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27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증거와 증인”(요한복음 20:11-18) – 김도완 목사

4월 26, 2025

Series: 주일예배

Book: 요한복음

요 20:11-18/증거와 증인

250427 주일설교

1. 부활에 대한 입장

여러분은 부활을 믿으십니까? 얼마나 확실하다고 믿으십니까? 너무 바쁘게 사느라 생각해 보지 못 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입니까?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보다도 더요?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신다면,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부활이 사실이라면 사람은 자신이 설 자리가 이 중 어디일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중에는 눈으로 보지 못 했는데 부활이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의심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현재의 삶 외의 모든 것에 희망을 버려야 합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니 현재 삶에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이 아까운 시간에 여기 모여 허공을 쳐다보고 노래를 부르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은 이 선택지 중 어딘가에서 살 길을 찾으려는 몸부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 증거와 증인

부활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이 부활의 첫 번째 증거는 빈무덤입니다. 부활을 못 믿겠다는 이들도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 근처에서 가장 작은 타운인 팰리세이즈팍이 약 820에이커인데 1세기 당시 예루살렘이 그 4분의 1인 220에이커였습니다. 처음 부활이 선포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예루살렘 어디에 살아도 30분이면 산책 삼아 성을 나서자마자 바로 북서쪽 언덕에 있던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들러 무덤이 비어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성지순례로 방문하면 여러분 중 누구라도 그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충분히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적대자들이 만들어낸 몇 가지 설이 퍼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가 피신했다는 기절설, 예수님의 주검을 제자들이 훔쳐갔다는 도난설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기절설은 예수님이 당하신 가혹한 채찍질과 십자가형, 다리를 부러뜨리고 창을 옆구리에 찔러 죄수들의 죽음을 반드시 확인하는 전문가 로마군병들, 역시 무거운 돌문과 그 앞을 지키고 섰던 로마군병들을 고려하면 아무런 정황증거도 없는 불가능한 주장입니다. 도난설도 부활을 믿지 않았던 제자들이 자신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로마군병들의 호위를 뚫고 그럴 아무런 동기가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도난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증인 곧 그 제자들의 증언과 삶에 의해 강력하게 반박됩니다.

그 증인 중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이가 오늘 본문의 주인공 막달라 출신의 여인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기독교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녀는 빈무덤을 가장 먼저 목격한 이요,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목격한 이이기도 합니다. 만약 제자들이나 복음서의 저자들이 예수님의 주검을 훔치고 부활이야기를 만들어내어 거짓으로 주장하기로 작정했다면 마지막까지 결코 택하지 않았을 증인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당시는 여자가 유대법정에서 증인으로 인정받지 못 하던 시대입니다. 왜 많은 남자제자들을 두고 여자를 최초 목격자로 선정했을까요? 게다가 누가복음 8장을 보면 그녀는 소위 귀신들렸던 여자였습니다.

(눅 8: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멀쩡한 여자의 말도 안 듣던 시대에, 한 때 귀신들렸던 여자를 최초증인으로 삼을 작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기록이 증명하는 바는 빈무덤과 부활의 최초증언이 결코 창작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3. 믿을  한가

그녀의 증언을 최초로 들은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못 믿었습니다. 지난 주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빈무덤에 관한 마리아의 증언을 듣고서 놀라 무덤을 향해 달려갔고 요한은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직접 들어가서 눈으로 보기 전까지 믿지 못 했습니다.

(요 20:8)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왔던 다른 제자(요한)도 들어가 보고 믿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제자들에게 이를 전했습니다만 19절에서 이후 보인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여전히 그들은 믿음과 기쁨보다는 의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요 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

이들의 태도는 이후 예수님이 꾸짖으신 바에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요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기독교인이 되지 못 하겠다’고 고집하는 이들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부분 보지 않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나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적 지식을 본 적도, 측정해 본 적도 없지만 믿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과학자들의 설명을 그냥 신뢰합니다. 인간생명이 존엄하다는 것이나 우리에게 권리나 의무가 있다는 사실도 모두 증명할 수 없지만 믿고 있습니다. 철학자나 정치인의 말을 그냥 신뢰합니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과 알렉산더대왕, 티베리우스 황제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봤다는 사람들의 기록을 그냥 신뢰합니다. 이처럼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지식의 대부분은 믿음 위에 선 것입니다. 그런데 빈무덤과 예수님을 본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제자들과 여러 증인들 그리고 그들의 순교를 불사하는 삶을 보고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4. 강력한 증인과 증거

예수님이 죽으신 지 약 13년 후인 AD 55년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서에서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도에는 부활의 증인목록이 이렇게 소개됩니다.

(고전 15: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고전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고전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지금부터 13년 전이면 2012년입니다. 그 해에 런던올림픽이 있었고 러시아에서는 푸틴 대통령이 재선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해에 휘트니 휴스톤이 주검으로 발견되었는데 만약 제가 그녀가 살아난 것을 나와 함께 누구 형제, 누구 자매 등 우리가 아는 오백 명이나 봤다고 신문에 싣는다면 당장 그 주장의 사실진위가 그 오백 명 중 누군가에 의해서 지지되든, 반박되든 하지 않겠습니까?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후 여러 교회에 회람되어 마침내 정경의 위치를 얻어 신약성경에까지 실렸습니다. 열두 제자는 물론이고 오백여 형제와 그보다 적지 않았을, 당시의 인구수로 계산하지 않았던 자매들까지 하면 천 여명에 이르는 목격자들 중 절반 이상이 살아있다고 하니 만약 부활을 그들이 진짜로 목격하지 않았다면 교회 안에서 누군가 이의를 제기했을 것입니다. 저기요, 그 오백 명이 누군가요? 저는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는데요? 그 누구도 이 기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이 서신을 모든 교회가 회람하며 마침내 정경이 되도록 인정했다는 사실은 이 부활의 증인목록을 당사자를 비롯한 주변인들이 모두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그들 중 대부분은 부활의 주님을 목격했다는 이 주장을 전하고 끝까지 고수하다가 순교했고, 살아남은 이들도 이유없이는 감내하기 어려운 사회적, 경제적, 신체적 박해를 받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주님의 주검을 훔쳐놓고 거짓말을 했다면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이런 희생을 감수한단 말입니까?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났고 그 경험은 환각이나 상상이 아닌 실제 고문과 궁핍과 박해를 견뎌낼 만한 실제였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부활목록에 후반부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님이 미친 줄 알고 데리어올 정도로 회의적인 사람이었고, 사도 바울은 적극적으로 교회를 공격했던 적대자였습니다. 그런 야고보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 베드로와 더불어 초대교회를 이끈 장로가 되었고 야고보서를 교회에 남겼습니다. 바울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초대교회에 가장 적극적이고 성공적인 전도자가 되어 많은 신약성경을 남겼습니다.

5. 증거를 좇는 믿음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 부활사건은 사건이 발생한 시점과 가장 가까운 시기에 기록된 자세한 기록을, 성경과 여러 문서에, 과거 역사의 어떤 인물보다 많이 남겼고 숱한 증인과 증거를 또한 남겼습니다. 이는 알렉산더대왕이나 티베리우스황제, 이순신장군이나 세종대왕처럼 그 존재와 삶을 실제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그 어떤 기록보다 더 신뢰할 만한 자료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마음으로 증거와 증인을 좇아가는 이는 부활의 부정하기 힘듭니다.

21세기 대표무신론자로 리차드 도킨슨이 있다면 20세기에는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영국대표철학자 안토니 플루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의 리차드 도킨슨처럼 여러 차례 공개방송에서 유신론자들과 논쟁을 벌이며 평생을 전세계에 무신론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81세가 되던 2004년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3년 뒤인 2007년 ‘There is a God : 존재하는 신’이란 책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 사건을 언론은 20세기 신학계의 최대사건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는 세계적 철학자답게 자신의 회심이유를 철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지구에서 볼 수 있는 ‘목표지향적이고 자기복제가 가능한’ 생명의 기원을 설명해 내는 만족스러운 대안은 무한한 지성을 갖춘 정신(신) 하나 뿐이다… 나는 증거가 이끄는 곳으로 따라간다.”

그의 마음을 바꾼 것은 로마서 1장이 말씀하시는 ‘자연만물에 새겨진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입니다.

(롬 1:20)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때부터 보이지 않는 그의 속성,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을 통해 분명히 나타나서 알게 되었으니 이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신앙은 무턱대고 믿으라는 맹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증거와 증언을 듣고 믿으라고 요구합니다. 80평생 고수하던 세계적 무신론 철학자의 불신앙도 신앙으로 바꿀 만큼 충분한 증거가 자연만물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는 부활을 믿게 할 만한 충분한 증거와 증언과 증인의 삶에 둘러쌓여 있습니다. 빈무덤의 증거와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오백여 형제들과 회의론자였던 야고보, 적대자였던 바울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증인들의 증언과 그 믿음에 생명을 바친 삶의 증거가 그것입니다. 그들의 증언으로 가득찬 놀라운 책 성경과 이 성경 위에 선 2천 년 교회역사와 오늘날도 부활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증인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반면 못 믿겠다는 불신앙의 고집을 제외하면 부활을 부정할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 제자들처럼 놀라고 의심하고 직접 보기까지는 못 믿겠다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 하고 믿는 이들이 행복하니라’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과 증인들의 증언과 삶으로 믿는 행복한 이들입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진정한 믿음과 행복이 허락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