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1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완전한 평화”(요한복음 20:19-23) – 김도완 목사

5월 31, 2025

Series: 주일예배

Book: 요한복음

요 20:19-23/완전한 평화

250601 주일설교

1. 평안이 없는 세상

예전교회에서 어느 교우가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형제님, 축하드려요. 잘 됐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말도 마세요. 잠을 못 잡니다.” “네? 실력도 인정받고 월급도 늘었을 텐데 왜 그러세요?” “실적압박이 두 배가 됐어요. 실적을 못 채워 잘릴까 봐 잠을 더 못 자요.” 이 분만의 고민이 아닐 겁니다. 돈이 없으면 큰 일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 돈이 있으면 이 돈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근심, 건강 잃을까, 사랑을 잃을까, 평판을 잃을까, 자녀가 잘 안 될까, 투자를 실패할까, 미국경제가 망할까… 온갖 걱정과 불안을 그림자처럼 떼지 못 하고 살아가는 우리가 아닙니까! 그런 우리가 과연 어디서 진정한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 답을 부활하신 주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2. 평안을 주시는 주님

요한복음 20장으로 돌아와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을 읽었습니다. 20장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을 나타내신 세 번의 사건이 묘사되는데 먼저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사건과 이어서 두 번에 걸쳐 제자들이 머무는 집에 나타나신 사건입니다. 각각의 사건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마리아에게 나타나심은 당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시기 위함이라면 세 번째 나타나신 사건은 믿지 않는 도마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사이에 있는, 두 번째 나타나심 곧 오늘 본문의 나타나심은 목적이 무엇일까요? 부활을 알리기 위함에 더해 분명히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강조하며 시작합니다.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님을 잡아죽인 유대인들이 언제 제자들에게도 들이닥쳐 잡아가 똑같이 죽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런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요 20:19) …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건 유대인들의 의례적인 인사 아닙니까? 잠시 후 예수님은 또 다시 같은 말씀을 하심으로 의례적 인사로 하신 말씀이 아님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3. 평안의 약속

이 말씀은 당신이 진작에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평안은 세상의 것과 다릅니다. 세상의 평안은 가지거나 이기거나 뜻대로 되어야만 생깁니다. 그리고 그 유효기간이 너무나 짧아서 상황이 바뀌면 사라지고, 바뀌지 않아도 금방 불안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약속한 평안은 상황을 초월하여 상황변화와 상관없고 유효기간이 영원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의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근심하고 혼란스러워했고 그 후 예수님의 체포를 보고는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쳤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약속을 경험하지 못 한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약속은 미래형이었습니다. 16장에서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약속해주셨습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제자들은 평안도, 담대함도 경험하지 못 했고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 하신 약속을 이루시려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4. 부활의 증거

예수님은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기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먼저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요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제자들은 부활의 증거를 보자 예수님이심을 확신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두려움이 눈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를 평안이 채웠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제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놓고 근심하며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를 돌보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때 난생 처음 경험해본 평안이 얼마나 크고 강렬했던지 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과 그로부터 쏟아져들어오는 평안과 기쁨이 너무나 커서 저를 짓누르던 문제가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평안과 기쁨을 주시는 분이라면 그 분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두려워떠는 이들에게 당신의 그리스도 되심의 증거를 보여주심으로 평안과 기쁨을 주십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말씀이 증거가 되어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응답이 증거가 되어 주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성적으로 사리를 따져보다가 도저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할 수 없어서 믿기 시작합니다.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를 보고 겸손히 그 분을 의지하는 순간 평안이 시작됩니다. 선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런 압도적인 평안과 기쁨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5. 성령을 주심

그런데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평안이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실제 제자들은 이 20장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큰 기쁨에 휩싸였지만 21장에서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고기를 잡으러 떠났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자 그들은 다시 불안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과 교제할 때 누리던 평안과 기쁨이 일상으로 돌아가 돈걱정, 힘든 관계, 죄의 유혹으로 다시 사라지는 것을 많은 이들이 경험합니다. 이런 제자들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주님은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시는데서 그치지 않고 두 번째로 무언가를 하셨습니다.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명백히 창세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재현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주셨을 때 그 때 인간은 완전한 평안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누렸고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사명을 기쁨으로 수행했으며 동산의 모든 자원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불순종의 죄로 그들이 저주받아 평안을 잃고 불안과 두려움의 세상에 내동댕이쳐지기 전까지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로 두꺼운 죄의 장막을 무너뜨리고 이 창조세계의 평화로 제자들을 초청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피조세계와의 평화 그리고 자신과의 평화를 누리는 상태로 말입니다. 그 회복의 결정적인 열쇠는 아담의 생기처럼 제자들에게는 성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나 평안을 경험한 성도가 지속적을 그 평안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이 땅의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었다면 성령님은 영으로 우리 마음에 오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평안과 기쁨으로 살아가도록 만드십니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령님은 성도가 평안을 빼앗는 죄와 악을 이기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성도는 근심과 걱정,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언제까지나 결코 마르지 않는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6. 사명을 주시는 성령님

알겠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성령님을 구하는 기도도 드립니다. 그런데 왜 저는 여전히 늘 불안합니까? 왜 평안을 못 누리나요? 그렇다면 성령님을 모시지 못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 성령님을 모시지 못 했을까요? 사명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불안하지 않고 평안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그것이 다라면 성령님은 마약이나 다름없습니다.

마약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대가지불 없이 만족과 기쁨을 얻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노동과 양육과 공부와 훈련의 공통점은 땀을 흘리는 수고를 요구한다는 것과 그 대가로 큰 만족과 기쁨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땀흘리는 수고 없이 뇌의 호르몬 작용만으로 만족과 기쁨을 얻게 해주는 것이 마약입니다. 사실 마약은 해로운 방식으로 훨씬 큰 대가지불을 요구합니다. 만족과 기쁨의 유사품을 주고 나서 중독과 금단현상으로 티끌만큼 남은 만족과 기쁨까지 모두 빼앗가 버립니다.

기독교인들이 성령님은 불안과 두려움을 달래는 마약처럼 여기는 잘못을 얼마나 많이 저지르는지 모릅니다. 주님, 두렵습니다. 불안합니다. 살려주세요. 열광적인 예배나 집회, 금식기도 등을 통해 기분이 고양되는 경험을 하고 아, 마음이 편하다, 위로가 된다, 걱정이 사라졌다는 식의 경험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나 현실로 돌아가면 다시 불안과 두려움의 늪에 빠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교회나 기도원을 찾습니다. 성령충만을 마약처럼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한 것이요, 성령님을 모욕하고 이용하는 죄입니다.

예수님이 평강을 약속하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요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 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왜요? 죄를 사하기도 하고 심판하기도 하게 하시려고입니다. 카톨릭에서는 이를 사제가 고해성사를 듣고 용서를 선포하는 권세로 해석합니다만, 우리 개신교는 복음전파를 통해 죄사함이 선포되거나 복음을 거부하는 이의 불순종이 드러나게 하는 상황으로 이해합니다. 즉 평안을 주시고 성령님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명자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즉 성령님은 사명을 감당할 힘을 주시는 분이요. 평안은 그 사명을 좇을 때 누리는 은혜입니다. 여기서 사명을 빼버리고 성령님만 받아서 평안을 누려려고 하기에 진정한 평안이 아니라 감성적인 말과 열광적인 음악과 기도로 감정을 조작해서 만드는 유사평안만 누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사명으로 초청하십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사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님의 주되심과 우리의 종됨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를 주인처럼 여기는 교만을 내어버리고 완전히 그 앞에 굴복하고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행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 명령을 듣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날부터 오순절이 이르기까지 열흘 동안 전심으로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시는 성도들의 공통된 경험을 통해서도 어렵잖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완전히 주께 굴복시키고 어떤 사명을 주시든 순종하기로 고백하며  약속하신 성령님을 모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는 기도가 예수님에게는 하룻밤이 걸렸지만 제자들에게는 열흘이 걸렸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완전히 하나님께 굴복했을 때 성령님이 임하셨고 그들은 담대히 문을 박차고 나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던 유대인들의 박해가 더 이상 위협도, 걱정도, 두려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샘솟는 성령님의 평안과 기쁨 안에서 영생의 길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완전하고 지속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누리는 유일한 길은 부활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성령님을 모시고 사명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 삶에 맺히는 열매가 놀랍고 충만한 평안과 기쁨입니다. 이 사명자의 삶 없이 평안과 기쁨만 얻고자 하는 것은 마치 마약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유효기간이 몇 시간도 안 되는 유사품 종교적 평안에 중독되는 바보짓입니다. 부활의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성령님을 모시고 사명자로 살며 참되고 영원한 평안과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