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0:25-37/강도 만난 자의 이웃
241020 주일설교
1. 키티 제노비스 사건과 방관자 효과
1964년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뉴욕에서 벌어졌습니다. 20대 여성 kitty Genovese는 밤늦게 귀가하던 중 집 근처에서 그녀를 스토킹해오던 윈스턴 모즐리에게 공격을 당했습니다. 그는 3차례에 걸쳐 제노비스를 성폭행을 시도하다 저항하자 칼부림을 했고 35분 동안 그와 사투를 벌이던 제노비스는 뒤늦게 앰블런스에 실려가던 중 사망했습니다. 수많은 강도살인사건 중 하나로 묻힐 수 있었던 이 사건을 전국적으로 떠들썩하게 알린 것은 뉴욕타임즈의 기사였습니다. 기사는 그 날 밤 인근 주택가 37명의 주민이 제노비스의 살려달라는 간절한 비명을 30여 분 동안이나 듣거나 목격하고도 그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씀으로써 전국민적 충격과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왜 그들은 그 누구라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던가? 대부분 아마도 누군가 신고하겠지, 위험하고 귀찮은 일에 휘말릴지도 몰라 하는 생각에 모른 척 한 것이 아닐까요? 이 사건을 계기로 방관자 효과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일어나 제노비스 신드롬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사건은 뉴욕타임즈의 특종욕심으로 상당히 부풀려진 것이었습니다. 그녀를 외면했다고 비난받은 37명의 주민 중 대부분은 새벽 2시가 넘어 들려온 고함소리에 술주정이거나 단순한 연인간 다툼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물론 상황을 정확히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고 밝혀진 주민이 3명 있었습니다. 반면 경찰에 신고한 주민도 2명이 있었으며 그 중 한 명인 소피아 파라라는 용감한 이탈리아계 주부는 뛰쳐 나가서 앰블런스가 올 때까지 곁에서 제노비스를 보호했습니다. 실제 강도가 두 차례에 걸쳐 돌아와 제노비스를 공격한 것을 고려하면 이 여인도 공격받을 수 있었던, 위험천만한 선택이었습니다.
만약 오늘 여러분의 집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귀찮고 위험한 일에 얽히기 싫으니 빨리 잠을 청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소피아 파라처럼 여러분도 문을 열고 나가 쓰러진 이를 위해 수고와 위험을 무릎쓰시겠습니까? 똑같은 질문을 오늘 본문에서 제가 아닌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던지십니다.
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오늘 본문은 유명한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일반명사가 되어버린 것처럼 비기독교인도 모르는 이가 없는 이 비유는 한 율법교사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에서 등장합니다. 율법교사는 오늘날의 신학교수 정도입니다.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
예수님을 시험하여 함정에 빠뜨리려했던 그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냐’고 묻고 예수님은 ‘율법이 무엇이라 가르치냐’고 되물으시고 그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이 옳은데 중요한 것은 ‘이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생의 길이 무엇인지 논쟁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나 정작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율법교사의 위선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는 민낯이 드러난 듯 당황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위신이 깍였다고 느낀 그는 자신을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려고 마치 행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양 ‘내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을 이어갑니다.
(눅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
그 때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강도가 많이 출몰하는 위험천만한 광야길이었습니다. 강도들을 만나 옷을 벗기우고 맞아서 거의 죽게 되어 쓰러진 이를 제사장과 레위인이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목사와 선교사 정도 되겠습니다. 정작 그를 도와준 것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는 위험을 무릎쓰고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으로부터 격렬한 경멸을 받던 사마리아인의 등장이 주는 충격은 오늘날 기독교인을 청중으로 한 가르침에서 선한 주인공이 동성애자로 제시되는 것과 유사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받은 충격과 불편함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도전으로 마무리하십니다.
(눅 10:37) …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영생의 길은 목사나 선교사와 같이 겉으로 보이는 경건함과 아무 상관 없으며 오직 온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의 삶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유대인에게 그토록 경멸받는 사마리아인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말씀의 칼을 휘두르는 오만
그렇다면 그런 사마리아인조차도 행하는 이웃사랑을 정작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노래하는 율법사는 행하지 못 하고 있다고 꾸지람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유 속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피하여 도망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들은 율법을 자신이 순종할 하나님 말씀으로 받지 않고 이웃을 판단하는 정죄의 칼로 휘두르기 때문입니다. 25절은 이 율법교사가 율법을 사용하는 목적을 정확히 지적합니다.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이미 답을 알면서도 예수님이 제대로 답하는가, 아닌가를 시험하여 곤경에 빠뜨리려 자신의 율법지식을 사용하였습니다. 어떤 기독교인이 성경공부를 하면 할수록, 신앙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겸손해지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가 높아지고 눈매가 날카로워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예리하고 잘 드는 진리의 칼입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 칼을 성령님은 우리 자신을 수술하여 죄와 악의 암덩어리를 잘라내어 생명을 살리는 수술실의 메스와 같이 쓰십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성령님에게서 그 칼을 빼앗아 들고 형제, 자매를 향해 들이대며 ‘내가 당신의 암을 수술해 주리다’ 하고 덤벼듭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려는 오만이요, 죄악입니다. 혹시 여러분 손에 이 칼이 쥐어있다면 성령님께 돌려드리고 겸손히 수술대에 다시 누우시기 바랍니다.
4. 의롭게 보이려는 위선
둘째는 율법교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서기를 구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기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29절을 보면 그는 마치 이웃사랑에 관심이 많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자신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눅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위선에 속지 않으십니다. 그는 옳게 보이려 할 뿐 옳게 살려하지 않음을 꽤뚫어 보셨습니다. 그 증거가 그의 질문 속에 드러납니다. 그는 이웃사랑조차도 자기중심적이어서 자신의 이웃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기심을 꼬집으시면서 36절에서 너의 이웃을 찾을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어라고 하십니다.
(눅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네가 중심이 되어 이웃을 고르는 것은 이웃사랑이 아니고 이웃을 사랑하는 척 보이려는 허영이다. 네 자신이 아닌 강도 만난 자를 생각하여 그의 필요를 구하는 이웃사랑이니 가서 그런 사랑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눅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생각하느라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를 잊어버리지는 혹시 않습니까?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볼수록 사람의 시선과 평가를 적게 의식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온통 사람들의 시선에 묶여 꼼짝 못 하는 위선자가 됩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진리로 자유케 되면 더 이상 자기사랑을 이웃사랑으로 포장할 필요도 느끼지 못 합니다. 진정으로 이웃을 위해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옳게 보이려 하지 말고 옳게 행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5. 강도 만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이기심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강도 만난 자의 곁을 지킬 수 있습니까? 그 답은 예수님이 먼저 죄악과 고난의 강도 만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정욕과 탐욕과 허영의 강도를 만나 쓰러진 우리, 질병과 빈곤과 실패와 배신의 강도를 만나 쓰러진 우리를 주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 대신 피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강도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 비유 속 강도 만난 자의 곁을 지키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당신이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은혜와 능력을 주시기에 우리도 그 분처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 곁에 쓰러진 강도 만난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요?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제사장과 레위인들처럼 그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피해다녔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일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스스로 여기지만 의를 구하기보다 의롭게 보이기를 구하느라 쓰러진 이웃을 보는 눈이 멀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쓰러진 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관심있는 것만 보입니다. 10대 소녀들은 멋진 거리에 가면 옷과 악세서리 가게만 보입니다. 부동산 투자에 진심인 사람은 그 거리에서 목좋은 건물만 보입니다. 주먹 쓰는 건달들은 거리에서 마주치는 덩치 좋고 눈매 매서운 덩지들만 보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을 모른 채 방황하는 길잃은 영혼들이 보입니다.
6. 우리 곁의 강도 만난 이웃
운전할 때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시야가 점점 좁아져 주변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온 마음으로 돈과 성공과 안락함과 정욕만 온 힘 다해 좇아가노라면 주변에 쓰러진 영혼이 안 보입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전에 한 자매님 가정을 심방했습니다. 남편과의 불화로 가정이 깨지기 직전이었고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기도하고 격려하고 다행히 그 때는 위기를 잘 넘어갔습니다. 그 후 몇 년이 흘렀는데 여전히 그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문득 하루는 그 자매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려다가 교구를 담당한 부목사님께 전화를 드려보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얼마 있다가 제가 다시 그 자매에게 전화했더니 그 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며칠 전부터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가 그 날 아이를 지인에게 맡기고 혼자 집에 돌아와 실행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막상 실행하려니 너무나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는데 그 순간 교구목사님께 전화가 왔던 것입니다. 교구목사님께 위로와 기도를 받고 나니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님이 자신을 잊지 않고 계시고 못 죽게 하시려고 그 목사님께 전화를 하게 만드셨구나 하는 것이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고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도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이 자매를 사랑해서 살리시려고 그 순간에 떠오르게 하셨구나.
오늘 잠시 눈을 감고 주님께 강도 만나 피흘리며 쓰러진 영혼을 보여달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그일 가능성이 큽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괜찮을 거야, 누군가 도와주겠지, 귀찮고 위험한 일에 얽힐지 몰라 하고 피해서 돌아가시겠습니까? 가까이 가서 위로하고 교회로 초청하여 돌보며 그를 살리실 하나님께 맡기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던지셨던 이 질문을 우리에게도 던지십니다.
(눅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새로운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이와 같이 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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