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9:1-10/작은 삭개오, 큰 돌이킴
250204 주일설교
1. 칼과 지갑
11세기 유럽의 교황과 왕들이 십자군전쟁을 일으켰을 때 동원된 기사들 중에는 전쟁에 참여해 돈을 벌려는 비기독교인들도 많았습니다. 명분이 성지탈환이었기에 중세교회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전쟁에 참여시켰는데 그들이 강에 들어가 세례를 받을 때 온 몸이 물에 잠겨도 칼만은 높이 들에 물에 젖지 않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른 것은 다 주께 드려도 칼만은 자기 마음대로 휘둘러야 제 몸을 지키고 돈도 벌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인도 세례받을 때 물에 젖지 않게 높이 들려 하는 것이 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지갑일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도 돈만은 하나님께 그 소유권을 모두 드리지 못 하고 자기 마음대로 쓰려한다는 뜻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영접함은 삶의 모든 것이 그 분의 것임을 인정함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것도 예외일 수 없는데 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말하기를, ‘지갑의 회개가 없는 회심은 진짜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갑의 회개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의 주인공 삭개오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2. 목마른 삭개오
예수님은 북쪽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계곡을 따라내려와 여리고를 통과하여 중앙 산지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이었습니다. 여리고는 당시 유대지역을 관할하던 세관이 있던 곳이고 그 곳의 책임자가 세리자 삭개오였으며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신다는 소식에 몰려든 군중에 그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했으나 키자 작고 사람이 많아서 할 수 없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당시 유대인 성인남자에게 나무에 올라가 매달리는 것은 몹시 우스꽝스럽고 조롱거리가 될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조선시대 사대부양반이 속옷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왜 이런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이 상황은 당시 삭개오가 처해있는 사회적 상황과 영적 상태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는 키가 작았더라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비켜서라고 요구하여 앞자리로 나갈 만한 권력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고 싶지 않았고 그 역시 그런 요구를 할 만큼 당당하지 못 했습니다. 세리가 멸시와 천대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식민정부는 효율적으로 식민지의 세금을 걷기 위해 현지인 유지들에게 세금징수업무를 위탁하였습니다. 총독에게 많은 돈을 내고 그 자리를 산 유지들은 정부에 바칠 세금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대중에게 걷고 그 차액으로 부를 끌어모았습니다. 그들의 세금징수는 로마군인들에 의해 보호받았기에 대중에게 그들은 로마인보다 더 큰 증오를 받았습니다. 삭개오는 돈을 위해 동족을 착취하는 매국노였습니다. 일제시대 친일파가 되어 큰 부를 이룬 이들이 바로 삭개오의 모습이었습니다.
큰 부자가 되었지만 삭개오에게는 진정한 행복과 만족이 없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가 사람들의 조롱을 무릎쓰고 나무 위에 매달려서라도 예수님을 한 번 보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는 돈으로 매울 수 없는 자신의 허무와 수치, 결핍과 죄책감을 예수님을 통해 매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깊은 갈망을 가졌습니다.
3. 찾아오신 예수님
그런 그를 예수님을 주목하여 보시고 마치 베드로와 요한을 부르듯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지나가시려던 계획을 바꾸어 그의 집에 묶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토록 멸시받는 죄인의 집에 들어가 먹고 마시고 친교하고 잠까지 자는 것은 유대인에게 도저히 용납받을 수 없는 부정한 행동이었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말고 악인의 꾀를 좇지 말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 경건한 이의 마땅한 행동이라고 믿는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삭개오를 모두 비방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깨닫지 못 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계획이었습니다. 삭개오처럼 죄로 멸망하는 이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사랑과 계획 말입니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죄인을 멸시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그 사랑이 삭개오를 구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삭개오의 집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 두 문장, 삭개오의 응답 한 문장만을 소개하고 있지만 당연히 그의 집에서 예수님과 삭개오 사이에 얼마나 많은 대화가 오고 갔을까요.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 가르침을 들은 삭개오가 보여준 믿음의 응답을 오늘 본문은 바로 그의 돈에 대한 태도의 변화로 설명합니다.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것은 지출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던 돈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뜻입니다. 동족이 낼 세금을 부풀려 착취한 것을 네 배로 갚겠다는 것은 수입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그 동안 부정하게 벌어들인 행동을 돌이킬 뿐 아니라 앞으로는 그렇게 돈을 벌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당시 율법은 부정하게 빼앗은 돈을 두 배로 갚는 의무를 부과하였습니다. 삭개오가 의무를 넘어서서 네 배로 착취를 갚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돌이켰다는 뜻입니다.
4. 누구를 위해 쓰느냐
삭개오의 지갑의 회개는 그의 회개가 참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칼이 물에 젖지 않도록 세례를 받으려 한 십자군처럼 혹은 지갑은 빼놓고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겠다는 현대기독교인들의 회개와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회개가 참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는 해당되지 않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의 지갑이 회개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갑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일 수 있습니다.
지갑을 주님께 드린 증거는 우리의 수입이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작사가인 영국 성공회 목회자인 존 뉴튼은 한 때 노예상인이었습니다. 당시 노예무역은 막대한 부를 벌어들이는 노다지였습니다. 그가 폭풍 가운데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고 자신의 불의한 과거를 크게 회개하며 목회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영국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는 노예폐지운동에 앞장 서 영국이 1807년 세계최초로 노예무역을 폐지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지갑을 주님께 드린 증거는 우리의 지출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위하여 쓰는 것입니다. 21세기의 C.S.루이스라 불리는 목사이자 저술가인 팀 켈러는 재정지출문제로 부부가 크게 다투고 그 교회의 어느 목사를 찾아온 교우가정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남편은 화가 나서 ‘아내가 옷과 보석에 돈을 너무 많이 쓰며 이는 비성경적인 것이 아니냐’고 목사에게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목사는 그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면서 아내의 비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고 말을 꺼냈습니다. 사치에 돈을 많이 쓰는 것이 비성경적인 것만큼이나 돈을 자신을 위해서만 쌓아두는 것도 비성경적인데 혹시 남편이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 남편은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이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 했으며 자신과 아내가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돈을 자신을 위해서만 쌓아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돈을 많이 쓰느냐, 적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돈을 누구를 위해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삭개오처럼 참되게 회심한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많은 돈을 씁니다. 자신을 위해서만 돈을 쓰거나 쌓아두는 사람은 그러므로 참된 회심에 이르지 못 하였습니다.
5. 얼마나 드리느냐
그럼 얼마나 쓰면 됩니까? 팀 켈러는 십일조 문제로 자신을 찾아온 교우 이야기를 또 들려줍니다. ‘목사님,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 아닙니까? 신약에는 언급이 없으니 신약의 성도인 우리는 십일조를 드릴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십일조는 신약에 언급되지 않았으니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그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런데 구약성도가 받은 은혜가 큽니까? 신약성도가 받은 은혜가 큽니까?’ 그러자 그의 얼굴이 다시 굳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도들과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예수님의 피와 생명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구약성도보다 더 많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C.S.루이스는 그가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자신의 수입의 30%를 교회와 구제와 선교를 위해 썼습니다. 그 역시 자신의 받은 은혜가 구약성도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목사님, 그럼 최소 십일조에서 최대 십삼조까지 드리면 됩니까? 이 질문에 답을 해보십시다. 예전에 한 신실한 교우가 저를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십일조는 세금 전입니까, 후입니까?’ 비교적 수입이 넉넉한 직업이었던 그 분에게 이는 십일조 액수의 차이가 컸음에 틀림없습니다. ‘교우님, 성경에는 세금전인지, 후인지에 대한 지침은 없습니다. 다만 감사함과 기쁨으로 후히 드리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사와 기쁨으로 세금 전을 기준으로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러니 교우님이 감사와 기쁨으로 드린다면 세금전인지, 후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갑자기 막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세금 전인지, 후인지 따져서 드리겠다는 제가 너무 부끄러워요. 주님은 제게 생명을 주셨는데 저는 십일조도 기쁘게 못 드려요.’ ‘주님께서 그 마음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얼마를 드리든 기쁘게 드리세요.’
얼마를 드리면 됩니까? 이 질문은 여전히 헌금을 의무로 여기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혹은 내가 구원받은 신자임을 증명하려면 얼마까지 드려야 합니까? 여전히 헌금을 의무나 조건, 책임으로 여기는 마음이요, 최소한으로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것은 헌금이 아니라 회비입니다. 우리가 얼마를 드리느냐는 우리의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우편 강도는 십일조는커녕 주정헌금 1불도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에게 낙원을 약속받았습니다. 구원은 십일조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헌금은 감사요, 사랑이요, 헌신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아내에게 월급의 십일조를 드리면 결혼해 주겠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당신과 함께 행복하기 위해 내 모든 수입을 드릴게요. 순결한 성도는 신랑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살아가기 위해 모든 것을 기쁨으로 드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큰 사랑을 받은 성도입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진정한 신랑입니까? 하나님이 진정으로 여러분의 주님이십니까? 여러분의 지갑은 회개하였습니까?
뉴저지 새로운개혁교회 https://saerou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