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9:20-30/아침에 보니 레아라
241006 주일설교
1. 그대 없이는 못 살아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헤어져서는 못 살아, 떠나가면 못 살아…’ 패티 김의 ‘그대없이는 못 살아’입니다. I can’t live if living is without you, I can’t live, I can’t give anymore… 머라이어 캐리의 I can’t live without you 도 같은 사랑을 노래합니다. 멜로디와 리듬과 장르는 계속 바뀌지만 당신 없이는 못 산다는 젊은이들의 사랑노래는 끊임없이 변주되어 나오고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해야 진짜 사랑이요, 이렇게 사랑해서 결혼해야 행복할 줄로 압니다. 그런데 이런 뜨거운 열정으로 결혼한 수많은 가정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망과 상처로 고통받고 환멸을 느끼며 깨집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며 어떻게 해야 결혼생활의 상처와 환멸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2. 라헬만 있으면
오늘 본문에는 그대 없이는 못 살겠다고 노래를 부르는, 사랑에 눈 먼 로맨티스트가 등장합니다. 바로 야곱입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라헬 없이는 못 살아’입니다. 라헬에게 첫 눈에 반했습니다. 그가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외삼촌 라반에게 주기로 한 신부의 값은 칠 년치의 연봉 전부였습니다. 10만 불 연봉자라면 70만 불을 그 아버지에게 주고 라헬과 결혼하겠다는 것입니다. 성서학자들은 고대의 기준으로 볼 때 통상적인 신부값의 네 배에 해당하는 큰 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속아 사랑하지 않았던 라헬의 언니 레아까지 아내로 맞아서 총 14년치 연봉을 고스란히 주어야 했습니다. 140만 불입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이를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창 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왜입니까? 매력적인 라헬에게 완전히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7년을 며칠 처럼 여기며 뼈빠지게 노동했는데도 라반이 차일피일 미루며 라헬을 주지 않자 몸이 달아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 29: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직역하면 ‘빨리 라헬을 주세요. 그녀와 침대로 가야겠습니다.’ 정도가 됩니다. 얼마나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며 얼마나 무례하기 그지 없는 수준입니까! 야곱은 예의 따위 신경 쓸 여유가 없을 정도로 라헬에게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에서 이 시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라헬 없이는 못 살아’였습니다. 라헬만 있다면 자신의 외로움도, 공허감도, 두려움도, 억울함도, 패배감도 모두 사라지고 진정 행복하리라! 많은 젊은이가 이런 착각 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식장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달콤하고 운명적인 사랑을 찬양하는 대중가요와 소설과 영화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갑니다. 현대인은 왜 이토록 사랑을 찬양하고 사랑에 큰 기대를 거는 것일까요?
3. 사랑이라는 우상
결혼이 신분유지의 수단이었던 고대사회에서 야곱처럼 로맨스에 목숨을 거는 이는 상대적으로 소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야곱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죽음의 부정’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작가 어네스트 베커는, 인류가 하나님을 잃고 나서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찾는 주된 출처가 로맨스와 섹스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과거 서구문명에서 신이 창조한 존귀한 존재였던 인류는 현대에 이르러 아무 이유없이 우연히 우주에 내던져진 존재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공허와 무의미함을 극복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인류는 로맨스와 섹스의 가치를 신의 위치로까지 격상시켰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로맨틱한 사랑을 우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당연히 여호와신앙을 배웠겠지만 그의 삶의 여정을 보면 그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 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 하면 야곱처럼 공허감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물던 시기 그의 인생모토가 ‘라헬만 있으면’이었다면 여기로 도망오기 전 어린 시절 그의 인생모토는 ‘장자권만 있으면’이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 한 그는 장자권만 있으면 자신의 삶이 행복할 줄 알고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여서 기어이 장자의 축복을 받아냅니다. 그런데도 그는 행복하지 못 했고 오히려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라헬을 만나는 순간 갈망의 대상이 장자권에서 라헬로 바뀝니다. 라헬을 얻었지만 역시 그는 행복하지 못 했습니다. 라헬이 일찍 죽자 그의 모토는 다시 ‘라헬이 낳은 요셉만 내게 있으면’으로 바뀌어 다른 아들들을 들판에 보내 거친 일을 시키는 동안 요셉만 채색옷을 입히고 사랑했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버리고 야곱에게는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후 슬픔에 빠진 그의 모토는 ‘라헬이 낳은 또 다른 아들 베냐민만 있으면’으로 바뀌어 그를 과보호합니다. 이처럼 야곱의 인생은 끊임없이 ‘그 무엇만 있으면’이란 조건절 속에 살았습니다.
4. 우상숭배의 환멸
우리 인생도 비슷합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면, 높은 학력만 있었더라면, 첫사랑의 그녀와 결혼만 했더라면, 돈만 많았더라면, 성공만 했더라면 하는 끊임없는 조건절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절 인생은 결코 만족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건절 인생은 그 대상을 우상으로 삼는 것이고 이런 우상숭배자는 반드시 그 대상으로부터 속아서 실망과 환멸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결과 꿈을 이루어 결혼잔치를 열고 그녀와 첫날 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기가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창 29: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그가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 라헬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가 사랑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레아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실망스럽고 황당하고 어이가 없고 화가 났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랑과 결혼과 섹스에 환상을 가진 이들이 그녀가 혹은 그가 자신의 라헬인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에 눈을 떠보니 레아인 줄 깨닫고 실망하고 화를 내는지 모릅니다! 사랑이 식었다며 결혼생활을 끝내고 싶어하는 이들이 겪는 실망과 환멸도 바로 이것입니다. 라헬인 줄 알았는데 아침에 보니 레아였던 것입니다!
이런 실망과 환멸은 결혼생활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줄 알았던 모든 라헬, 그것이 돈이든, 학력이든, 성공이든, 쾌락이든 얼마지나지 않아 금방 레아인 것을 깨닫고야 맙니다.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공허와 무의미와 외로움을 완전히 채워줄 라헬은 세상에 없습니다. 아침에 보면 레아인 현실은 에덴동산 이후로 모든 시대 모든 인류가 겪어온 환멸의 축소판입니다. 아무리 달콤한 라헬을 얻어도 아침에 보면 쓰디쓴 레아입니다.
야곱이 아무리 결혼파티에서 술에 취해 있었다 할지라도 라반에게 어쩌면 이렇게 쉽게 속았을까요?
(창 29:25) …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그 이유는 그의 눈이 멀어 있기 때문입니다. 라반은 야곱이 라헬에 눈이 멀어 제정신이 아닌 것을 보고 외모가 아름답지 않아 데려갈 남자가 없는 레아를 비싼 값에 팔 기회를 잡았습니다. 우상숭배자는 눈이 멀어 우상의 거짓말에 쉽게 속아넘어 갑니다. 장자권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는 말에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받았지만 야곱은 아무 것도 얻지 못 한 채 거지꼴로 목숨을 건지고자 라반에게 도망쳐야 했습니다. 14년을 죽을 고생을 하고 결국 라헬을 얻었지만 그의 결혼생활은 네 명의 아내의 질투와 다툼에 바람잘 날이 없는 고생의 시간이었습니다. 요셉만 있으면 된다고 모든 사랑을 쏟아부었지만 이런 편애는 오히려 아들들의 다툼을 불러 일으켜 아들들에게 속아 평생을 요셉이 죽을 줄 알고 슬픔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5. 여호와를 신뢰하지 못 한 삶
야곱의 삶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그는 왜 장자권, 라헬, 요셉 그리고 베냐민으로 끊임없이 대상을 바꾸어 가며 고통스러운 우상숭배의 삶을 이어가야 했던 것일까요? 우상숭배의 불신앙, 그 시작은 말그대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왜 장자권에 그토록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분명 하나님께서 첫째가 아닌 둘째 야곱을 장자로 삼아 신앙과 가문을 지키게 하시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이삭)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리브가도 이삭으로부터 이 말씀을 분명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당시 문화에서 장자에게 더 어울리는, 남자다운 심성을 가진 에서를 편애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을 받았던 야곱은 분명 리브가로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을 장자로 삼으셨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삭은 자신이 아닌 형 에서를 더 사랑하고 있으니 이러다가 덜컥 아버지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형을 장자로 축복하고 부족의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고 선언해 버릴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몫인 장자권을 스스로 그것을 쟁취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을 알았고 그 분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었다면 아버지가 아무리 형을 편애해도, 형이 아무리 남자답고 힘이 세어도 장자권이 결국 자신에게 오리라는 것을 믿고 기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형 에서는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릴 정도로 충동적인 사람이어서 야곱이 도망간 후에도 부족과 신앙을 지키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이방인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 부모의 근심이 되었습니다.
(창 26:34)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창 26:35)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또한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아버지 이삭도 받았던 약속의 땅에 대한 아무 관심이 없어서 자신의 가족과 부족을 이끌고 에돔땅으로 떠나갔습니다.
(창 36:8)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6. 그리스도로 충만한 성도
즉 야곱은 굳이 불안감과 두려움에 형과 아버지를 속이지 않았어도 실질적인 상속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으로 그의 마음이 충만하였다면 장자권만 있으면, 라헬만 있으면 또 요셉만 있으면 하는 조건절의 인생을 살며 속고 고생하고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이라면 이런 조건절의 인생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믿음을 명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모든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는 이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저것만 있으면 하는 배고픈 인생, 목마른 인생, 조건절의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연인과 배우자에게도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으며 비로소 실망하고 상처받고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지금 어떻습니까? 그리스도로 충만합니까, 아니면 헛된 것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 무엇도 숭배하지 않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