을 위해 왜 귀한 내 돈을 쓰고 위험을 무릎쓸까’ 하는 생각으로 외면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의 답은 우리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소속을 보여주는 다른 질문입니다. 니콜라스 윈턴은 영웅입니까, 바보입니까? 그를 영웅이라 생각하신다면, 여러분도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명의 생명만 구해도 칭송받을 만 한데, 자신을 희생하여 그 생명을 무려 669명이나 구해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더 많은 생명을 구하지 못 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갖고 자신의 선행을 세상에 드러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은 두 번째 목적입니다.

2. 부르신 목적

지난 주까지 우리는 주님이 죄인인 우리를 왜 당신의 자녀, 성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는지 그 목적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당신을 믿고 따르고 동거하는 거룩한 신부로 삼아 함께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제자를 부르실 때 하신 말씀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막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부르심의 두 번째 목적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그저 우리와 행복하게 사시면 되지, 우리가 생명을 구하는 영웅이 되기를 바랍십니까? 부부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닮아가는데 우리의 신랑이신 주님은 이 생명 구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신 분이요, 생명은 주님이 주시는 최고의 복이자 선물입니다. 창세기를 보십시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인류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그 생명을 퍼뜨리고 그 생명이 충만케 하시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반면 이 생명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케 하려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죄와 악으로 인류의 생명을 빼앗은 마귀입니다.

(요 10:10) 도둑(마귀)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마귀가 죄와 악으로 인류의 생명을 빼앗았기에 주님은 그 생명을 빼앗긴 인류를 구원하여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도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기에 그 분의 신부가 되어 그 분을 사랑하며 동거하는 성도는 자연스럽게 그 분이 좋아하시는 일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의 일이요, 전도와 선교로 잃은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는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신부가 맺는 자연스러운 열매입니다. 부부가 비슷한 이유는 살면서 서로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하나님처럼 사람을 구하는 일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결혼생활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면 그 열매로 자녀가 생깁니다. 자녀를 가져야지, 작정하여 얻는 이도 있지만 그저 배우자를 사랑했을 뿐인데 자녀를 가지는 이도 있습니다. 사랑은 생명을 낳습니다. 부부가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거기에 자녀가 생기면 더 행복합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부부가 되는 것도 신비이지만 거기서 생명이 나는 것은 더 큰 신비입니다. 부부에게 자녀는 놀라운 특권이자 선물입니다. 오늘날 일부에서 자녀를 짐으로 여기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정말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주는 기쁨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에다 큰 삶의 의미를 줍니다.

저와 아내가 이 세상에 와서 가장 기여한 바가 무엇일까요? 아인슈타인 같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습니까? 워렌 버핏처럼 엄청난 부를 일구었습니까? 이순신처럼 나라를 구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하나도 부족하지 않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3개의 거대한 우주를 이 세상에 창조하고 간 것입니다. 세 명의 아이는 하나하나가 광대한 우주입니다. 우리는 지식과 상상과 믿음을 통해 거대한 우주를 창조하여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 안에서 온갖 일이 다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온갖 법칙이 작용하고 사랑과 평화와 정의의 나라가 서기도 합니다. 성령님이 너희를 다스리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반면 마귀에게 침공당한 우주는 죄와 악이 다스리고 미움과 전쟁과 불의의 나라가 들어서기도 합니다. 아무튼 제가 세상에 남긴 가장 큰 기여는 이 우주를 담은 생명을 셋이나 남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는 우주도 여러분의 부모님이 이 세상에 남긴 선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4. 생명을 구하는 제자들

이렇게 주님과 동거한 제자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구하는 어부가 됩니다. 그 두 가지 예를 오늘 본문이 보여줍니다. 먼저 안드레는 자신의 형제 시몬 베드로를 만나 전도합니다.

(요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이 대목은 공관복음에서 베드로가 풀타임제자로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하기 전 첫 만남을 묘사한 장면일 것입니다. 안드레는 자신의 형제가 자신보다 더 위대한 사도로 초대교회를 이끌게 되리라 꿈에도 생각을 못 했을 것입니다. 사랑이 생명을 낳듯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동거하고 곧 사랑하자 전도로 생명을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얼떨떨해 보이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새신자가 우리보다 더 귀하게 쓰임받게 될 줄 누가 알겠습니까.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전도합니다. 시몬과 달리 나다나엘은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요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갈릴리에서도 시골마을인 나사렛에서 어떻게 메시야가 날 수 있어? 나다나엘의 편견은 복음을 전할 때 종종 부딪히는 저항입니다. 우리가 왜 유대인 종교를 믿어야 해? 예수가 진짜 하나님이란 말을 믿을 수 있나?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 살아나? 그가 죽은 것이 내 죄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러자 빌립이 무엇이라 답합니까? 와서 보라, 네가 직접 와서 보면 알게 될 거야! 여기에는 빌립의 자신감이 묻어나옵니다. ‘이 분이 얼마나 놀라운 분인지, 이 분과 동거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삶인지 직접 와서 경험해 보면 그런 소리 못 할 걸…’ 이런 뜻입니다.

전도의 비밀이 여기 있습니다. 전도는 주님과 동거하는 삶을 경험하고 세상이 주지 못 하는 기쁨을 누린 이들이 맺는 열매입니다. 친구야, 이 식당 진짜 맛있어, 직원들도 정말 친절해, 너도 꼭 먹어봐야 해. 이것이 전도입니다. 맛도 별로고 직원들은 무례한데 사장이 도와달라고 사정사정하니까 한 번 가서 먹어볼래? 한 번은 두 번 이상 못 갑니다. 빌립의 말대로 나다나엘은 직접 주님을 만나보고 나서야 그의 편견이 깨어져 신앙고백에 이릅니다.

(요 1: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최근 한 교우와 대화를 하는데 새로운교회에 온 후 자꾸 모르던 사람의 전화번호가 자기 셀폰에 쌓인다는 것입니다. 예전같으면 무심코 지나치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교회가 얼마나 행복한 지를 이야기하다 보니 초청하고 전화번호를 받아서 그의 전화번호가 자기 폰에 남는 것입니다. 그들을 초청하면 어떤 이는 오고 어떤 이는 오지 않지만 어느 새 자신이 전도왕이 되어 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주님과 동거하는 성도, 주님과 동거하는 교회는 그 곳에서 천국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신랑 주님을 닮아 자신도 모르게 잃은 영혼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쁨을 누리는 새로운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물론 전도는 나다나엘처럼 거절하는 이들을 만납니다. 안드레와 빌립이 초청한 이가 베드로와 나다나엘 뿐이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초청받고 거절한 많은 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편견과 거절에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도는 원래 많은 거절과 외면을 겪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길가밭, 돌짝밭 그리고 가시밭에서 말씀의 씨앗은 손실된다 하셨지만 좋은밭에서 거두는 소출이 모든 손실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하셨습니다. 한 명만 제대로 전도해도 천하보다 귀한 우주를 구원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가 베드로가 되어 얼마나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기적이 일어날 지 모릅니다.

5. 천국의 토크쑈

도미니카단기선교팀이 시간과 돈을 들여 도미니카땅을 방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몇 명이나 전도하겠습니까? 씨를 뿌리는 것까지 우리의 몫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주님이십니다. 라틴아메리카사람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우리가 빚진 게 있나요? 우리는 주님께 사랑의 빚을 졌지요. 주님은 그 빚을 죄와 악의 풍랑에 떠밀려 길을 잃은 이들에게 갚으라 하십니다. 주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기에 우리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지난 세기 미국과 영국선교사들에게 큰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적 규모의 기독교인을 가진 나라가 되고, 세계최빈국에서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선진국으로 도약한 데에 큰 빚을 졌기에 우리도 그 사랑의 빚,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교팀으로 떠날 여건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하나요? 지금 이 자리에서도 전도하면 됩니다. 우리 교회는 치유하는 교회입니다. 이 뉴저지 땅에 상처받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상처받고 실망하고 외면당해 한 때 다니던 교회를 떠난 이들 가나안교인이 교회 다니는 사람보다 더 많습니다. 바로 그런 이들을 안드레처럼, 빌립처럼 초청하는 것입니다. 저의 주변에는 없던데요? 없는 것이 아니라 못 본 것입니다. 여러분 사는 동네에 베이글집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시지요? 베이글비지니스를 해야겠다 하고 생각하며 운전해 보십시오. 곳곳에 베이글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면 보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닮고 주님을 닮으면 상처받고 방황하는 영혼이 보입니다. 그들을 발견할 때마다 초청하면 나다나엘처럼 거부감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뒷일은 주님께 맡기고 초청하면 됩니다. 베드로처럼 나중된 자였지만 먼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결혼생활을 얼마나 잘 했는지를 확인할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나라에서 토크쑈에 참석할 그 때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이 성도로 인해 생명을 구원한 이들은 일어나라고 하실 때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고전 3: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반면 니콜라스 윈턴경처럼 수많은 사람이 일어나 바로 이 사람의 전도와 사랑으로 생명을 구했노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영광스러우며 얼마나 행복할까요!

(단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으로 상주실 것입니다.

(계 2:10)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주님이 친히 씌워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뉴저지 새로운교회 https://saerou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