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3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눈을 떠 보니, 레아가 아닌가!”(창세기 29:16-25) – 노승환 목사

3월 23, 2025

Series: 주일예배

Book: 창세기

눈을 떠 보니, 레아가 아닌가!
창 29:16-25

하루는 야곱에게 참 황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건 뭐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이런 프로그램에 나올 만한 일입니다.

아침에 깨어 눈을 떠 보니 옆에 자고 있는 사람이 라헬이 아니고 레아였던 것입니다.
방금 읽은 본문 말씀 25절에 그렇게 되어있지요?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공동번역 성경은 “아침이 되어 야곱이 눈을 떠보니 어이없게도 그것은 레아였다!”고 했고요, 새번역은 야곱이 눈을 떠 보니, 레아가 아닌가!로 번역했습니다.
“레아가 아닌가 느낌표”까지 꽉 찍어 놨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새번역에서 따왔습니다.

하여간, 이 부분을 저보고 번역하라면 저는 눈을 떠 보니, 레아가 아닌가! 헐! 이렇게 한 글자를 더 넣겠습니다.

King James 영어 성경도 재밌어요…Behold, it was Leah! 그랬다고요.
어떤 분위기인지 아시겠지요?

야곱 집안의 이야기는 주일학교 좋은데 나오셨으면 잘 아시는 이야기일 겁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의 장자권을 가로챕니다. 그러자 형 에서가 야곱을 죽이겠다 하니 야곱이 도망을 가게 되지요.

도망가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있게 되는데 외삼촌 라반에게는 딸이 둘이 있었습니다.
언니가 레아고 아우가 라헬입니다.
18절에 보시면 야곱은 이 둘 중에 누구를 더 사랑했다고요?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외삼촌에게 삼촌, 라헬을 저에게 주십시오. 제가 삼촌 집에서 칠 년을 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라반이 그래, 뭐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는 자네한테 주는 게 낫지, 하면서 그러겠다고 약속을 하고 20절에 보시면 야곱이 라헬을 위해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니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그랬습니다.

정말 로맨틱하지 않습니까?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위해 7년이란 세월을 며칠 같이 여기며 남의 집에서 종노릇 하는 이 달콤한 연애 이야기는 이삭이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났던 이야기와 더불어 성경에 기록된 로맨스 스토리 top five 안에 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런데 야곱이 레아에게가 아니고 라헬에게 반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입니다.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하고 이어지는 18절에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이렇게 되어있지요?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이게 번역상 약간 어려운 부분이 있는 구절입니다.
저희가 예전에 사용하던 한글 개역 성경에는 17절을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안력이 부족하다, 시력이 약하다 이게 무슨 뜻일까?

어떤 분들은 이 말이 레아가 눈이 나빠서 안경을 썼어야 했다 뭐 이렇게 이해하시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레아의 눈에 총기가 없었다, 눈이 흐리멍덩했다? 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력이 부족하다, 시력이 약하다로 번역된 이 표현을 여러 영어 성경 번역들을 보시면 레아가 weak eyes..약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또 다른 번역들은 tender eyes…부드러운 눈, delicate eyes, 섬세한 혹은 우아한 눈, lovely eyes….사랑스러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들 번역해 놓았습니다.

한글 성경들도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은 둘 다 이 구절을 레아는 눈매가 부드럽고….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다…해서 부드럽다로 번역했습니다.
들리는 뉘앙스가 상당히 다르지요?

안력이 부족하다, 시력이 약하다…이런 표현들과 눈매가 부드러웠다, 눈이 곱다…완전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창세기 기자가 이 표현으로 과연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냐?
레아와 라헬의 대조입니다.
히브리인의 개념에서 눈은 사람 내면의 상징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순전하면…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구약에서도 눈이라는 단어는 마음이란 단어와 바꿔 사용해도 될 만큼 마음, 내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다, 이런 표현들 들어보셨지요?

레아의 눈은 깨질 것 같이 약하지만 부드럽고, 곱고 섬세하고 아름다웠다…이 말은 레아의 마음, 그 내면이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레아의 내면의 아름다움과 대비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헬의 아름다운 겉모습이지요.
NIV 성경입니다. Leah had weak eyes, but Rachel was lovely in form, and beautiful.
레아는 내면이 곱고 섬세했다. 그러나 라헬은 lovely in form…겉모습이, 외모가 아름다웠고 예뻤다. form, 폼만 이뻤다는 거지요.

그럼 라헬의 성격은 어떠했을까?
30장 1-2절 보세요. 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라헬은 자기와 야곱 사이에 아이가 없으므로, 언니를 시새우며, 야곱에게 말하였다. “나도 아이 좀 낳게 해주셔요. 그렇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어요.”
야곱이 라헬에게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내가 하나님이라도 된단 말이오? 당신이 임신할 수 없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뭐 긴 설명 안 하겠습니다. 대충 아시겠지요? 뭐 좀 틀어지면 콱, 죽어 버리겠어요…하고 토라지는…엄청 바가지 긁는..그런…

네, 내면의 아름다움보다 겉모습만 중요시하는 외모지상주의가 몇천 년 전에는 없었을 것 같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몇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인간은 죄인이고, 여전히 인간은 본질적으로 부패해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에게 마음이 끌렸던 이유….일단 외모가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피 끓는 젊은 야곱인데 어찌하겠습니까?
얼굴 짱, 몸매 짱인 라헬이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가 야곱의 때와 그리 큰 변화가 없습니다.

결혼 적령기의 처녀들이 자기들끼리 모이면 남자를 4단계로 구분한다고 하지요?
1위…키도 커…
2위…키는 커…
3위…키만 작아…
4위…키도 작아…

저는 4위가 분명한데….

이 용모와 키와 돈은 얼마나 가지고 있나, 학력은 어떻게 되나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것을 더 중요시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은 야곱의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이 지금 라헬과 레아를 통해 외모지상주의는 안 좋다…사람이 내면에 충실해야 한다..단순히 그 수준의 메시지를 주고자 함은 아닙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해서 7년 그리고 그 후 다시 또 7년 해서 14년을 라반을 섬기면서까지 라헬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 의미하는 것과 레아라는 인물이 야곱의 삶 가운데 상징해 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 추적해 보아야 눈을 떠 보니, 레아가 아닌가! 이 말이 우리에게 가지는 진정한 영적 의미를 캐낼 수 있는 것입니다.

레아의 눈이 부드러웠다..내면이 아름다웠다 했습니다. 성경에서 내면이 아름답다는 것은 당연히 신앙과 연결돼 있습니다.

얼굴 이쁘고 몸매 끝내주는 라헬만 사랑하고 레아는 별로 사랑하지 않아서 레아는 가뭄에 콩 나듯 야곱과 잠자리를 하는데 신기하게도 같이 잠자리만 가지면 아들이 생깁니다.
반면에 라헬은 한동안 별의별 노력을 다해도 아들을 못 낳지요.

레아는 아들을 낳을 때마다 그 이름에 자신의 소망과 기도 제목을 담았습니다.
루우벤,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시므온을 낳고는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시고,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내게 아들을 또 주셨다.
레위 낳고는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그랬습니다. 항상 그래도 믿음 안에서 신앙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 소망을 가지려 노력했습니다.
결국에는 유다를 낳고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이 찬송입니다.
찬송이라고 아들 이름을 짓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합니다.

계속 레아는 믿음의 고백을 하고, 모든 상황을 하나님과 연관 지어서 이해하고 기도하는 자세를 버리지 않습니다.
결국 믿음으로 살다가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 찬송합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레아입니다.

물론 레아의 이런 신앙은 하나님의 먼저 택하심과 은혜 주심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49장 29절부터 보시면 야곱이 죽기 전에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네, 결국에 야곱은 누구 곁에 누워 잠듭니까?
레아지요.

그러니까 결국에는 누가 야곱의 본처로 인정을 받았다는 걸까요?
레아입니다.

야곱은 궁극적으론 레아를 선택합니다.
하나님 역시 레아의 아들인 유다를 통해서 다윗이 나게 하시고 그 혈통을 통해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복된 혈통이 레아에게서 난 것입니다.
물론 라헬도 요셉을 낳고 하나님께서 서운하지 않게 대해주십니다.

하지만 에서가 아니고 야곱을 택하셨고, 이스마엘이 아니고 이삭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어가시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야곱의 삶 가운데 라헬이 상징하는 것은 보이는 것, 화려한 외적인 것에 치중하는 삶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돈 잘 벌고, 남 부럽지 않게 살고…적어도 겉으로는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살만한 삶을 추구하는 삶. 그것을 위해 사람들은 7년, 7년 14년을…..7이란 숫자가 완전수인 것은 아시지요? 평생…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과 영적인 삶에는 별 관심 없고 라헬로 상징되는 외적인 아름다움만 기대하고, 소망하고 초점 삼아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대조해서 야곱의 삶 가운데 레아가 상징하는 것은…신앙 중심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주의 백성으로 때론 세상에서는 고통과 환란도 당하고, 믿음 지키기 위해 손해와 희생도 각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매력 없어 보입니다. 끌리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레아가 예뻤을까요? 아니라니까요.

갓난아이 처음 지인들에게 보여주면 사람들이 다 와, 예쁘다. 엄마 닮아서 역시…막 감탄들 하지요. 하지만 솔직한 사람은 그런다잖아요. 와…아기다!
레아를 보고는…와…마음씨가 착하시네요….내면이 참 선하시네요.
뭔 얘기에요?
일단 겉모습은 이쁘지 않았다는 겁니다.

화려하지도 않고 오히려 답답해 보이고, 촌스러워 보이고요.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이 보면 그래서 어떤 때는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요.
답답하기도 하고요, 이해가 잘 안 가는 거지요.

그런데요, 성도님들 무엇이 하나님의 은혜인지 아십니까?
아침에 보니 레아라!
눈을 떠 보니 레아가 아닌가! 헐!
이게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밤사이에 라헬을 레아로 바꿔치기해 주신 겁니다.
아니, 라반이 라헬을 레아로 바꿔치기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러한 꼼수도 얼마든지 이용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기대한 것은 라헬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깨어보니 레아입니다.
라헬을 기대했는데 옆에 누워있는 레아를 보니 좋을까요?
아니요…처음에는 싫습니다. 짜증이 납니다. 속은 느낌이 듭니다.

일단, 오늘 아침에 우리 성도님들은 눈을 떠 보니 옆에 주무시고 계시던 분이 그분이 맞으시던가요?
내가 결혼한 아내가 맞으시던가요?
내가 결혼한 남편이 맞으시던가요?
눈을 떠 보니, 내가 연애하고 그렇게 사랑했던 그 사람이 아니라 영 딴 사람이 누워있어 당황스럽고 충격 받으셨던 적 없으세요?
이상하다…있으실 텐데…

자기랑 결혼만 해주면 손에 물 안 묻히고 잘 살게 해주겠다.
결혼하면 이거 해주겠다, 저거 해주겠다….했는데….눈을 떠 보니 그렇게 약속한 그 사람이 아닌 거지요?
미국까지 끌고 와서 이 고생, 저 고생 다 시키는 이 사람은 분명 내가 연애하고 결혼한 그 사람이 아니지요.

결혼만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야곱이 7년 뼈 빠지게 라헬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일했는데 아침에 보니 레아였던 것처럼 미국 이민 와서 나의 라헬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뼈 빠지게 일했는데 이제 눈을 떠 보니 라헬이 아니라 내 옆에는 레아가 있는 것입니다.
라헬은 어디로 갔나? 어찌 레아가 내 옆에 있는가?

성도님들, 라헬을 기대하고 미국에 이민 오고, 유학하러 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얼마나 두근두근하셨어요? 조금만 더 고생하면 라헬과 잠자리를 가지게 되는 구나….
그런데 눈을 떠 보니 레아가 아닌가!

라헬을 기대하며 사업을 시작하시고, 라헬을 기대하며 학위를 시작하고, 라헬을 기대하고 결혼하고, 자녀들 키우면서 라헬을 기대하시지요?
이제 3년만 더 고생하자..내가 학위만 마치며……우리 아이 대학만 졸업하면….우리 아이 직장만 잡으면…이번 영주권만 나오면……그렇게 라헬을 기대하고 이민 와서 7년, 또 다시 7년 고생하고….이게 우리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모든 게 다 그렇게 내 기대대로 내가 소원한 대로 다 되던가요?
아닙니다.
늘 바라던 라헬이 옆자리에 누워있던가요?
아니요, 인생 살다 보니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모든 게 내 뜻대로 돼도 문제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적 바램과 꿈과 욕심이 다 이루어진다?

그럼 과연 우린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앉아들 있을까요?
때론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둔 사람이 세상에서는 막힘없이 잘 나가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시편 73편 시인 아삽은 이렇게 고백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내가 거의 넘어질 뻔했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했다고요.
악인인데 잘 먹고, 잘 살고 고난도, 재앙도 없이 살다가 죽을 때도 고통 없이 죽는답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신앙으로 살려고 애쓰던 시인은 시험에 들 뻔한 겁니다.
정의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과연 공평하신 분이십니까?
신앙의 회의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편 73편 17절에 뭐라 합니까?
여기 이 17절에서 시편 73편의 엄청난 반전이 생기거든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그들의 종말은 파멸이요 황폐함이라 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 택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인생에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자기 맘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 계획대로 알아서 살도록 가만두지 않으십니다.
그 인생에 어느 순간 눈을 떠 보니 레아가 아닌가의 경험을 통해서 더는 자기 맘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도록……더는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더 이상 자기 계획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살게 하시는 겁니다.
구원의 자리에 두시는 겁니다.

택함을 받은 야곱이기에 하나님께서 라헬을 기대했지만 깨어보니 레아가 아닌가? 하게 하시는 겁니다.
저와 우리 성도님들 삶 가운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깨어보니 레아가 옆에 있습니다.
이게 어떤 분에게는 사업의 망함으로, 어떤 분에게는 자녀가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는 것으로, 어떤 분에게는 몸이 병드는 것으로….등등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싫습니다. 속은 느낌이 듭니다. 짜증나지요.

제 인생에도 눈을 떠 보니 레아가 아닌가, 헐! 의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미국에 왔는데 아버지가 한국에서 은행을 다니셨습니다. 그러다 사기를 당하시고는 미국에 먼저 유학생 신분으로 오셨고 우리 가족은 1년 후에 유학생 동반가족으로 왔습니다. 가족이 오니까 먹고 살아야 하니 학교를 그만두셨습니다. 그러자 바로 불법체류자 신분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서류 미비자라고 하던데요. 그 신분으로 미국에서 한 15년을 살았습니다.

미국 중서부 wyoming 이란 주가 있습니다. 거기 한 도시에서 저희 부모님 평생 해보시지 않으셨던 중국 음식점을 인수하여 시작하셨습니다. 그때 요리사가 그 도시에 하나 있는 한인교회 장로님이셨는데 (그 교회에서 우리 가족 다 세례받음) 그분이 우리 가족이 불법체류 신분인 것을 알고는 이 가게 자신에게 내놓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민국에 고발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고스란히 그 식당 넘기고 하도 놀라고 상처받아 한국 사람 하나도 없는 더 시골, 소도시에 가서 한동안 살았던 경험을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 나름 pride 가 있으셨던 분이거든요. 다니시던 은행에서 최연소 지점장도 하셨고요.
왕년에 한국에서 잘 나가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그게 깨지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 바로 눈을 떠 보니 레아가 아닌가! 의 상황이지요.

한국 사람들 없는 그곳에서 어머니는 낮에 모텔 청소, 아버지 밤에 병원 청소하시며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다 동부 Maryland, Baltimore로 이사와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때 흑인 동네에서 grocery 가게를 시작하셨습니다.
무시무시한 곳이었습니다.
마약 장사들이 가게 안에 들어와서 장사하고 우리는 장총, 권총 들고도 방탄유리 안에 들어가 장사했던 그런 곳이었는데 어제 잠깐 말씀드린 대로, 저는 장남으로 부모님을 도와야 했기에 가족회의를 열어 고등학교를 휴학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이민 온지 4년 만에 4번 병원에 입원하셔야 할 정도로 약하셨거든요. 사람 쓸 형편은 안 되는데 아버지 혼자 가게를 운영하실 수는 없잖아요.

저로서는 참 억울했습니다.
제가 뭐 미국 가자고 한 것도 아니고 친구들은 다 대학 갈 준비하고 SAT 공부할 때 저는 그 방탄유리 안에 갇혀 있었던 겁니다.
어느 날 눈 떠보니 레아가 아닌가, 헐! 이지요.

너무 긴 간증이라 차차 기회가 있을 때 이어가겠지만 줄여서 말씀드리자면 교회 장로에게 그런 엄청난 일을 당하고 교회라면, 기독교인이라면 치가 떨려 교회 나가지 않겠다고 했던 저와 우리 가족이었는데, 삶이 너무도 어렵고 학교 휴학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답답해 죽을 것 같았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wholesale 마켓에서 물건 해서 가게 갔다 밤 10시에 문 닫고 집에 오는 생활이 반복되는데 마침 집에 오는 길에 한인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회 기도실이 항상 열려 있었습니다.
죽을 것 같아 가게 문 닫고 집에 올 때 저는 그 기도실에 들어가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울다, 자다, 그러다 다음 날 아침에 나와 집에 가서 샤워하고 다시 일 가곤 했습니다.

그 기도실에 커다란 예수님 초상화가 하나 있었는데 왜….그 백인에 금발 머리에 푸른 눈 가지신 예수님 그림 아시지요? 하루는 그 초상화를 보면서 하나님, 저도 제 친구들처럼 대학 가게 해주시면 제가 목사가 되겠습니다…했습니다.
그게 서원기도인지도 당시는 몰랐습니다.
목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확히도 몰랐고요.
그냥 넋두리같이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여간, 저는 그런 레아가 아닌가의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라헬을 추구하며 살던 우리 가족에게 주님께서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레아가 아닌가?
레아를 옆자리에 눕혀 주셔서 저와 우리 가족을 찾아오시고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철없는 서원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지금은 몇백만 불, 몇천만 불을 준다 해도 서류 미비자 신분으로 고생하던 때의 경험들, 레아가 아닌가의 순간들과 바꿀 마음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주님을 알게 되었는데요, 그것으로 은혜가 뭔지 깨닫게 되었는데요, 그것으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는데요.

그럼 이제는 예수 믿고 모든 상황이 다 좋아졌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부모님 그렇게 고생하시다 아버지는 50대 초반에 쓰러지셔서 몸 한쪽이 여전히 불편하시고요…어머니는 그런 아버지 보살피시다 너무 일찍 치매가 와서 고생하시다 재작년 팬데믹 기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제가 캐나다에 목회할 때 부모님을 캐나다로 모셨었거든요. 그래서 제 아내는 병든 시부모님을 한 집에서 6년을 모셨었습니다. 제 아내로서는 그게 또 눈을 떠보니 레아가 아닌가? 상황 아니었겠습니까?

솔직히 쉽지 않았습니다.
목사니까, 사모니까 그런 상황이 무조건 쉬울까요?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나 성도님들, 레아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 하나, 그거 붙잡고 사는 겁니다.
그런 일들을 통해 궁극적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기대하고 그분께 소망 두고 감사함으로 모든 것을 받으려고 힘쓰는 겁니다.

저희 어머니 결국엔 권사님 되시고서는 그런 말씀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집안에 목사 하나 내시려고 우리 가족에게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네, 신학적으로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일 수 있지만 과히 틀리지 않은 말씀이셨습니다.
네, 역설의 하나님이십니다.
교회 장로에게 그런 일 당하고 끔찍이 싫어하던 교회였는데, 그런 집안에서 목사가 하나 나왔습니다.
지금은 함께 섬겨왔고 현재도 함께 동역하는 교회 장로님들에 대한 무한 존경과 사랑이 있습니다.
역설 중에 역설이지요. 반전 중에 반전입니다.

네, 그렇게 우리 인생의 레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대에도 유다를 낳게 하시고, 유다를 통해 다윗, 다윗의 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하실 겁니다.

우리 인생의 레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동참시키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라헬은 야곱에게 있어 세상 욕심 추구 상징입니다.
레아는 야곱에게 있어 그런 야곱을 믿음의 선조 만들기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상징입니다.

라헬은 야곱의 강함이고 레아는 야곱의 약함입니다.
야곱은 강함을 추구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옆자리에 약함을 두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게 은혜입니다.
약할 때 곧 그때가 강한 것입니다.
약하기에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연약하기에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들은 이런 은혜 체험을 합니다.

성도님들, 오늘 말씀 듣고는 관점을 달리하십시오.
내 옆에 아내, 라헬인지 알고 결혼했는데 레아네…하고 불평하셨다면 와, 이 아내가 축복이구나.

아, 이 남편…그렇구나…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은혜구나.

자녀, 라헬을 기대하고 키웠는데 레아입니까?
감사로 받으십시오.

사업이 어렵거나 재정적으로 어려움 당하고 계십니까?
지병이 있으십니까?
내 기대가 깨지고, 내 욕심이 사라지면…드디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역사할 자리가 우리 삶 가운데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의 레아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시는 저와 우리 새로운 개혁교회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라헬을 얻기 위해 수고하는 덧없는 인생을 사셨다면 이제는 눈을 떠 보니 레아가 아닌가의 은혜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