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13:5/절제하는 말의 아름다움
250309 주일설교
1. 마음과 말투
지난 수요일에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애초에 오늘부터 사순절에 해당하는 본문을 설교할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지난 주에 시작한 말에 관한 시리즈설교를 한 주는 더 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오늘까지 이어서 하겠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아름다운 말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마음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마음은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바로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입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신도 모르게 숨겨진 아름답지 않은 모든 생각은 반드시 말에 묻어나와서 사람을 아프게 합니다. 아름다운 말을 하려는 성도는 마음이 주님처럼 변화되기를 기도하고 구해야 합니다. 마음이 변화되지 않은 채 말투를 바꾸어 좋은 인상을 주려는 모든 시도는 마치 포장지만 고급스럽게 바꾸어 쓰레기를 포장하는 것처럼 미련한 짓입니다.
그 다음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말투를 바꾸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확인했듯이, 사람을 아프게 하는 말은 독사에게 물리는 것과 같습니다. 뱀의 이빨과 독이 모두 사람을 해치는 것처럼 말의 의도 뿐 아니라 말투도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말투가 여전히 나쁘면 의도치 않은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말투는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요? 그래서 누가 봐도 말을 아름답게 잘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오늘은 딱 세 가지만 살펴봅니다.
2. 절제하라
첫째, 말을 정말 잘 하는, 말을 아름답게 하는, 한 마디 말로 천 냥 빚을 갚은 최고의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침묵입니다. 말을 가능한 적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말을 잘 하는 법입니까? 오늘 본문이 가르쳐 줍니다. 욥은 고난당한 그를 찾아와 훈계와 처방을 늘어놓는 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욥 13:5)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그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왜 일어났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온갖 아이디어를 내놓는데 하나같이 이미 고통스러운 욥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난도질하는 말들이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신이 문제를 가장 잘 안다는 교만, 자신이 친구를 가르칠 자격이 있다는 허영,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싶은 허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기 후반부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꾸짖으셨습니다.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유익한 이유는 말을 많이 하면 변화되지 못 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더러운 것이 묻어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비평가 토마스 칼라일은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 하였습니다. 말을 아무리 잘 해도 침묵하는 것만 못 하다는 뜻입니다. 전도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침묵할 필요가 있다고 하십니다.
(전 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이 말씀은 함부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장담하지 말고 잠잠히 그 분의 말씀을 들으라는 의미입니다. 이 침묵은 사람 앞에서도 마찬가지로 유익합니다. 야고보서입니다.
(약 1:19)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속히 하고 말은 천천히 하며 함부로 성내지 마십시오. (약 1:20) 인간적인 분노는 하나님의 의로운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화가 왜 나는가? 남의 말은 잘 안 듣고 자기 말만 너무 빨리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들으면 화낼 일이 잘 없습니다. 여기 말을 가장 잘 하는 방법과 가장 못 하는 방법이 동시에 나옵니다. 가장 말을 잘 하는 법이 침묵이요, 가장 말을 못 하는 법이 화내는 것입니다. 일단 화를 내면 그 사람의 말은 진실함도 권위도 호의도 모두 잃습니다. 우리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고 화낼 일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부터 이 훈련을 시작해 보십시오. 말을 줄이는 훈련입니다. 어떤 말이든 하기 전에 잠깐 멈추십시오. 그리고 이 말씀을 마음에 암송하십시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천천히 하고 화내기는 아예 말자.’ 말을 줄이고 잘 들으면 화 낼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 반대로 하기에 화낼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3. 축복하라
두 번째 아름답게 말하는 법입니다. ‘축복하라’입니다. 로마서 12:15 전반부입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
즐거워하는 자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합니까? 함께 즐거워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저절로 잘 안 됩니다. 우리 마음에 가득한 독이 잘못된 말을 하게 만듭니다.
여기 자녀가 아이비리그에 입학했다며 즐거워하는 이가 있습니다. 함께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한국애들은 용케 아이비리그 입학해도 졸업하기가 그렇게 어렵대. 뭣하러 그 어려운 데를 가? 나는 일부러 안 보냈어. 시기하는 말입니다. 사립학교 등록금이 얼만데, 괜찮겠어? 쓸데없는 오지랍입니다. 한 푼 보태줄 것도 아니면서… 아이비리그 보낼려고 애를 얼마나 닥달했어, 너무 고액과외 시킨 것 아니야? 알지도 못 하면서, 정죄입니다. 요즘 아비리리그 자살하는 애들이 그렇게 많다네. 거의 저주입니다. 이런 식의 말투가 얼마나 많은지요.
성도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정말 잘 됐네. 걔는 그럴 줄 알았어. 어릴 때부터 영특했잖아, 잘 될 거야.’ 함께 즐거워하고 수고를 인정하고 축복해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런 축복이 저절로 잘 안 나옵니다. 마음에 시기와 교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남이 잘 되는 것에 함께 즐거워하기가 어렵습니다. 의도적으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도록 연습하고 동시에 예수님처럼 겸손한 마음을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4. 공감하라
세 번째 아름답게 말하는 법입니다. ‘공감하라’입니다. 다시 롬 12:15의 후반부입니다.
(롬 12:15) …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우는 자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합니까? 함께 우는 말 즉 슬픔과 고통에 공감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도 저절로 잘 안 됩니다. 우리 마음에 가득한 독이 잘못된 말을 하게 만듭니다.
여기 동업자에게 배신당해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잘못을 많이 저지릅니까? 그러게 내가 조심하랬잖아, 검은 머리는 믿는 게 아니라고 몇 번 말했어? 훈계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친구한테 배신을 당하냐? 그러게 좀 잘 하지. 정죄입니다. 나는 수십 년을 비지니스 하면서 한 번도 배신을 당해 본 적이 없어, 사람들에게 잘 해서 그런가? 자기자랑입니다. 그 친구만 원망하지 말고 자네도 뭔가 잘 못한 것 없는지 한 번 생각해 봐. 그것 못 고치면 자네 또 배신당해. 저주입니다.
왜 이런 독한 말을 쏟아놓습니까? 우리 본성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독일속담에도 ‘남의 불행만큼 큰 행복은 없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보다 잘 되는 사람을 축복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공인이나 연예인, 스타들이 작은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온갖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를 쏟아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는데, 죄가 큰 자일수록 더 길길이 날뛰며 저주의 돌맹이를 던집니다. 이런 저주에 못 견딘 이들이 종종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일을 뉴스로 듣지 않습니까!
주님은 우는 자들과 함께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실수하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고통받는 이들을 볼 때 마땅히 주님의 마음을 가진 이는 함께 아파하고 울고 위로합니다. ‘아이고, 정말 마음이 아프네. 자네 정말 힘들겠네. 그런 일을 당하면 나는 정말 못 견뎠을 거야. 어떻게 견뎌내나. 너무 걱정말게.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야. 다시 일어서도록 주님이 도와주실 거야. 나도 돕겠네.’ 공감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말입니다.
5. 공감하시는 주님
그렇다면 악한 본성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진심으로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웃의 경사에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습니까? 먼저는 이런 공감과 축복의 말을 입으로 연습해야 합니다. 연습하면 분명 발전이 있습니다. 저도 운전 중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차를 보고 나쁜 말을 할까봐 이런 연습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어허, 이 아저씨 바쁜 모양이네. 먼저 가세요.’ 혼자서 연습하고 난폭운전하는 차를 만날 때마다 그렇게 실습해 봅니다. 이제는 자동으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연습한다는 말이 불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생긴대로 살다 가는 거지, 이 나이에 내가 굳이 말투까지 연습하면서 살아야 해? 그건 내가 아니잖아, 내 모습 그대로 사는 게 진실한 거지.’ 자신의 악한 본성과 무례한 말투와 무지한 생각을 다 보여주는 것이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자신의 연약함을 잘 제어하는 것이 배려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살려면 잠옷만 있고 머리도 감지 말고 맨얼굴로 교회 오지 왜 씻고 머리 다듬고 깨끗한 옷을 입고 오십니까? 직장에는 왜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가십니까? 이웃을 위한 배려 아닌가요? 배려 중 가장 큰 배려가 바로 말투의 배려입니다.
우리가 한국말을 배운 것도 아기 때 엄마, 아빠의 말투를 보고 따라 연습한 결과입니다. 지금 영어를 배우는 것도 잘 지켜보고 이럴 때 이렇게 말하는구나, 배우고 연습한 결과입니다. 축복의 말, 공감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있을 때 연습해 보세요. 분명 발전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좀 더 근본적인 대책으로 지난 주에 배운 바와 같이 공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1:33) 예수님은 마리아가 울고 또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몹시 안타까와하시며 … (요 11:35)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은 제자이자 친구인 나사로의 죽음과 그 누이들의 슬픔을 보시며 공감하셨고 우셨습니다. 긍휼이 많은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긍휼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품을 때 진심으로 형제자매를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형제자매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찬을 받았던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시 141:3)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여러분의 입술이 다윗의 그것처럼 절제와 축복과 공감의 아름다운 말로 가득 차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