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7:1-5/편애 없는 천국
241229 주일설교
1. 비극의 씨앗
여러분이 경험한 가장 억울한 사건은 무엇입니까? 아마 어떤 일을 당하셨든 이 소년이 겪은 것보다 더 억울하지는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형제들에게 살해당할 뻔 하다가 팔려서 한 부족의 상속자에서 한순간에 먼 타국땅의 노예신세로 전락한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비극의 씨앗이 뿌려진 장면을 다룹니다.
창세기 12장부터 50장에 이르는 부분을 소위 족장사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는 부족장들의 생애를 다룹니다. 이 중 오늘의 주인공인 마지막 족장인 요셉의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는 아마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간 때부터 애굽의 총리가 될 때까지 약 13년일 것입니다. 피를 나눈 형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다가 노예를 팔아버렸다? 얼마나 비참하고 비극적인 경험입니까! 왜 요셉은 이런 일을 당했던 것일까요? 그 비극의 씨앗이 뿌려진 때가 바로 오늘 본문의 장면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씨앗을 뿌린 이는 그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했던 아버지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지독하게 편애했습니다. 네 명의 아내 중 야곱이 유일하게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객사하고야 만 라헬이 남긴 두 아들 중 첫째가 요셉이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다른 열 명의 아들은 거의 아들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어머니를 아내로 생각하지 않았으니 그 아들들을 아들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그는 요셉에게만 비싼 원단의 채색옷을 지어입혔습니다. 오늘 본문의 후문맥을 보면 형들을 몇 주간이나 들판에서 자며 양을 치도록 고된 노동을 시키는 동안 요셉만 편안히 집에 머물게 했다가 중간에 형들이 양을 잘 치고 있는지 살피도록 보냅니다. 이런 행동은 명백히 요셉을 장자로 대우하여 자신의 상속자로 삼겠다는 뜻이고 동시에 형들을 일꾼취급하는 것입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열일곱 살의 소년이 아버지의 이런 편애에 교만해 지지 않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는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리라는 꿈을 형들에게 떠벌리곤 하였습니다. 그렇잖아도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 한 어머니들로 인한 서러움이 북받치던 형들이 미움과 분노를 품어 급기야 요셉을 미디안상인에게 팔아버린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청춘을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다 보내야 했고, 야곱은 요셉이 죽을 줄 알고 슬픔과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2. 편애의 역기능 가정
그러나 이 편애의 잘못을 야곱 혼자만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이 가문에 대대로 이어져온 역기능문화였기 때문입니다. 편애의 가해자인 야곱 역시 편애의 희생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은 쌍둥이 아들 중 둘째인 야곱이 상속자가 되리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그를 편애하여 상속자로 축복하려 하였습니다. 한편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다정다감한 둘째 아들 야곱을 편애하여 남편을 속이고 야곱이 상속자의 축복을 받도록 하려고 계획을 꾸몄습니다. 즉 한 집안이 아버지와 큰아들, 어머니와 둘째아들로 나뉘어 상속권다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 편애는 결국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살해하려 시도하고 야곱은 집을 떠나 도망자 신세가 되는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럼 이삭은 왜 편애의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야곱처럼 그 역시 편애의 희생자였습니다.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내 사라를 통해서 상속자를 주시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도, 늙은 아내 사라도 그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자신의 젊은 몸종 하갈을 남편의 두 번째 아내로 주어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진짜 늙은 사라가 아들 이삭을 얻자 하갈과 이스마엘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미워하고 급기야 쫓아내고야 맙니다. 야곱이 아버지의 편애를 받지 못 한 희생자라면 요셉과 이삭은 아버지의 편애를 받은 희생자입니다. 편애는 받는 이나 받지 못 한 이나 모두를 희생자로 만드는 비극의 씨앗입니다.
3. 편애의 팬데믹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엔 자녀가 없습니다, 하나 밖에 없어요. 둘이 있지만 모두 똑같이 사랑한답니다. 편애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답니다.’ 그러나 이 편애의 비극은 가정에서만 벌어지는 불행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곳곳이 이 편애의 비극으로 인한 불행을 겪고 있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예는 국가단위의 편애 국수주의와 제국주의입니다. 우리 민족, 우리 나라가 중요하고 최고이고 이를 위해서 타민족, 타국가는 착취하거나 침공해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 독일제국주의가 그러했고 그런 행태는 지금도 세계곳곳에서 압제와 착취, 분쟁과 전쟁으로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동생을 팔아치우는 형들의 비극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기력한 우리 개개인의 삶이 그런 국가적 비극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큰 상관이 있으며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첨단의 항공모함도 바닷물이 없으면 뜰 수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국수주의든, 제국주의든 그것을 떠받치는 지지자들의 문화와 세계관이 없으면 부상할 수도, 작동할 수도 없습니다. 히틀러라는 괴물은 1차대전 패배와 전쟁배상으로 인한 고통과 분노, 아리안족의 우월주의라는 바닷물이 없었다면 결코 부상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민족적, 국가적 편애는 한 국가공동체 안에서부터 지역적, 계층적, 인종적 편애의 토양이 없이 자라지 못 합니다. 그 공동체의 편애를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정, 일터 그리고 교회에서 저지르는 편애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편애가 벌어지나요? 벌어집니다.
4. 편애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교회에서 사귄 오랜 친구, 편한 믿음의 동료, 코드가 잘 맞는 이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자연스럽고 복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과 애정이 여기서 머무른다면 그래서 우리와 상관없는 이들 혹은 우리와 잘 맞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나가지 않는다면 사실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저지른 편애를 우리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슨 악의를 가지고 자녀들을 대했습니까? 그저 자기 마음에 드는 자녀를 특별히 더 사랑하고 마음이 끌리지 않는 자녀에게 무관심했을 뿐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고 무관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눅 6: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눅 6: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눅 6: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그러면 성도는 어떤 사랑을 해야 합니까? 우리의 관심의 시야밖에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편적 사랑을 세상에 부으시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그러므로 성도는 먼저 관심의 시야를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더 넓혀서 무관심하던 이들, 접촉점이 없던 이들에게 넓히기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만 생각한다면 어떻게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을 제자 삼을 수 있습니까?
5. 편애하지 않는 공동체
최근 한 새가족이 와서 우리교회에 오게 된 계기를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신앙의 위기를 만나 한 동안 교회를 나가지 않다가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부부가 함께 집 앞에 있는 교회의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했답니다. 주일예배에 불쑥 나가려니까 쑥스러워서 새벽기도만 몇 달을 다니면서 ‘누군가 말을 걸어 초청해 주면 주일예배도 나가야지’하고 생각했는데 그 누구도 말을 걸지 않더랍니다. 그러던 차에 인연이 있던 우리교회 교인에게서 오랜 만에 전화가 와 밥을 먹게 되었는데 상황을 듣더니 우리 교회 나와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코앞에 있는 교회에 안 나가고 우리 교회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 어느 교우는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 처음 나갔을 때 교회분위기가 너무 냉랭해서 새가족이 오든 말든 관심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구역의 일꾼에게 건의하기를 ‘새가족이 잘 정착하도록 좀 따뜻하게 환영해야 하지 않을까요’ 했더니 돌아오는 답이 ‘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알아서 적응해야지, 뭘 챙겨주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이 교회에서 알아서 각자 생존해야 되는구나’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왜 몇 달을 오고가면서도 아무도 말을 걸지 않을까요? 왜 알아서 적응해야지, 챙겨주기까지 해야 하냐는 생각을 할까요? 자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아무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친한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은 사실상 자신에게밖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친한 사람에게 향한 관심은 그가 자신에게 위로나 즐거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의 만족에 대한 관심일 뿐입니다. 편애는 사실상 자기사랑에 다름아닙니다. 족장들이 했던 편애나 우리가 하는 편애나 모두 자기사랑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기사랑의 감옥에서 벗어나 이웃사랑의 세상으로 해방되라고 명하셨습니다.
(막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새로운개혁교회는 관심과 애정의 영역으로 자신과 가족과 친구에서 더 나아가 낯선 이웃에게까지 넓히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주에 어느 교우가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은 내성적이어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무척 긴장하고 편안하지 못 한데 예배시간에 인사하라 하고 낯선 사람보고도 웃어주라 해서 그대로 해봤더니 이제는 낯선 사람을 보면서도 웃게 되고 편하게 대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새가족에게 이런 말씀이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를 마치고 식당으로 가는데 복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다 웃어주어서 마음이 따뜻하고 편안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거리에 나가서 전도지 나누어 주지 않아도 됩니다. 외국에 나가서 선교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로 여기서 누구나 전도할 수 있습니다. 예배 전후에 복도를 오가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하게 미소를 지어주세요. 부서나 구역에서 낯선 사람이 보이면 무관심하지 말고 ‘저 분은 누구이며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는지 내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지’ 한 번 생각해 보고 물어봐 주세요. 식당에서 첫 주, 셋째 주, 다섯째 주 홀수주에는 구역푯말을 둘테니 구역모임을 하시거나 구역별로 식사를 하십시오. 반면 둘째 주, 넷째 주에는 구역식구들과 잠시 이별하고 전도하러 돌아다녀 주세요. 평소 안면이 있지만 구역을 함께 하지 않아 어색한 이들 혹은 처음 보는 낯선 이들의 곁에 앉아서 말을 걸고 식사해 주세요. 이것이 전도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이웃에게도 다가가지 못 한다면 누구에게 가서 전도할 수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이웃에게도 관심이 없다면 선교지의 어떤 영혼에 관심이 있다 하겠습니까?
휴가갈 때 아이들은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는가만 생각합니다. 아빠는 어떻게 하면 안전하고 즐겁게 가족을 데리고 다녀올까를, 엄마는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이 더 재미있게 휴가를 보내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자기만족을 구하지만 부모들은 자녀와 가족의 만족을 구합니다. 자녀들이 행복한 것이 엄마의 기쁨이고 가족이 즐거운 것이 아빠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올 때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오늘은 무슨 은혜를 받고 누구와 즐겁게 교제를 하고 올까를 생각하십니까, 오늘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누구를 섬기고 도울까를 생각하십니까? 영적인 아이인지, 부모인지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하나님나라는 편애가 없는 곳입니다. 이웃을 향해 열린 곳입니다. 새로운개혁교회가 편애없는 천국을 세상에 미리 보여주는 천국의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뉴저지 새로운개혁교회 https://saerou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