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9:17-27/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
250413 종려주일
1. 고난주간의 여정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란 이름은 종려나무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오늘날 야자수의 일종인 대추야자나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이를 로마를 몰아내고 왕이 되셔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입성이라 믿으며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어 환영한 데에서 비롯된 명칭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을 요일별로 살펴보면 안식후 첫 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바로 이 때를 기념하는 날이 종려주일입니다. 다음 며칠간 성전정화,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베다니에서의 휴식을 가지신 후 목요일 저녁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시고 그 날밤 겟세마네동산에서 체포되신 후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리고 토요일 즉 안식일이 지난 안식 후 첫 날 부활하십니다. 그 부활을 기념하여 우리는 주일마다 예배합니다. 모든 주일예배는 부활기념예배입니다. 부활절만 기뻐하며 예배할 것이 아니라 모든 주일마다 우리는 기쁨과 감사로 부활을 찬양하고 기념함이 옳습니다.
성금요일만 따로 떼내어 시간대 별로 살펴보자면, 먼저 목요일 저녁 최후의만찬 후 늦은 밤에 겟세마네동산에서 체포되십니다. 금요일 새벽에 대제사장들과 빌라도, 헤롯에게 오가며 심문받고 고문 당하신 후 오전 9시 경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낮 12시 경에 해가 어두워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오후 3시 즈음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운명하십니다. 해가 져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 급하게 예수님을 장사지내어 오후 5시경 무덤에 묻히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 중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빌라도에게 심문당하시는 모습을, 수요일에는 고문당하시는 모습을 묵상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묵상하고, 오는 수요일에는 죽으시는 모습을, 금요일에는 무덤에 묻히시는 모습을 묵상합니다.
2.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스스로 당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가신다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17절입니다.
(요 19:17) 그들의 손에 넘어간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터’라는 곳으로 나가셨다…
그리스어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이 스스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영어로 치면 himself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 고난이 타의에 의한 것이거나 어쩔 수 없어 당하신 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이미 예상하셨고 주도하셔서 감당하고 계십니다. 이미 10장에서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요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내가 생명을 다시 얻으려고 내 생명을 버리기 때문이다. (요 10:18) 이 생명을 내게서 빼앗아 갈 자는 없지만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에게는 생명을 버릴 권한도 있고 다시 가질 권한도 있다. 이것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특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과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당신의 뜻이 하나로 연합되어 십자가의 길을 주도적으로 가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길이 수많은 죄인을 살리는 사명의 길인 동시에 참된 생명을 얻는 길이며 진정한 당신 백성의 왕으로 등극하는 영광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하신 것은 그들에게 고난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사명과 생명과 영광의 길로 초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 16:24) 그리고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 16:25)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제자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과 섬김의 길에 십자가의 고난이 있습니까?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사명이 진짜 그리스도로부터 왔다는 증거요, 그 길에 생명과 영광이 예비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런 고난이 없는 사명을 혹시 원하십니까? 즐거움과 편안함만 있는 봉사를 원하시나요? 그 사명, 그 봉사는 가짜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가짜입니다. 내가 봉사 좀 해보겠다는데 왜 이렇게 괴롭히는 사람이 많아? 당연한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는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이 동반됩니다. 동시에 참 생명과 영광이 예비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영광을 바라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참제자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왕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빌라도는 죄패를 붙여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면서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반란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예수님이 자신을 왕이라 칭하며 정치적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면 이 패는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히브리말 정확히는 아람어와 라틴어 즉 로마인의 말과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요 19:20)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 예루살렘성에서 가까왔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와서 죄패를 읽었는데 그 죄패는 히브리어와 라틴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아람어는 당시 유대를 포함한 수리아행정구의 지역언어였고 라틴어는 통치자인 로마인들의 공식언어였으며, 헬라어는 로마가 무너뜨리기 전 그리스제국의 공용어로 로마제국 당시에도 대부분 제국내에서 사용하던 공용어였습니다. 즉 로마제국내의 정치적 공용어 라틴어와 경제적 공용어 헬라어와 지역언어 아람어로 기록하여 모든 이들이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 즉 하나님백성의 왕으로 오셨음을 알게 되었음을 이 구절은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죽도록 내어준 대제사장들은 이를 싫어하여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고쳐달라고 하였지만 빌라도는 이번에는 그들을 무시하고 고치지 않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내어 온 천하에 알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진정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나심에 대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백성을 구원하시고 다스리시는 참된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이고 위협하고 업악하는 세상왕과 달리 용서하고 구원하고 돌보시는 사랑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이들은 참되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들은 참되신 하나님의 진짜 백성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어떤 이들은 세종대왕을 존경하듯이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세종대왕이 훌륭한 왕이고 그 왕의 업적으로 우리가 혜택을 보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왕과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세종대왕의 뜻을 거스른다고 우리가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세장대왕의 업적을 기린다고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혹시 예수님도 세종대왕처럼 박제된 왕으로 모셔둔 이들은 없습니까? 예수님이 정말 지금 여기에 살아계셔서 여러분과 참된 교제를 나누시며 여러분의 삶과 생명을 모두 드려 순종하고 좇아가야 마땅한 왕이십니까? 참되고 영원한 왕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4.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어머니 마리아와 여러 여제자들 그리고 사랑하신 제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는데 왜 이들은 바로 십자가 밑에까지 두려움 없이 올 수 있었을까요? 대제사장무리도, 로마군도 여자들이 반란세력이 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지 않았기에 그녀들은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남자였지만 아마 당시 어린 소년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다른 제자보다 더 허물없이 예수님을 대했다는 요한복음의 기록이나 주후 1세기 말 즉 십자가 사건 이후 70년이 지나서까지 소아시아에서 살아 사역했다는 교회전승을 보나 당시 그는 반란세력의 주동자로 의심받지 않을만한 소년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27절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이 사랑하신 어린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봉양해 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요 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흔히 기독교를 효를 강조하지 않는 종교라는 오해를 합니다만, 신구약에 일관된 부모공경의 메시지나 예수님이 친히 하신 조치만을 보아도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번에 터키성지순례를 가신 교우들은 에베소 곁 셀축이란 타운에서 마리아를 모신 요한의 무덤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일정상 마리아를 모셨던 집을 방문하지 못 한 것이 아쉽습니다만, 5, 6년 후 다시 터키를 방문할 때는 꼭 모시고 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26절에서는 예수님이 어머니를 부를 때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호칭을 쓰십니다.
(요 19: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현대인의성경은 의역을 하여 ‘어머니’라고 썼지만 개역성경을 포함하여 직역을 한 대부분의 성경은 마리아를 가리켜 ‘여자여’라고 불렀다고 정확히 번역합니다. 요한복음 2장은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 때도 어머니 마리아를 가리켜 ‘여자여’라고 불렀다고 기록합니다. 복음서 중 유일하게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불렀다고 강조하는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 유일하게 복음의 시작을 태초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역시 태초를 다루는 유일한 책은 창세기입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창세기에 ‘여자여’라고 부른 이유를 짐작케 하는 힌트가 등장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꾐에 넘어가 죄를 범한 후 하나님이 그들을 죄럴 벌하시면서도 은혜를 동시에 베푸시며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창 3:15) “내가 너(뱀)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뱀)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뱀)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뱀은 마귀를 상징합니다. 즉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 것이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깨버릴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일부러 ‘여자’라고 부르심으로써 당신이 이 예언 속 여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십자가의 달리신 이 사건은 마귀 곧 뱀이 당신의 뒷꿈치를 문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뱀 곧 마귀의 머리를 깨버리실 것입니다. 뒷꿈치를 문 것과 머리를 깬 것 중 어느 것이 더 결정적 승리입니까? 뒷꿈치를 물리면 고통스럽긴 하나 머리를 깨면 죽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만 다시 부활하여 마귀의 결정적 능력 즉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마침내 영원한 심판으로 마귀와 그 모든 세력을 완전히 멸망시킬 것임을 선언하신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그러므로 잠시 동안의 고통이요, 일보 후퇴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으로 완전한 승리와 영광을 쟁취하실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뒤를 좇는 우리 제자들의 삶에서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고난당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승리하신 왕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를 완전히 넘어뜨리지 못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다시 일어날 것이고 다시 부활할 것이고 다시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여러분은 세상의 어떤 힘도 무너뜨리지 못 합니다. 세상의 어떤 고난도 위협하지 못 합니다. 로마서의 이 위대한 선언을 기억하십시오.
(롬 8:37)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거뜬히 이깁니다. (롬 8:38) 그러므로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지옥의 권세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은 것이나 깊은 것이나 그 밖에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고난과 실패는 물론 죽음마저도 거뜬히 이기고 승리하는 참 제자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