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9:1-7/놀라운 하나님의 일
250518 주일설교
1. 고난의 미스테리
종종 고난을 겪는 여러 교우와 비슷한 대화를 나눕니다. ‘목사님, 이러이러하게 문제가 있어요. 기도 좀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교우들과도 함께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하시지요?’ ‘아이고, 목사님만 알고 기도해 주세요. 창피해서 못 나누겠어요.’ ‘뭐가 창피하세요?’ ‘지난 번에도 가족이 아프다고 교인들이 기도해 주셨는데 또 다른 가족이 아프다고 기도제목을 내놓으려니 걱정이 돼요. 사람들이, 저 집은 왜 저리 아픈 사람이 많나, 문제있는 집안 아닌가? 예수 잘 믿으면 집안이 잘 되어야지, 자꾸 문제 생기고 아프고 사고 나는 것보면 예수를 잘 못 믿어 그런 것 아닌가, 하고 흉볼까봐 창피해요.’
이런 생각때문에 자신의 고난과 실패를 숨기는 이가 많습니다. 이런 생각은 고난과 실패를 죄의 결과로 이해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낸 이가 차가 부서지고 몸이 다치는 것이야 분명 자신의 잘못입니다. 그런데 그 차에 부딪힌 상대방은 누구를 탓해야 합니까? 사고를 낸 음주운전자를 탓해야지, 법규를 지킨 이의 잘못을 탓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는 아무 잘못 없이 그저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
그럼 그에게는 왜 이런 운나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이유없는 고난은 정말 풀기 어려운 미스테리입니다만, 그 무지의 어둠에 빛을 비추는 본문을 오늘 우리가 읽었습니다. 잠시 요한복음 20장의 예수님의 부활장면을 미루어두고 9장으로 돌아와 한 시각장애인의 치유사건을 살펴봅니다.
2. 죄와 고난의 관계
예수님이 예루살렘 거리에서 한 시각장애인을 만났습니다. 몰골과 형편이 좋을 리 없었을 그를 불쌍하게 바라보며 제자들이 묻기를, 이 사람이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교 랍비들은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가르쳤는데 이 장애인처럼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이들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질문은 그 자체로 ‘모든 고난은 죄의 대가’라는 생각을 전제로 합니다. 고대에도 보편적으로 퍼져있던 이 생각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퍼져있어서 가난은 게으름의 대가요, 실패는 무능력의 대가요, 질병은 자기관리부재 때문이고, 이혼은 자격없음의 증거라고 여기고, 이에대해 말하기 부끄러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예수님은 단호하게 부정하셨습니다.
(요 9:3)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죄 때문이 아님을 명확히 밝히셨습니다. 이 사람의 죄가 아니다. 즉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셨습니다. 부모의 죄도 아니다. 애초에 고난이 반드시 그 누군가의 죄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고난을 죄와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주 편협하고 일차원적인 세계관입니다. 성경은 죄와 고난이 대응되지 않는 예가 얼마나 많은지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3장에서도 제자들에게 고난을 죄 때문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눅 13:2)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그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다고 생각하느냐? …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다고 생각하느냐?’
헤롯의 학살이 악인에 의한 인재라면, 실로암망대붕괴는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는 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죄와 함부로 연결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도 욥기가 좋은 예입니다. 욥은 당대의 누구보다 행실이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전재산을 잃고 자녀를 한꺼번에 잃고 자신의 건강마저 잃는 인생의 가장 혹독한 재앙이라 할 세 가지 재앙을 동시에 겪습니다. 그의 현명하다는 친구들이 찾아와 죄 때문에 이런 재앙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의 마음을 후벼팠습니다만, 결국 하나님은 욥을 정죄하는 친구들의 오만함을 꾸짖고 욥의 무죄함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다만 욥기는 고난이 그의 죄 때문이 아님을 확인해 주면서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해하기 어려운 섭리와 신비의 영역이라고 결론내립니다.
3.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
그러나 욥기가 속시원히 밝히지 않는 그 신비의 한 면을 예수님은 밝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3절을 다시 보십시오.
(요 9:3) ‘…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기 위해서이다.’
그의 고난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사건이 죽 이어지는 후반부 39절에 가면 그 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9:39)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하신다는 이 심판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요한복음 9장과 10장 전체는 이 시각장애인을 치유한 일로 인해 벌어지는 에피소드와 가르침인데, 이 에피소드 전체가 예수님의 심판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보여줍니다. 먼저 이 장애인이 눈 뜬 것을 보고 놀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요 9:10) 그러자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네가 어떻게 눈을 떴느냐?’ … (요 9:12)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
그 결과 그 장애인과 더불어 많은 사람이 이 치유사건으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요 9:38) 그러자 그(시각장애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요 10:42)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적으로 인해) 그 곳에서 예수님을 믿었다.
반면 종교지도자들은 장애인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요 9:40)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새파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우리도 시각장애인이란 말이오?’ …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인지가 예수님이 고치신 시각장애인의 증언을 듣고 보인 반응을 통해 극명하게 대비되어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다는 심판이요, 이 시각장애인의 고난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일입니다.
4. 가장 효과적인 도구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이 심판 곧 신앙과 불신앙을 걸러낼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요 9:4) ‘우리는 낮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밤이 오면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낮이란 어느 때를 가리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즉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이 낮인데 그 낮이 길지 않습니다. 다시 4절을 보십시오.
(요 9:4) 우리는 낮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밤이 오면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낮 동안 즉 예수님이 계시는 짧은 공생애 동안,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제자들을 박해하여 그 일을 할 수 없게 만들 밤이 오기 전까지 누가 진리에 응답하는 자인지, 누가 진리를 외면하는 자인지 드러내는 구원과 심판의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하는데 그 일을 가장 극적으로 또 효과적으로 하는데 필요했던 사건이 바로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된 그를 고치는 사건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예루살렘 주민 모두가 듣고 놀라서 예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듣고 순종하든지, 외면하고 불순종하든지 결단에 직면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바로 이 계획을 시작하는데 시각장애인의 고난이 쓰임받았습니다. 믿고 순종하는 자의 고난은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위해 놀랍게 쓰임받음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5. 사랑과 긍휼의 주님
하지만 인간적인 마음에서 이런 원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지만, 생애의 상당 기간을 장애를 안고 비참하게 살게 만드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을 너무 사소하게 보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요? 그 답을 오늘 본문의 시각장애인 치유사건이 끝난 후 바로 이어지는 나사로의 죽음사건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으로 가면 예수님이 요단동편에 머무시다가 요단서편 예루살렘 옆 베다니에 사는 사랑하신 제자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간다는 긴박한 소식을 들으십니다. 그 때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요 11:4) 예수님은 이 말을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시각장애인을 치유하며 하신 말씀과 매우 유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 나사로는 그 병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그 두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애가 타서 사람을 보내 급히 예수님을 오시도록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요 11:6) …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시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시다가 (요 11:7)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틀이나 더 지체하다가 오셨으니 이동시간 하루를 계산하면 소식을 듣고도 사흘이나 뒤에 도착하셨습니다. 그 동안 나사로는 이미 죽어서 묻혔고 자매들은 예수님이 늦으신 것에 얼마나 섭섭하고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요 11:21) 마르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거예요.’
왜 그러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이 남매의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신 것일까요? 요한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고 기록을 남깁니다.
(요 11:5) 예수님은 두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고 계셨다… (요 11:33) 예수님은 마리아가 울고 또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몹시 안타까와하시며 … (요 11:35)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은 질병과 상실로 고통받은 그 남매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셨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그들이 질병과 죽음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만 계셨던 것일까요?
6. 구원을 행하시는 주님
바로 이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요 11:25)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며 (요 11:26)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 진리를 깨우치고 믿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죽을 때까지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가 이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또 이 일로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당신이 계획했던 일을 행하셨습니다. 43절입니다.
(요 11:43)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크게 외치시자 (요 11:44) 죽었던 그가 손발이 베에 묶인 채 나왔다…
오빠의 살아남을 본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죽을 때까지 의심할 수 있었겠습니까?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살리신 예수님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을 직접 보고 또 전해 들은 베다니와 벳바게 그리고 이웃한 예루살렘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증언을 무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결과가 45절입니다.
(요 11:45) 마리아를 위로하러 왔다가 이 광경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 고통을 가벼이 여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세상 누구보다 우리의 연약함과 죄와 고난과 실패와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잘 아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당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바로 이 고난을 통해 그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이 값지고 복된 참된 생명, 참된 기쁨, 참된 행복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믿음으로 이기는 우리를 통해 모두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가장 큰 의미이자 이유입니다. 이보다 큰 이유가 없습니다. 이 이유를 아는 성도는 고난을 슬퍼하고 분노하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인내하고 고난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자랑합니다. 하나님,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주옵소서, 기도하게 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난을 통해 당신의 거룩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시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