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5:1-14/상처받은 자부심
241027 주일설교
1. 화가 나는 이유
2014년 12월 5일 뉴욕 존 F 케네디공항에서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소위 ‘땅콩회항’이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할 예정이던 대항항공 KE086편이 출발을 위해 이동하던 중 갑자기 탑승구로 돌아가는 회항을 하는 바람에 46분을 늦게 출발한 것입니다. 문제는 비행기가 회항을 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1등석에 탑승했던 재벌3세였던 조현아 부사장이 자신에게 여성승무원이 땅콩을 뜯어서 접시에 제공하지 않고 봉지채 제공한 것에 격분하여 승무원과 사무상을 불러 무릎을 꿇리고 호된 질책을 하고 매뉴얼을 집어던지는 등 모욕을 주고 비행기를 회항시켜 사무장을 내리게 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땅콩을 봉지채 제공도록 매뉴얼이 되어 있고 오히려 조부사장이 규정을 몰랐던 것이며 또 매뉴얼을 보여준 사무장을 비행기에서 내리게 만들려고 회항을 시킨 것도 항공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던 조치였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재벌의 갑질사건으로 국민적 비난을 받았습니다. 조부사장은 그깟 땅콩이 뭐라고 그렇게 화가 났던 것일까요? 직원들을 그렇게 모욕하고 위험한 회항까지 막무가내로 고집해야만 했던 것일까요?
아마 이것은 재벌 3세인 조부사장의 자부심이 상처를 받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자부심은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믿고 가지는 당당한 마음’으로 풀이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유아기에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 특별하다, 우월하다, 그래서 중요한 존재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성장기에 그런 생각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나 재벌 3세인 그녀는 평생 남들이 누리지 못 하는 특권을 누리며 대접만 받으며 살아왔기에 반대로 그런 생각이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땅콩을 봉지 채 받는 특별할 것 없는 일에 자신에게 걸맞는 대접을 하지 않는다고 격분했을 것입니다. 자부심에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그릇된 자부심은 이처럼 사람을 괴물로 만들 수 있습니다.
2. 자부심의 뿌리 열등감
우리 대다수는 그녀처럼 갑질을 하는 괴물이 될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그런 특권도, 그 정도 자부심도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녀 마음을 지배하던 그릇된 자부심이 덩치는 작아도 얼마든지 우리 마음에도 자리잡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증거는 우리도 그녀처럼 땅콩봉지 따위처럼 아무 것도 아닌 일에 격분하고 섭섭하고 상처받기 때문입니다. 예배 후 교우들과 인사하는 일로 시험에 드는 교우들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목사가 다른 사람 손은 꽉 잡고 2초 이상 있었는데 자신은 슬쩍 잡았다 1초 만에 놓았다거나 자신에게는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악수만 했다는 것입니다. 부부사이에서, 교우들 사이에서, 일터동료들에게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건 자부심이 아니라 피해의식이나 열등감 때문이 아닌가요?’ 자부심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자부심의 뿌리에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열등감을 떨치려는 인간의 필사적인 발버둥이 자부심으로 자리잡는 것입니다. ‘열등감은 해가 되지만 자부심은 필요한 것이 아닌가요?’ 이 열등감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생긴 자부심은 열등감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엄청난 해가 됩니다. 어떤 해가 될까요? 성도는 이 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요? 조부사장과 비슷하게 격분한 소위 셀럽, 유명인의 예에서 배우려 합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본문의 주인공 나아만입니다.
3. 상처난 자부심
오늘 본문은 기원전 9세기경 분열된 이스라엘의 북왕국에서 활동하던 엘리사에게 불치의 피부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온 이웃국가 아람 오늘날의 시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엘리사의 집문 앞에 도착하자 엘리사는 종을 내보내어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면 피부병이 깨끗이 나을 것’이라고 알립니다. 이 말에 나아만은 격분하며 떠나갑니다. 병을 고칠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나아만은 왜 고마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토록 분노하였습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 한 가지만 살펴보고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다음 기회에 살펴봅니다. 11절에 첫째 이유가 드러납니다.
(왕하 5:11)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발길을 돌렸다.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주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새번역)
나아만은 ‘자신이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 하자 화가 난 것입니다. 집 앞에 나와보지도 않은 엘리사의 반응에 그는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믿음 즉 자부심에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그의 이 자부심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바로 그가 가진 지위와 업적과 재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1절과 5절을 보십시오.
(왕하 5: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왕하 5:5) …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북왕국 이스라엘왕도 두려워떠는 이웃국가 강성한 아람에서도 왕 앞에서도 대접받는 고위관리요, 국가에 엄청난 전공을 세운 장수요, 엄청난 선물을 들고올 만한 부자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그가 땡전한푼 없는 노숙자였다면 엘리사가 나와보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갖기는커녕 종을 보내 치유방법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정도 지위와 업적과 부를 가진 사람이라면 오히려 자부심을 갖지 않기가 어렵습니다. 지위와 업적과 부야말로 모든 시대에 열등감에 시달리는 인간에게 자부심을 제공하는 가장 큰 동력입니다. 이 자부심이 얼마나 달콤한지 마약은 저리가라 입니다. C.S.루이스는 그의 에세이 ‘내부패거리’에서 이렇게 씁니다.
“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경제적 동기나 성적 동기 때문이라고 보지 않는다. 답은 내부자(중요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이다… 이 갈망에 지배당하는 한 당신에게 만족이란 없다.”
4. 흔들리는 자부심
이런 자부심이 왜 문제입니까? 가장 큰 문제는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위나 업적, 부에서 나온 자부심은 그것을 잃는 순간 함께 사라집니다. 그렇기에 이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계속 안간힘을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필사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업적을 쌓거나 돈을 더 모으려고 발버둥치는 이유입니다. 손에 쥐고 있어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기에 불안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계속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당신 나 사랑해? 내 보고서를 칭찬 안 해주나? 내 음식을 맛있다고 안 해주나? 계속 확인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어리석은 방법이지만 종종 이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우월함을 자랑하거나 타인을 무시하거나 비난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무시할 때 자신은 그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부심에 걸맞는 존중을 받지 못 한다고 느낄 때 화가 나거나 우울감을 느낍니다. 자부심이 깨진 틈으로 숨겨져있던 열등감과 비하감이 비집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아만도 화가 난 것입니다.
종종 교우들이 한인교회는 왜 이렇게 분쟁이 많으냐고 묻습니다. 그 깊은 뿌리에 한인의 뿌리깊은 열등감과 상처받은 자부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민사회에서 운좋게 성공해도 여전히 소수민족입니다. 성공하지 못 한 경우는 더 심합니다. 일주일 내내 일터에서 주류백인에게 무시와 인종차별을 당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어디일까요? 한인교회입니다. 여기서 열등감의 보상으로 자부심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봉사하고 희생해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었으니 이제 그에 맞는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대접을 받지 못 했다고 여길 때 나아만처럼 격분합니다. 신앙심이나 정의감으로 포장된 명분 아래에는 나아만이 외치듯 ‘목사가 직접 나와 정중히 나를 맞이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상처받은 자부심과 뒤섞인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5. 참된 자부심의 원천
도대체 엘리사는 왜 나와보지도 않았던 것일까요? 상대가 이런 고위층이 아니라도 사람이 찾아왔으면 나와보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요? 아마도 나아만이 하나님 앞에서는 그 자신이 생각하듯 그렇게 대단한 존재도, 중요한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가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고 여기는 자부심을 내어버리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는 말입니다.
종종 목사로서 같은 부담감을 느낍니다. 교우들이 저에게 이번에 어느 교우가 이만큼 도네이션을 했는데, 이만큼 기여를 했는데, 이만저만 희생을 했는데 주보에 좀 실어주고 예배시간에 좀 치하해 주시면 안 되느냐고 부탁합니다. 좋은 의도인 줄 압니다. 하지만 부서나 구역을 치하하는 경우는 있지만 개인의 이름을 싣는 것은 대부분은 정중히 거절합니다. 부작용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섬긴 이를 회중 앞에서 높이면 그 교우를 자신도 모르게 우쭐하게 만들어 시험에 들게 할 수도 있고, 교인들에게도 이렇게 희생하고 헌금해야 교회에서도 대접을 받는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이나 봉사나 희생이 성도의 자부심에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지위와 업적, 돈이 주는 자부심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이유로 교우들의 직업을 공개적으로 치하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대접받는 직업을 교회에서도 대접하면 교인의 가치가 직업에 따라 달라진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도는 일체 자부심을 갖지 말고 그저 자신을 죄인으로 비하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강력하게 성도에게 자부심을 갖도록 가르칩니다. 시 16:3입니다.
(시 16: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누가 존귀한 자입니까? 대통령과 재벌인가요? 부자인가요? 박사, 석학, 스포츠스타입니까? 성도 곧 하나님의 백성이 존귀합니다. 성도는 세상의 영광이 주지 못 하는 진정한 자부심을 가진 이들입니다. 존귀함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의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 때문에 존귀합니다. 벧전 2:9입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6. 흔들리지 않는 자부심
성도가 이처럼 존귀한 이유는 그를 사망의 어둠에서 건져내어 생명의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값주고 사서 그 사랑을 선포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죄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의 값이 얼마쯤 할까요? 값으로 매길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를 주어도 그 한 방울도 살 수 없을 만큼 고귀합니다. 그토록 값비싼 보혈을 값으로 주고 산 성도는 그럼 얼마나 비싼 존재입니까? 그는 존재 자체로 나아만처럼 부와 지위와 업적이 없어도 상관없이 존귀합니다. 이처럼 존귀함은 하나님과 그 아들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아들이라’는 음성을 듣는 이는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자부심을 얻습니다. 이 자부심은 우리가 가진 것의 유무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나아만처럼 업적을 쌓을 수 없는 장애인도, 그처럼 부자가 아닌 서민도, 그처럼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없는 재능 없는 그 누구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당하지 않고 똑같이 존귀한 자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 자부심은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박해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낙심하고 화가 나기보다 주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존귀한 자로 삼기 위하여 당신이 비천한 자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수치와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이 대신 감당못할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자부심을 갖고 살도록 하시려고 당신이 죽음으로 생명과 존귀와 영광을 부활의 소망과 함께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부와 성공과 자랑거리로 흔들리는 촛불같은 자부심의 재료로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태양처럼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으로 재료를 삼아 우리 영혼에서 영원히 불타오르는 참된 자부심으로 충만한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이처럼 자신이 정말 중요한 존재라는 음성을 하나님께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부심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야 우월감이나 열등감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하지만 노력해서 부와 성공과 업적을 쌓은 이는 자부심을 가질 만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이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진리를 알기에 그런 것에 착각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고전 4:7) …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집안도, 재능도, 사회도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노력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까? 노력할 수 있는 건강과 지성과 기회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성도는 이런 것으로 자부심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공동체를 이룬 이웃에게 더욱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더라면 누릴 수 없는 것이요, 이웃이 곁에 없었더라면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귀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부심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세상의 조건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빛을 드러내는 존귀한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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