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3-15/빚진 자의 행복
050216 주일설교
1. 빚진 사람
저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간혹 뉴스에서 학생들을 가혹한 체벌을 한 교사이야기가 나오면 저도 모르게 두 손이 얼굴을 가리고 한숨이 나옵니다. 순간 마음이 무척 무겁습니다. 대학시절 과외교사를 할 때 학생의 거짓말을 바로 잡는답시고 제가 체벌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음 주에 갔더니 아이가 매맞은 다리에 근육이 상했다며 깁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제가 어리고 철이 없었고 사회에서도 체벌에 대한 경각심이 없어서 부끄럽지만 제가 뭘 잘못 했는지 몰랐습니다. 요즘 같으면 폭력으로 고소를 당하고도 남을 일이었습니다.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자책하며 그 아이와 가족에게 가닿지도 않는 용서를 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는 제가 어리석고 무지해 저지른 많은 잘못 중 하나일 뿐입니다. 만약 그 많은 잘못을 주님이 다 책망하셨다면, 저를 둘러싼 이웃과 사회가 다 알고 저를 정죄했다면 저는 아마 목사는커녕 이 자리에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 서지도 못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저에게 무례하거나 해를 입히거나 할 때면 그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재작년 어떤 이들이 저를 비난하고 공격할 때 돌아서면 늘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이 이것이었습니다. ’나도 이 많은 허물을 용서받았는데 저 사람도 용서받을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기로 마음 먹고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마 18:32) 그래서 왕이 그 종을 불러 말하였다. ‘네 이놈, 네가 간청하기에 모든 빚을 면제해 주지 않았느냐? (마 18:33) 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성도가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주님으로부터 이미 갚을 수 없는 은혜의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죄의 빚을 다 면제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갈까요?
2. 바울이 진 은혜의 빚
오늘 본문 14절은 이 진리를 깨닫고 살아가는 거듭난 성도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롬 1:14)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채무자 곧 빚진 자라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빚을 졌습니까? 바울의 젊은 시절로 가봅시다. 그는 무지와 오만으로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행 22:4) 나는 이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묶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가 살인했다는 말은 아마도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바울 곧 옛이름 사울은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행 7:58) 스데반을 성 바깥으로 끌어내서 돌로 쳤다.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사울이 의로운 이 스데반을 돌로 치는 증인들의 옷을 맡았다는 사실은 스데반 살인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데 사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이후 사울은 앞장 서서 교회를 박해합니다.
(행 8:3) … 사울은 교회를 없애려고 날뛰었다. 그는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겼다.
벌어지는 일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재판했던 산헤드린공의회 하의 어떤 공직을 맡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행 9: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행 9:2)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행 9:5)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제서야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과 그 교회를 박해하는 죄악을 저지른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거듭납니다. 바울은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을 모욕하고 그 교회를 박해한 씻을 수 없는 죄악을 그 분의 보혈을 통해 용서받았습니다. 그는 아무 대가도 없이 무서운 죄를 씻김받은 은혜의 빚을 예수님께 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죄사함의 확신을 얻은 이는 그 누구나 바울처럼 이런 은혜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3. 모든 이가 진 생명의 빚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사도 바울같은 기독교인만 빚진 자가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땅의 생명가진 존재치고 창조주께 빚지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창세기는 세상만물을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이 진리를 요한복음은 이렇게 다시 선포합니다.
(요 1: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요 1: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그 누구도 창조주에게 존재의 빚을 지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태어나기 위해 어떤 결정을 하거나 노력을 하거나 자격을 갖춘 이가 있습니다. 눈떠보니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였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것도 사실 다 빚입니다.
(마 5:45) … 하나님은 해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에게 다 같이 비치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 비를 똑같이 내려 주신다.
해와 비로 대표되는 이 땅의 모든 생존과 복지에 필요한 것이 다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 덕분입니다. 즉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생명과 복지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해 없이 살 수 있는 이가 없고 비 없이 먹을 수 있는 이가 없습니다. 공기 없이 숨쉴 수 있는 이가 없고 땅 없이 살아갈 터전이 없습니다. 이 모두를 거저 얻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노력으로 살고 성공하고 누린다고 생각하는 이들만큼 어리석고 오만한 이가 없습니다. 먹고 입고 자고 일하고 가족과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 전체가 거저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빚입니다.
기독교인이 입은 십자가의 은혜를 기독교신학에서는 특별은총이라고 부르고, 모든 사람이 입는 생존과 복지의 은혜를 일반은총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은총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인데,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값을 지불한 특별은총은 더더욱 감당이 힘든 은혜의 빚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을 모두 입은 이들입니다. 일반은총만 입은 이들의 두 배의 은총이 아니라 천 배, 만 배의 은총을 입은 이들입니다. 어느 대중가요를 듣다가 정말 진리에 가까운 가사를 들었습니다. 가수 임재범씨가 부른 ‘너를 위해’의 한 대목입니다. ’나는 매일 네게 갚지도 못 할 만큼 많은 빚을 지고 있어…‘
거의 진리에 가까운 가사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갚지도 못 할 만큼 많은 사랑과 은혜의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매일매일 그 빚이 쌓여갑니다. 그 빚을 갚으며 살아가는 사람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4. 은혜의 빚을 갚는 삶
그럼 성도는 어떻게 그 빚을 갚을 수 있습니까? 첫째는 끝없는 감사로 갚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가 진 빚을 깨달으면 매일매일 우리 입술에서 감사가 끊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과 시련을 주실 때는 어떻게 감사합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시련이 아무리 커보여도 하나님께 날마다 누리는 속죄와 생명의 은혜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고난이 더 커보이는 착시는 생명과 복은 당연하게 여기고 고난은 이상하게 여기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죄악을 생각한다면 고난이야말로 당연하고 생명과 복이야말로 놀랍고 충격적인 것입니다. 욥의 고백입니다.
(욥 2:10) …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최근에 제가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예전에 저를 괴롭힌 이들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는데 요즘은 그들에게 정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제가 새로운개혁교회를 섬기고 여러분과 함께 이토록 행복한 예배와 봉사를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저를 괴롭혀 주어서 고맙다고 하고 싶습니다.
둘째는 용서로 갚습니다. 우리가 진 가장 큰 빚은 죄사함의 은혜입니다. 거저 사함받았으니 하나님의 사랑에 고스란히 은혜의 빚을 졌습니다. 그 빚을 갚는 방법은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제자가 빚을 갚는 방식임을 가르치셨습니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해 주소서.
셋째는 베풂으로 갚습니다. 우리는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풍요롭게 삽니다. 거저 누리는 은혜입니다. 생명에 더해 누리는 이 복지를 우리는 이웃과 나눌 때에 조금이라도 빚을 갚는 것입니다.
(마 10:8) …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넷째는 복음으로 갚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갚는 길은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빚을 졌고 그 빚을 갚기 위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롬 1:15)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이 모든 방법으로 주님께 진 사랑의 빚을 갚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늘 감사하고 자신이 박해한 이들을 생각하며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용서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며 만나는 이들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진 에드워드가 쓴 소설 ‘이야기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행전 13장에서 바나바가 사울을 다소에서 데려와 안디옥교회에 소개하는 장면이 이렇게 묘사됩니다. 소식을 들은 안디옥교인들은 술렁였습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온 사울을 경계하거나 적개심을 드러내고 어떤 이는 소리쳤습니다. ‘바나바님, 저 사람 사울이 우리 아버지를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저런 사람을 어떻게 우리 공동체에 받아들입니까? 저 사람이 우리를 모두 잡아가려고 회심한 척 연기하는 것이면 어떻합니까?’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를 들으며 사울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일어나 사울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겉옷을 벗겼습니다. 사울의 등에는 찢어졌다가 피딱지가 앉아 아물어 생긴 수많은 채찍자국이 남아있었습니다. ‘우리 형제 사울이 과거에 그런 사람이었던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그를 구원하셨고 그는 자신이 박해한 성도들처럼 그 자신도 주님을 위해 사십에 한 대 감한 매를 여러 차례 맞으면 고난을 기꺼이 당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우리도 사울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순간 성도들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숙연해졌고 그들은 모두 자신들을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울을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의 빚을 진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사울은 받아들여 사도 바울로 성장하게 해주었고,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은혜의 빚을 진 사도 바울은 그의 생애를 복음으로 빚을 갚는 데 기꺼이 드렸습니다.
성도는 마땅히 은혜의 빚을 갚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든 삶은 그러므로 당연히 빚갚는 삶입니다. 빚 갚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결코 자랑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씁니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고난 중에 감사하더라도 믿음이 좋다 자랑할 일이 아니며, 원수를 용서하라도 너그럽다 자랑할 일이 아니며, 이웃에게 베풀더라도 사랑이 많다 자랑할 일이 아니며, 복음을 전하더라도 신실하다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빚진 우리에겐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큰 빚을 졌습니까? 그 빚을 어떻게 갚고 있습니까? 우리 삶이 조금이라도 더 그 빚을 갚으며 주님을 닮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