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6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의로운 사람의 말”(잠언 15:28) – 김도완 목사

3월 15, 2025

Series: 주일예배

Book: 잠언

잠 15:28/의로운 사람의 말

250316 주일설교

1. 무례한 말을 들을 

3주째 말에 관한 시리즈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무례한 말을 들었을 때 대답하는 법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여러분이 열심히 일했는데 동료나 고객이 이런 무례한 말을 했다고 칩시다. ‘아이고, 이걸 일이라고 했어요? 돈 받고 일하면서 이러면 안 되지. 내가 해도 이것보단 낫겠다. 여긴 개나소나 다 일시키나 보네.’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대부분 뚜껑이 확 열려버리지 않겠습니까? ‘이, 18 boys야, dog baby야, 네가 뭘 안다고 콩놔라, 팥놔라야? 그렇게 잘 하면 네가 해, 네가. 이것보다 못 하기만 해 봐, 스톤으로 헤드를 디바이드시켜 버릴 테니까.’ 아니면 ‘그래요, 나는 바보천치예요. 나 같은 건 죽어버려야 해.’ 그러시겠습니까? 이도저도 말 못하고 부글부글 끓기만 합니까? 어느 경우든 씻기 힘든 상처를 남깁니다. 관계는 파탄납니다. 공동체와 세상은 더욱 마귀의 소원대로 병들어 갑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무례한 말을 듣고도 상처받지 않고 전쟁을 치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치유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치유와 구원의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잠언 15장입니다.

(잠 15:1)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혀도 과격한 대답은 분노를 일으킨다.

무례한 말을 치유하는 것은 부드러운 대답입니다. 과격한 대답은 더 큰 무례와 다툼을 불러옵니다. 그런데 무례한 말이 순간적으로 상처와 분노를 일으키는데 어떻게 부드럽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그 답도 잠언 15장이 가르쳐 줍니다.

(잠 15:28) 의로운 사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은 악한 말을 마구 내뱉는다.

무례한 말을 듣는 순간 우리의 본성은 더욱 무례한 말로 되갚아 자신이 받은 것보다 더 큰 상처를 상대에게 남기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더 무례한 말을 마구 내뱉습니다. 그런데 잠언은 이를 악인의 언어습관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의로운 사람 성도는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합니다. 그 순간 어떻게 깊이 생각할 수 있습니까? 좋은 방법은 최대한 빨리 그리고 정중하게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화가 나 얼굴이 붉어진 상태에서 깊은 생각이 안 됩니다. 무례한 말에 대꾸하지 말고 그 자리를 빨리 그리고 조용히 벗어나야 비로소 깊이 생각할 시간이 생깁니다. 이 시간이 성도의 묵상과 기도의 시간입니다.

2. 깊이 생각하라

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깊이 생각하는 것일까요? 먼저 최악의 소설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타고난 재능이 있는데 할 수 있는 한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능력입니다. 저 인간은 원래 날 우습게 보고 있었을 거야, 날 얼마나 무시하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내가 좀 더 부자였다면 저 인간이 저렇게 날 무시했을까, 내일 만나면 이렇게 되갚아 줘야지, 그러면 저 인간이 이렇게 날 공격하겠지, 틀림없이 이사람, 저사람에게도 내 욕을 할 거야, 그러면 나는 이사람, 저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해야겠지, 그런데 저 인간이 더 교활하니까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나를 직장에서 잘리게 만들거야, 그러면 나는 홈리스가 되겠지, 그러면 내가 저 인간 집에 가서 일인시위를 해서 온 동네 창피해서 못 살게 만들어야겠다, 그러면 저 인간이 나를 고소하겠지, 그 쯤 되면 나도 너죽고 나죽자로 나가야지, 그 때를 대비해서 총 한 자루는 사둬야겠다…

왜 이러는 걸까요? 우리 마음에 가득한 부정적 신념때문입니다. 낮은 자존감, 패배의식, 실패의 두려움 등이 뒤섞여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하고 존중할 리 없다고 굳게 믿습니다. 무시하고 미워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이 부정적 신념이 단단한 만큼 우리의 부정적 상상은 더 최악의 상태를 그려내고 작은 상처를 크게 키우고 실제 상황도 그렇게 바꾸고야 맙니다. 마태복음 9장입니다.

(마 9:29) …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

제가 청년부 목사로 섬기던 시절에 새가족으로 등록한 철수라는 친구에게 환영문자를 보내면서 웃는 이모티콘을 붙여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답이 오기를, ‘목사님, 절 몇 번이나 봤다고 비웃는 겁니까? 제가 그렇게 만만합니까?’라는 것입니다. 그 친구 어머니와 상담을 했는데 아들이 우울증에 대인기피증, 분노조절장애까지 앓고 있었습니다. 부정적 신념의 끝판왕이었기에 환영의 미소도 비웃음으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 철수가 없나요? 많습니다. 얼마나 어이없는 부정적 해석을 부정적 신념으로부터 끌어내어서 기어이 최악의 현실로 만들고 급기야 관계를 최악으로 끌고가는지 모릅니다.

3. 최선으로 해석하라

그러므로 부정적 신념을 버리고 최선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차피 그의 의도나 앞으로 벌어질 일은 모두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긍정적이고 좋은 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해석이 곧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4장입니다.

(민 14:28) “…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믿음입니까? 저 사람이 나쁜 의도로 그런 말을 했을리 없어. 그럼 왜 그랬을까? 어쩌면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지도 몰라, 아니면 저 사람이 어릴 때부터 저런 언어습관을 가진 가정에서 자라서 저런 말투가 버릇이 된 것인지도 몰라, 어쩌면 경제적 스트레스 때문에 어제 밤을 새고 오늘도 제 정신이 아닌 채 출근한 것인지도 몰라, 아니면 저 무례함이 절박하게 도와달라고 외치는 소리인지도 몰라… 긍정적으로 상황을 해석해야 합니다.

이 묵상과 더불어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께 상황을 잘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의 약점과 문제를 긍휼이 여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이 지혜와 긍휼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과 깊은 기도를 통해 더 큰 지혜와 긍휼을 받을수록 더 무례한 이를 잘 이해하고 더 긍휼이 여길 힘이 나옵니다. 우리 선조들의 옛말에도 인심은 곳간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곳간에 쌀이 그득히 차있어야 구걸하러 오는 사람들도 불쌍히 여길 마음이 생기고 한 됫박이라도 걱정없이 퍼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곳간이 텅텅 비어 내 배도 곪고 있으면 걸인이 오는 것도 짜증나고 화가 나서 받아주기 어렵습니다.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우리 영혼의 곳간에 그득히 채워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지혜의 곳간이 가득 차면 이해가 잘 됩니다. 은혜의 곳간이 가득 차면 긍휼이 보입니다. 깊이 생각하여 이해와 긍휼을 얻었다면 우리의 마음은 상당히 치유되었습니다. 완전한 치유를 얻으려면 무례한 말을 한 이의 마음도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는 상처를 준 사람인데 무슨 치유가 필요합니까? 무례한 말은 손잡이 없는 면도날과 같습니다. 그런 날카로운 면도날을 손에 쥐고 휘두르면 휘두르는 사람의 손도 만신창이가 됩니다. 무례한 말, 욕설, 저주의 말은 모두 독입니다. 이 독을 뿜으려면 그 자신도 독을 품고 있어야 하고 그러면 그의 영혼도 중독되어 이미 병들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도 치유할 수 있습니까?

4. 부드럽게 말하라

그 방법이 잠언 15장이 말한 부드러운 대답인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나전달법’입니다. 이는 우리가 늘 사용하는 ‘너비난법’과 정반대의 말하는 방식입니다. 너비난법은 상대를 주어로 삼아 비난하는 방식의 말하기입니다. “너는 늘 그런 식이야. 너는 왜 말투가 그래? 너 나를 무시하는 거냐? 너는 인간성이 글러 먹었어. 널 위해서 하는 말인데, 그렇게 살지 마.” 이런 대답은 상대를 공격하는 말입니다. 이런 대답을 들으면 상대는 방어적이 되어서 자신을 변호하고 더 과격한 너비난법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이런 말투를 ‘나전달법’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주어를 나로 바꾸고 상대의 언행으로 받은 상처를 알려주는 방식입니다. ‘나는 네가 이렇게 말했을 때 무척 섭섭하고 상처를 받았어.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속이 상해.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 같아서 사실 미안했는데 네 말을 듣고 나니 수치심까지 생겼어.’ 나전달법은 어떤 효과가 있습니까? 상대를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언행으로 우리가 겪은 고통을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자신의 언행이 상대에게 어떤 상처와 고통을 주었는지 이해하면 십중팔구는 자신이 무례했음을 이해하고 사과하거나 관계를 개선시키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도 자신을 돌아보고 화를 가라앉히고 자신이 상처나 문제를 직시하게 되고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물론 열에 한둘은 여전히 자신의 문제를 깨닫지 못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이 교훈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때까지는 그들이 휘두르는 칼날에 더 이상 상처입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잠언 15장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잠 15:1)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혀도 과격한 대답은 분노를 일으킨다.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무례한 말을 주고받는 사회에서 살아오며 자신도 모르게 무례하게 말하도록 훈련받아왔습니다. 존중하고 인정하고 칭찬하고 이해하기보다 무시하고 비난하고 훈계하고 정죄하는 데 더 익숙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반대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 훈련을 하면 어떻게 대화를 풀어나갈 수 있는지 짧은 영상을 하나 보시겠습니다. 주인공은 어린 자매입니다. 동생이 언니에게 뭔가를 도와달라고 했는데 언니가 거절하자 아마 동생이 화를 냈나 봅니다. 그러자 언니가 동생을 차분히 진정시키고 화를 가라앉히는 장면입니다. <영상>

이 아이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아이들에게 있는 사랑과 지혜를 하나님의 자녀인 거룩한 성도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면 너무 부끄럽지 않을까요!

5. 주님처럼 온유하라

예수님은 당신을 모욕하고 정죄하는 이들의 악한 말에도 과격한 대답을 하기보다 침묵을 택하셨습니다.

(막 14:61) 그래도 예수님이 침묵을 지키시고 대답을 하시지 않자 대제사장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하고 다시 물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와 같습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면서도 침묵을 지켰으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

의인은 그리스도와 같이 깊이 생각하고 부드럽게 대답하여 분노와 악한 말을 쏟아놓는 대신 지혜와 긍휼로 의와 평화를 이룹니다. 여러분 영혼의 곳간에 그리스도의 지혜와 긍휼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