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2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예수님을 치는 자'(요한복음 18:12-27) – 김도완 목사

2월 2, 2025

Series: 주일예배

Book: 요한복음

요 18:12-27/예수님을 치는 자

250202 주일설교

1. 쥐들의 서열

프랑스 낭시대학 행동생물학연구소의 디디에 조르지에 교수가 한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물위에 작은 인공섬을 만들어 놓고 쥐 여섯 마리를 거기 두고 건너편에 사료통을 설치해 두는 실험을 20개 그룹을 만들어 반복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그룹에서 공통되게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나더랍니다. 여섯 마리가 모두 헤엄쳐 건너가 사료를 물어오는 게 아니라 초기에 맹렬하게 서로 싸우더니 서열이 생겨 네 부류로 나뉘더랍니다. 피착취형인 두 마리가 부지런히 헤엄쳐가 사료를 물고 돌아오면 착취형인 두 마리는 물에 들어가지 않고 기다리다가 물고온 사료를 뺏어먹었습니다. 독립형인 한 마리는 헤엄쳐가 물고온 먹이를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먹었습니다. 천덕구러기형인 나머지 한 마리는 헤엄도 못 치고 뺏어먹지도 못 하고 다섯 마리가 먹고 남은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거나 굶었습니다.

조르지에 교수는 이번에는 여러 실험그룹에서 나온 착취형쥐만으로 여섯 마리를 그리고 피착취형, 독립형 그리고 천덕구러기형으로 각각 여섯 마리의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놀랍게도 어떤 방식으로 여섯 마리를 구성해도 힘겨루기 끝에 결국은 똑같이 네 부류로 나뉘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그룹에서는 착취형이었던 쥐들이 자기보다 더 강한 쥐들과 묶이면 피착취형이 되고, 천던구러기형이었던 쥐들이 반면 더 약한 쥐들과 묶이면 착취형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쥐실험을 인간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인간사회에도 이런 역학관계가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중 어떤 유형에 가깝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유형이 되고 싶습니까? 우리 사회의 피착취형이나 천덕꾸러기형에게 당신은 어떤 태도를 취하십니까? 이 질문은 사실 오늘본문말씀이 던지는 도전이기도 합니다.

2. 예수님을 치는 자들

오늘 본문은 지난 주에 이어 체포되어 법정으로 쓰이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끌려가 심문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악한 이들에게 불의한 심문을 당하시면서 모욕과 구타, 배신을 당하십니다. 여기서 무죄한 예수님을 치는 세 부류의 사람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악의와 권력으로 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악한 의도와 권력으로 예수님을 체포해 재판에 넘겨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은 종교지도자 무리입니다. 그들이 가진 악한 의도는 14절의 가야바의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요 18: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대중적 인기는 그를 따르는 대중으로 하여금 그를 유대독립의 메시야로 앞장세워 반로마폭동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가야바는 판단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로마식민정부는 군대를 앞세워 이들을 잔인하게 진압할 터이고, 질서유지를 하는 대가로 온갖 특혜를 로마정부로부터 제공받는 자신들의 지위도 덩달아 위협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죽여서 자신들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말과 주먹으로 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악의보다는 무지때문에 종교지도자들에게 선동되었습니다. 그들 중 하나를 22절이 보여줍니다.

(요 18: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그 아랫사람은 대제사장 같은 특권층이 아닙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의 그늘 아래에서 생계를 해결하고 그의 위세를 엎고 자신도 허세를 부리는 이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선동에 쉽게 넘어가 예수님을 욕하고 주먹으로 칩니다. 이들은 후에 급기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빌라도에게 소리칩니다.

셋째는 배신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제자들이 그들입니다.

(요 18: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종교지도자들의 죄가 탐욕에서 나오고 무리의 죄가 무지에서 나왔다면 제자들의 죄는 약함에서 나왔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웠습니다. 자신도 예수님처럼 잡혀서 고통받을까 두려운 나머지 예수님을 모른 척 부인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 부류는 이처럼 욕심과 무지와 약함으로 예수님을 치는 죄를 지었습니다.

3. 예수님과 작은 

그런데 예수님을 치는 이 무서운 죄는 결코 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의 죄요,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죄이기도 합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그 날 그 법정에 있지도 않았고 예수님을 치거나 부인한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우리 곁에 있는 작은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이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입니다. 이민자요, 소수인종이요, 가난한 노동자요, 노숙자요, 외로운 자들입니다. 그들은 희생형이나 약자형쥐같은 위치에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곧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와 같다는 뜻입니다.

4. 예수님을 치는 우리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착취형쥐와 같이 약자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욕심을 채운다면 우리가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종교지도자들이란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인간세상에도 착취형인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국이나 미국 모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전세사기단, 보이스피싱사기단, 온라인쇼핑사기단만 착취형인간이 아닙니다. 이런 범죄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도 얼마든지 착취형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최근 인플레이션이 어떻게 서민들을 거지로 만드는지를 고발한 책이 쏟아져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Blind Robbery 눈먼 강도’입니다. 한국은행이든 미국중앙은행이든 최근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화폐를 엄청나게 찍어내 통화량을 늘여 인플레이션을 일으킵니다. 이 찍어낸 화폐는 코비드지원금처럼 그냥 나눠주지 않습니다. 낮은 금리로 대출을 해주어서 시중에 통화량을 늘이는데 문제는 이런 대출을 초기에 받을 수 있는 곳은 안타깝게도 저나 여러분같은 서민이 아니라. 높은 담보와 크레딧을 가진 기업, 금융기관이나 초부유층, 권력층입니다. 이들은 낮은 이자로 대출받아 부동산과 주식을 사모읍니다. 그러면 통화량이 늘어 자연스럽게 집값도 주식도 오르고 덩달아 일반물가도 오릅니다. 서민들은 뒤늦게 대출의 극히 일부만을 이용하거나 그마저도 대부분 이용하지 못 한 채 가만히 앉아서 오른 물가로 음식을 사먹고 개스를 사고 비싼 자동차를 사고 오른 렌트비를 내다보면 저절로 가난해집니다. 매일매일 더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서민들이 내는 더 많은 돈은 싸게 부동산과 주식을 사모은 이들과 부유한 기업으로 흘러들어가 매일매일 더 부유해집니다. 통화량공급과 인플레이션을 통해 착취형인간들은 희생형인간들의 돈을 합법적이고 구조적으로 강탈해갑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만약 ‘나만 이런 기회를 놓치고 억울하게 가난해지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난다면, 만약 ‘어떻게 하면 저 대출받아 부자되는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신다면, 반면 ‘이런 구조를 바꾸어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하는 데에는 우리의 생각과 기도가 이르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저 운이 나빠서 그렇게 못 했을 뿐 본질상 착취형인간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판단과 삶의 방식이 이웃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 고려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탐욕을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종교지도자들의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치는 탐욕의 삶을 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만약 우리가 이웃을 험담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욕하고 주먹으로 친 무리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누가 그랬다면서? 누가 이런 사람이었어? 그 사람 앞에서 할 수 없다면 뒤에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엄히 꾸짖습니다.

(약 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약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지난 주에 어느 교우에게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누군가를 흠잡는 이야기를 들으면 단호하게 말한답니다. ‘나는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니면 안 믿습니다. 제게 험담은 하지 마세요.’ 험담을 대하는 마땅한 자세입니다. 더 나아가 성도는 형제자매의 허물을 덮어주고 칭찬하고 인정하는 선한 말을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입니다. .

(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예수님을 비방하는 불의한 말을 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이 사회의 약자인 형제, 자매의 아픔과 주림과 외로움을 보고도 모른 척 한다면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듯 우리도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새정부의 이민자정책으로 많은 서류미비자들이 체포되고 추방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많은 이들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나처럼 합법적으로 들어오면 되지, 누가 불법적으로 들어오래?’ 이런 생각이 드신다면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가 믿음의 영웅으로 떠받드는 아브라함과 족장들은 하나같이 원주민들에게 환영받지 못 한 이민자였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헤롯에 칼날을 피해 두려움에 떨며 애굽으로 피신한 마리아와 요셉의 품에 안긴 망명자의 자녀였습니다. 순교로서 복음을 지키고 전한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로마황제숭배를 거부한 범법자로 쫓겨다녔습니다. 지금보다 조금만 운이 좋지 못 했더라도 우리 역시 서류미비자로 아이를 안고 불안에 떨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불안에 떨고 체포되고 추방되는 이들 중에는 우리와 예배하던 이들, 우리의 집을 수리해주던 이들, 우리의 음식을 만들어주던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눈물을 모른 척 한다면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배신한 이들입니다.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예수님을 모른다 하지 않고 고난당하시는 예수님 곁을 지키는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5. 우리의 죄를 씻으신 예수님

예수님은 당신을 치는 악한 종교인들과 무지한 무리와 연약한 제자들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의 죄를 당신이 모두 지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깨끗이 씻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의 고난의 이유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악한 종교인들과 무지한 무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예수님은 당신을 배신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교회의 기둥같은 사도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요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은 오늘도 당신을 치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습니다. 우리가 깨닫도록 기도하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우리를 정결하게 씻어 천국백성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당신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당신을 치던 우리의 탐욕이 감사로 변하고, 당신을 욕하던 우리의 무지가 지혜로 변하고, 당신을 외면하던 우리의 이기심이 사랑으로 변하여 하나님을 높이며 살도록 변화시키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는 이런 용서와 변화를 경험합니다. 십자가에서는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다. 십자가에서는 구원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치는 모든 죄를 버리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구원받은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