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11-18/두려움 없는 사랑
250511 주일설교
1. 왜 마리아였나
오늘 성경본문이 2주 전 설교와 똑같지 않나, 하셨다면 맞습니다. 그 때는 주제가 달라서 다루지 못 한 의문을 오늘 풀어보려고 합니다. 왜 막달라 마리아가 빈무덤과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느냐는 질문입니다. 누군가가 부활사건을 지어내기로 작정했다면 마지막까지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증인이 그녀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빈무덤의 첫증인이 된 것은 무덤을 찾아간 그녀의 선택의 결과이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첫증인이 된 것은 그녀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신 예수님의 선택입니다. 예수님은 왜 베드로를 비롯한 쟁쟁한 제자들을 두고 그녀를 첫 증인으로 선택하셨을까요? 왜 기독교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빈무덤과 부활의 첫 증인이 다른 남자제자가 아닌 그녀였을까요?
2. 은혜입은 제자
이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역시 그녀에 관한 복음서의 언급에서 시작합니다. 눅 8:1-2입니다.
(눅 8: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눅 8: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눅 8: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에는 열두 제자 외에도 여제자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녀들의 공통점은 귀신들림이나 질병을 치유받았다는 점입니다. 그 중 막달라 마리아는 특히 일곱 귀신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는데 그 축귀장면이 성경에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그 장면을 상상케 해주는 두 가지 사건을 복음서에서 참고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마가복음 5장에 등장하는 갈릴리 호수가 거라사지방의 더러운 귀신들린 남자의 치유사건입니다. 그에게서 군대귀신이 나가 돼지떼에 들어가서 바다로 달려 몰살하는 사건입니다. 온전케 된 그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지만 주님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그 지방사람들에게 그가 입은 은혜를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와 달리 주님을 따르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귀신들린 그녀의 몰골이 이 거라사의 광인보다 더 나았으리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사건은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입니다.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놓인 그녀를 구해주신 예수님은 그녀에게 당신도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용서를 베푸시고,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죽음의 문턱에서 건짐받은 여자 못지않게 막달라의 마리아도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고대세계에 귀신들려 미친 여자는 멸시와 천대, 혐오와 학대를 일상으로 받았을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귀신들린 여자를 사람으로 대우했겠습니까? 부모도 형제도 그녀를 감당하지 못 했을 것이고, 결혼했었다면 당연히 남편에게 버림받았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녀를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귀신으로부터 건져주시고 심지어 제자로 받아주셨습니다. 아마 남자제자들이 반대했을 지도 모릅니다. ‘주님, 귀신들리고 미친 여자가 우리와 함께 다닌다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부정한 여자와 다닌다고 바리새인들은 또 우리를 얼마나 무시하고 멸시할까요? 그녀가 다시 미쳐서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면 어쩌시렵니까?’ 그 모든 반대에도 예수님은 그녀를 천하다고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은혜를 입었으니 그녀가 예수님을 어떤 마음으로 따랐을까요?
3. 헌신하는 제자
그녀는 자신을 구원하시고 사람취급 해주신 예수님에게는 목숨도 아깝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한 죄많은 여인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갈릴리의 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이 초대받아 식사하실 때 그 동네사람 모두가 아는 죄지은 여인이 와서 예수님의 뒷편에서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비싼 향유를 붓는 일이 생겼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이 죄지은 여자가 당신의 발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정죄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바리새인 시몬과 달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았던 그 여인은 모든 힘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이 이 여자에 못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남자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을 때도 그녀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통곡하며 따라갔습니다.
(눅 23: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막달라 마리아가 통곡하는 여자들 중에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장면인 골고다에서도 그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제 목숨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녀의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 갈갈이 찢어졌습니다. 할 수만 있었다면 그녀는 주님이 당하시는 모든 고난을 대신 당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신 후에도 그녀는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묻히신 곳을 확인하였습니다.
(막 15: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무덤)을 보더라.
그 이유는 안식일이 끝나는 대로 향품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주검에 바르기 위해서였습니다.
4. 뜨거운 사랑
그녀는 빈무덤을 확인한 베드로와 요한이 이상하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무덤을 떠나지 못 하고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죄없는 귀하신 분이 그토록 참혹한 고문과 죽임을 당하셨는데 이젠 그 주검마저 도난당하시다니! 어떻게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실 수가 있는가! 그녀는 원통하고 비통하여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주검이라도 찾고 싶었습니다. 그 어떤 제자도 그녀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지는 못 했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믿음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처럼 유식한 말로 신앙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어도 어떤 바리새인도 할 수 없을 만큼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 너무 감사해서,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그 분이 없으면 살아갈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주님이 그녀의 전부요, 주님이 삶의 이유요, 주님이 그녀의 행복입니다. 이사야서가 노래한 바와 같습니다.
(사 12: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예수님을 향한 이런 뜨거운 사랑이야말로 주님께서 베드로나 요한 혹은 다른 어떤 제자가 아닌 그녀에게 가장 먼저 부활하신 당신을 보여주기로 결정하신 이유가 아닐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장 바란 것은 바로 이런 뜨거운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에서 베드로를 만났을 때 세 번이나 던지신 질문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습니다.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벌인 나사로의 집에서 손님을 접대하느라 많은 일로 불만이 생긴 마르다가 주님 발 앞에 그 말씀을 듣고 앉아만 있는 마리아를 보며 원망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도 이것입니다. ‘마리아야, 마르다는 나와 나의 가르침을 사랑하는구나.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데 어떻게 그에게서 이를 빼앗느냐?”
5. To Do List 신앙
신앙이 ‘To do list’를 clear 하는 것이라는 오해를 많이 합니다. 세상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몇 번, 헌금을 얼마, 봉사는 어디까지, 선교는 이 정도, 구제는 이 정도… 자, 다 했지? 이제야 안심이 되네… 이렇게 생각하기에 기독교인의 삶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집니다. 여러분 중에도 잘 믿으려는 마음이 오히려 부담이 되는 이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To do list 신앙은 늘 무거운 짐에 짓눌려 긴장하고 신음하거나 할 만큼 했으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갔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예가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의 길에 대해 질문한 한 젊은 관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질문했습니다. 영생의 길을 To do list를 제대로, 충분히 clear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지켜행해하지, 라고 답하신 이유는 정말 그것이 영생의 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아무리 많은 To do list를 clear 해도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반문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그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 하고 근심하며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그가 떠난 후 예수님은 안타까워하며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8: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눅 18: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이 하려는 것은 To do list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을 정도로 의를 행할 수 있는 이는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어 십자가에 매다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어떤 죄인도 구원하고도 남을 만큼 크고 놀라운 능력이요,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 사랑의 삶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왜입니까? 이 사랑에는 진정한 기쁨과 감사와 평화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6. 사랑과 믿음
그래서 율법 중 어느 가르침이 가장 중요하느냐는 한 바리새인의 질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그래서 결혼식장에서도 주례는 돈을 얼마나 벌어다 주겠느냐, 기념일을 챙겨주겠느냐, 아이는 몇을 낳아주겠느냐라고 묻지 않고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어떤 것인지 또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세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며 그 사랑 때문에 십자가마저도 기꺼이 지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안에는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는 능력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이 뜨거운 사랑을 기록한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4장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이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왜 온갖 두려움이 있습니까? 제대로 못 믿을까 봐, 구원받지 못 할까봐, 인생에서 실패할까봐, 가난해질까봐, 아플까봐, 무시당하고 외면당할까봐 두렵습니까? 사랑이 답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고 그 사랑 안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녀의 모든 슬픔과 근심과 두려움이 눈처럼 녹아버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소망과 행복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못 만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주님의 이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닫힌 눈을 열어 사랑의 기쁨을 알게 하시고 죽음마저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해주십니다. 오늘 우리 인생과 신앙의 해결책은 놀라운 주님의 사랑입니다. 온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