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9 새로운교회 주일예배 ‘네 개의 제단'(열왕기하 3:21-27) – 김도완 목사

9월 28, 2024

Series: 주일예배

Book: 열왕기하

왕하 3:21-27/네 개의 제단

240929 주일설교

1. 희생된 아이

한국의 어느 학원강사가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그가 가르쳤던 희진이란 아이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희진이는 고 3 때 태어나 처음으로 전교 2등을 딱 한 번 했습니다. 그 날 희진이는 학원에 와서 ‘자신은 서울대 법대 수석 못 할 것 같고 도저히 성적표를 부모에게 보여줄 자신이 없다’며 펑펑 울고 사시나무 떨듯 몸을 흔들었습니다. 다음 날 오후 경찰서에서 희진이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충격적인 연락을 받았습니다. 경찰조사 결과 희진이의 삶은 오직 서울대 법대 수석을 위해 존재하는 듯 했습니다. 희진이의 부모는 아이에게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서울대 법대 수석을 삶의 목표라고 주입시켰습니다. 엄마는 새벽 5시에 희진이를 깨워 아침공부를 시키고 직접 운전하여 등교를 시키고 하교길에 바로 학원으로 운전하여 데려다 주고 다시 밤 11시 즈음 학원에서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시간을 아껴 공부해야 했기에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친구 한 명 없이 휴일도 없이 공부만 하며 지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후 희진이의 아빠는 아이의 일기장에 학원강사의 이름이 몇 번 등장한다는 이유로 학원을 찾아와 주먹질로 분풀이를 했습니다.

다소 극단적인 예이긴 하나 희진이의 비극은 한국사회에서 또 이 곳 한인사회에서도 그리고 사람 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벌어지고 있습니다. 분명 그 부모는 희진이를 위해 모든 일을 했을텐데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우리 삶은 희진이의 가정과 아무 상관이 없을까요? 그 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  번째모압의 제단

기원전 8세기경 지금부터 2,700여 년 전 이스라엘 남북왕국시대 북왕국에게 조공을 바치던 모압이 반역을 꾀하자 북왕국은 남왕국과 에돔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모압정벌에 나섭니다. 모압군은 상황을 오판하고 성급하게 반격에 나섰다가 오히려 포위되어 전멸당할 위기에 놓입니다. 포위망을 돌파하려다 실패한 모압왕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성 위에 제단을 쌓고 모압의 신 몰록에게 자신의 큰아들을 죽여 번제로 드립니다.

(왕하 3:27) 이에 자기 왕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데려와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모압과 암몬 등지에서 숭배하던 몰록신은 고대근동의 인신공양을 받는 신으로 유명했습니다. 왜 자식을 제물로 바칠까요? 우상숭배는 신에게 귀한 것을 바치면 그에 합당한 소원을 들어준다는 믿음을 기초로 합니다. 당연히 이는 인간관계에서 경험한 소위 기브앤테이크를 신과의 관계에 투영한 것입니다. 우리도 다 경험해 아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하는 믿음입니다. 자연스레 더 큰 소원을 응답받으려면 더 귀한 것을 바쳐야 하고 도저히 이루기 힘든 절박한 소원을 응답받으려면 가장 귀한 것을 바쳐야 합니다. 예를 들면 장자같은 존재 말입니다. 이것이 모든 우상숭배의 기본적 믿음입니다. 모압왕은 몰록신에게 자신에게 가장 귀한 아들을 바칠테니 자신을 살려달라고 빌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모압왕은 자신의 소원을 응답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희생제사광경을 보고 ‘크게 격노함이 임해’ 포위망을 풀고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왕하 3:27) …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 그들이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

이 표현에의 해석이 좀 애매한데, 이스라엘이 자식을 인신공양까지 하는 모압왕을 보고 진절머리가 나서 이만하면 모압징벌의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으니 돌아갔다는 해석과 모압왕의 번제 때문에 몰록신이 이스라엘에게 격노할 것이 두려워 전투를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등의 해석이 있습니다.

3.  번째성공의 제단

그런데 이 본문이 희진이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이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두 사건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모압왕은 자신이 살기 위해 우상의 제단에 아들을 바쳤습니다. 희진이의 부모 역시 자신의 욕망을 위해 딸을 성공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런 해석에 격노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녀를 사랑했고 자녀의 성공을 위해 오히려 자신들이 희생했다고 믿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를 유익하게 하지,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실제 그들이 사랑한 것은 성공한 자녀를 통해 이루려 했던 자신들의 이루지 못 한 꿈이었을 수도 있고, 자녀를 위한 희생을 좋은 부모라는 자부심과 자아성취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자녀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이라 보이고 싶은 허영심일 수도 있고, 자녀의 실패가 자신의 실패로 보일까봐 두려운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자신도 모르게 이처럼 자녀를 욕망의 제단에 희생시키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자녀를 우상으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모든 좋은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녀 뿐 아니라 가족, 일, 성취, 부, 명예, 자존심, 쾌락 등 그 어떤 것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에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사랑해야 마땅할 가족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리에 올려놓으려하면 우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4세기 교부 어거스틴은 신국론에서, 세상 모든 존재는 그 가치에 맞는 대접을 받을 때 행복하다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가장 존귀한 분으로 그에 합당한 모든 사랑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그 다음이며 인간을 제외한 피조세계가 마지막입니다. 이 원리에 의하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만 자녀도 더 사랑하고 행복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귀한 자녀도 하나님보다 더 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녀를 하나님 자리에 놓고 하나님을 자녀 아래 놓으려는 순간 자녀는 우상이 됩니다. 자녀는 자신에게 걸맞지 않는 사랑과 기대의 무게에 짓눌리고 숨막히기 시작하고, 자녀에게 걸맞지 않는 사랑을 하는 부모는 집착과 불안의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기대하고 집착한 만큼 환멸이 시작됩니다. 이 우상숭배는 부모와 자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고 급기야 우상을 삼은 자녀를 오히려 우상숭배의 희생제단에 올려놓는 비극이 시작됩니다.

4.  번째모리아산의 제단

그럼 어떻게 해야 이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자녀를 원래의 자리에 놓으면 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에 놓고 자녀를 자녀가 마땅히 있어야 하는 자리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창 22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던 사건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우상숭배자들이 하던 인신공양을 원하신단 말인가! 하나님도 이방의 우상처럼 아브라함에게 복주시기 위해서 인신공양같은 대가를 요구하시는 분이란 말인가!

먼저 하나님은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대가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창 22:2을 보면 하나님은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아무런 대가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창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장 원하던 소원, 가장 소중한 것을 ‘이미’ 그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아들 이삭이 그 소원의 응답이었습니다. 그 아들을 통해 그 자손이 바다의 모래와 하늘의 별처럼 번성할 것이란 약속을 이미 주셨습니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런 명령을 하셨습니까? 그 답은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이삭을 바치려 하였을 때 그를 말리며 하신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창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평생의 소원인 아들 이삭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으로 삼는 치명적인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연단하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 이전까지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향한 사랑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하나님과 이삭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 그 스스로도 몰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그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그를 우상으로 섬기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믿음을 돌아볼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후 밤이 새도록 아브라함은 고민하고 기도하고 또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그 분 자체가 내 주인이시기 때문인가, 내게 이삭을 주셨기 때문인가? 나는 주인이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더 사랑하는가?’ 동이 터올 때 마침내 아브라함은 깨달았고 또 결단하였습니다. ‘아무리 귀한 아들이라도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보다 더 귀할 수 없으며, 아무리 아들을 사랑해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그 아들을 복되게 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내 모든 사랑과 충성을 바쳐야할 유일하신 주인이시며 아들을 주겠노라는 약속을 이미 지키신 그 분은 끝까지 신실하셔서 내 아들이 죽어도 돌려주실 것이다.’

(히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는 이삭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함으로써 우상으로 삼기를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하나님께 이삭을 드림으로써 오히려 이삭을 돌려받았습니다.

5.  번째골고다의 제단

바로 이것이 자녀를 가장 복되게 하는 진리입니다. 자녀를 우상으로 삼으면 모압의 제단처럼 오히려 우상숭배의 제물로 망하게 할 뿐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 자녀를 드리면 아브라함처럼 진정으로 자녀를 돌려받고 그를 복되게 합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선하신 하나님이야말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의 제단에 드려 우리와 우리의 자녀까지 모두 살리고 복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돌려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로부터 2천 년 후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려했던 바로 그 자리 모리아산, 후에 골고다로 불린 언덕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대신 십자가의 제단에 드려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은 도대체 왜 당신의 아들을 이삭 대신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 대신 십자가의 제단에서 희생시키셨습니까? 죄와 악으로 영원히 피흘려 죽고 망해야 할 죄인을 사랑하여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이 세상 어디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구원받은 죄인으로부터 가장 큰 사랑과 경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 분에게 합당한 사랑과 경배를 올려드릴 때 우리 가정은 진정 행복합니다.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녀는 제대로 된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고 자유롭고 성공합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그 분께 자녀를 돌려드릴 때 우리는 오히려 자녀를 돌려받습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를 모압의 제단이 아닌 모리아의 제단에 드려서 진정으로 살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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