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9-11/두 가지 기쁜 소식
240908 주일설교
1. 우편강도를 부러워하다
예전에 한 교우께서 장난반, 진심반으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우편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 믿어서 천국가는 사람 아닙니까? 평생 제 마음대로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으면 꿩 먹고 알 먹고가 아니냐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던져 보신 적이 없는지요? 이런 질문에는 ‘예수믿는 것은 손해보는 힘든 삶’이고. ‘제 마음대로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란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 시기가 생깁니다.
(시 73: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저 인간은 제 멋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사는데 왜 벌도 안 받고 잘 되고, 나는 내 맘대로 살지도 못 하고 손해보며 사는데 왜 상도 못 받고 요 모양 요 꼴인가?’ 이런 생각때문에 ‘예수 믿느라 고난 당하고 천국에서 보상받는 것과 제 멋대로 즐기고 지옥에서 벌 받는 것 중 무엇이 나은가’하는 질문까지 나옵니다. 이런 질문은 모두 전제부터 틀렸습니다. 예수믿는 것이 희생하고 손해보는 삶도 아니고 예수믿지 않고 즐기는 것이 행복한 삶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오해를 하는 것일까요?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성도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2. 악티움의 승리와 황제로의 등극 사이
성공회 주교이자 신학자인 톰 라이트는 ‘이것이 복음이다’에서 성도의 삶을 기원전 1세기 로마인의 그것으로 비유합니다. 누가복음에 가이사 아구스도라고 묘사되는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황제가 되기 전 로마의 패권을 놓고 안토니우스와 경쟁하였습니다.
(눅 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로마의 원로원과 백성 모두 옥타비아누스파와 안토니우스파로 나뉘었습니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지금의 그리스 악티움 앞바다에서 두 군대가 격돌했는데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고 안토니우스는 연인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로 도망쳤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전령을 보내 이르기를, 곧 자신이 로마에 입성할 터이니 모든 안토니우스파는 지금이라도 돌이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자비를 베풀겠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의 안토니우스파는 절망과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반면 옥타비아누스파는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찼습니다. 이 때 옥타비아누스파는 두 개의 기쁜 소식 사이에서 살았습니다. 첫 번째 기쁜 소식은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다는 과거의 기쁜 소식이요, 두 번째 기쁜 소식은 그가 로마로 와서 황제로 등극하여 모든 내전을 끝내고 평화의 제국을 열리라는 미래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대대로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존엄한 자 황제가 되었습니다.
3. 과거의 좋은 소식
성도는 이 시기의 옥타비아누스파처럼 두 개의 좋은 소식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두 개의 좋은 소식이 바로 우리가 믿는 복음 Good News 좋은 소식입니다. 먼저 첫 번째 소식, 과거의 좋은 소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묶고 있던 죄와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원수마귀를 물리쳐 승리하셨고 승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이 소식을 믿는 이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셔서 결정적인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그 첫 번째 변화는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음입니다.
(요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군대에 있는 젊은이는 군법의 구속을 받아 영내를 떠나는 순간 탈영범이 되어 도망자가 됩니다. 하지만 군복무가 끝나 민간인 신분이 되는 순간 그는 마음대로 영내를 떠나 어디든 자유로이 갈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죄와 사망의 법의 구속을 다지 않아 더 이상 심판 아래 놓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부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묶고 있던 죄와 사망의 법에 여전히 구속되어 있고 심판의 운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성령님이 일으키시는 두 번째 변화는 영생을 시작함입니다. 이 영적 생명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생명을 말합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성령님이 일으키시는 세 번째 변화는 천국에 들어감입니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천 년 전 골고다언덕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승리하셨다는 과거의 좋은 소식은 그 소식을 믿는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이 손해보고 희생한다는 생각은 성도가 얻은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알지 못 하는 이들의 착각입니다.
4. 미래의 좋은 소식
한편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두 번째 좋은 소식, 미래의 좋은 소식을 통해서도 성도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 소식은 이미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이 장차 이 땅에 왕으로 다시 오셔서 하나님나라를 완성하시고 모든 죄와 악을 영원히 멸하시고 사랑과 공의로 통치하시리라는 소식입니다. 이 미래의 좋은 소식이 성취되는 순간이 머지않아 올 것입니다.
(히 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렇기에 오늘 의인이 받는 고난 역시 장차 받을 영광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것입니다.
(고후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악인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결코 오래 가지 않을 것입니다.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이 짧은 고난의 삶, 짧은 쾌락의 삶이 지나가면 미래의 좋은 소식이 성취되는 날이 옵니다. 그 날에 이루어질 놀라운 변화는 오늘의 모든 삶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그 날에 일어날 변화를 들어보십시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빛나게 변하는 의인의 삶
오늘 성도가 흘리는 눈물을 어떻게 다 닦아주시며 사망과 애통과 통곡과 질병을 이미 다 겪었는데 어떻게 다 지나가게 하실까요? 그 원리를 C.S.루이스는 그의 책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천국시민 조지의 말을 빌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보게,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이 기쁨의 골짜기(천국)뿐 아니라 지상에서 살았던 모든 과거도 천국이 되는 거라네. 저주받은 자들에게는 절망의 회색마을(지옥)뿐 아니라 지상에서 살았던 삶 전부가 지옥이 되는 것이고.”
즉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능력은 지나온 과거까지 모두 소급하여 성도의 삶을 천국으로, 악인의 삶을 지옥으로 그 삶의 질이 변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계속해서 의인의 삶이 이렇게 변할 것이라 설명합니다.
“인간들이 오해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라네. 그들은 잠시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떤 축복도 이 고통을 보상해 줄 수는 없어’라고 말하곤 하지. 천국을 얻고나면 과거의 고통마저도 영광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모르는 게지.”
하나님나라에서 쏟아지는 영광과 기쁨과 축복의 빛은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시간을 거슬러 지나온 모든 시간을, 시련으로 가득찬 삶조차도 찬란한 천국의 삶으로 변화시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다’에서 톰 라이트도 비슷하게 이렇게 씁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행한 모든 것, 예수님의 죽음과 새생명의 능력으로 행한 모든 것, 성령에 이끌려 행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의의 삶은 모든 순간이 하나도 헛되지 않아 사랑과 기쁨의 빛을 뿜어내는, 천국의 성벽을 쌓는 벽돌이 될 것입니다. 한 죄인이 구원받아 의인이 되는 것뿐 아니라 의인된 그의 삶의 모든 순간이 변화되어 천국의 일부가 된다는 말입니다.
6. 저주를 받는 악인의 삶
다시 ‘천국과 지옥의 이혼’으로 돌아와 그 천사는 악인의 삶도 변한다고 설명합니다.
“또 인간들은 죄스러운 쾌락을 즐길 때 ‘이번만 즐기고 댓가는 나중에 치르자’라고 말하지만 나중에 받은 저주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이전의 쾌락조차 저주의 일부가 되어 고통과 비탄으로 바꾼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다네. 이 구원과 저주의 두 과정은 인간이 살아있을 때부터 시작되지…”
의인의 삶이 영광스러운 하나님나라의 일부로 변화되듯이 악인의 삶도 저주받은 지옥의 일부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이 원리를 보여주는 영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여러나라에서 최고의 한국영화로 꼽히며 국내외시상식에서 무려 14개의 주요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되어 사설감옥에서 15년을 갇혀있다 풀려난 남자 오대수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납치한 원수가 누군지 찾아내려 동분서주하는 그를 유일하게 위로해준 것은 우연히 만난 일식집요리사 미도의 사랑입니다. 마침내 자신의 원수가 누구인지 찾아내고 드러난 진실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그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학창시절 자신이 무심코 퍼뜨린 헛소문으로 누나를 잃은 친구 이우진의 복수로 자신이 15년이나 갇혔던 것이며, 그 동안 이우진이 복수심으로 설계한 함정에 빠져 미도가 15년 전 잃어버린 어린 딸인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사랑을 나누어 왔던 것입니다. 순간 그는 절망에 빠져 울부짖으며 자신의 혀를 스스로 자르고 최면술사를 찾아가 자신의 기억을 잊어버리게 최면을 걸어달라고 간청합니다. 진실의 심판대 앞에 선 순간 자신의 모든 과거가 죄와 수치로 가득찬 것을 깨닫고 그 무지와 쾌락의 모든 순간이 저주로 가득차버려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무지와 교만으로 살던 죄인이 공의의 심판대 앞에서 서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달을 때 이보다 덜 괴로울 수 있을 것이며, 그로인해 자신에게 임할 저주와 심판의 무서움을 깨달을 때 지나온 모든 시간이 그 저주의 무게와 파괴력으로 인해 송두리채 부정되고 덩달아 지옥의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시 73: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시 73:19)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이 죄의 엄중함과 심판의 무서움을 모른 채 오늘 쾌락이 전부인 줄 아는 악인을 그러므로 의인이 부러워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삶은 마치 사형수가 사형집행일 아침 만찬을 제공받아서 배부르게 먹는 것과 같습니다. 곧 사형대에 오를 그가 산해진미를 입에 넣어본들 무슨 맛을 즐기며 무슨 기쁨을 누리겠습니까!
미래의 하나님나라의 완성은 오늘의 우리 삶의 질마저도 완전히 변화시켜둔다는 이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산상설교의 주님의 말씀이 이해됩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주리고 목마른데 어떻게 행복합니까!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데 어떻게 기뻐하고 즐거워합니까!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들이 은혜로 상속할 그 천국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박해받은 삶의 모든 순간을 빛나는 영광과 기쁨과 존귀의 순간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순간이 수많은 퍼즐이 되어 하나님나라를 아름답게 장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깨닫는 성도는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구원받는 이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일찌기 주님을 알고 천국을 누린 사람을 더 부러워할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들의 저주받은 삶을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천국을 은혜로 거저 받은 우리에게 왜 이렇게 큰 은혜를 주시는지 감당하지 못 할 감사와 찬양을 쏟아놓을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천국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