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8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더 복된 믿음”(요한복음 20:24-29) – 김도완 목사

6월 7, 2025

Series: 주일예배

Book: 요한복음

요 20:24-31/더 복된 믿음

250608 주일설교

1. 하나님을 향한 갈망

미국에서 기독교는 쇠퇴일로에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의 현상도 분명 나타나고 있습니다. 2023년 스프링타이드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1997년 이후에 출생한 이들을 가리키는 Z세대 3명 중 1명이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는데, 이는 2년 전 4명 중 1명보다 늘어난 수치입니다. 전 세계에서 매초당 200명이 ‘하나님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검색엔진에 입력한다고 합니다. 매일 1,700만 명이 이 질문을 던진다는 뜻이고 82억 인구를 이 수로 나누어 단순히 계산하면 지구상의 모든 인구가 일년 반마다 한 번씩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의문을 던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의문을 갖는 모든 이가 온라인에 검색하는 것은 아니니 실제 이 의문을 던지는 빈도는 훨씬 잦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는 신의 존재에 대한 갈망이 인간에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미국 철학자 더글러스 그루타이스(Douglas Groothuis)는 “우리 모두는 현재 자연 세계가 충족시킬 수 없는 무언가 즉 초월적인 영광을 향한 깊은 갈망이나 감각을 경험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증거를 내게 보여줘.’라는 사람들의 요구는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부감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어떻게든 신을 발견하고픈 갈망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는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에 서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분들은 없습니까?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지 확신하지 못 하고 증거를 발견할 때까지 결단을 유보하고 계시는 분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던 도마를 만나보십시오.

2. 믿기 어렵다

예수님이 안식 후 첫 날 저녁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믿기 힘든 소식을 들었습니다. 현대인들이 했을 법한 답을 그는 25절에서 하였습니다.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 그는 ‘예수님의 손바닥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또 그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며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같은 논리로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와 예수님의 부활 등 성경의 기적을 믿지 못 하겠노라고 고집합니다. 그 논리는 이 기적을 자연과학으로 재현함으로써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지 못 하지만 믿고 있는 태도와 모순된다고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거기에 더해 이런 주장은 초월적 사건을 경험적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오류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선언하는 하나님,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모든 법칙을 디자인하신 분이 계신다면 그 분은 세상보다 크신 분이요, 세상밖에 계시는 분입니다. 사도행전이 말씀하십니다.

(행 7: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세상보다 크신 분의 존재와 행위를 세상 안에 있는 물리법칙으로 어떻게 설명하고 보여줄 수 있습니까? 이는 비유하자면, 저 밖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열쇠를 가로등 아래가 밝다고 거기서 찾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가로등 아래는 우리 이성과 지각이 인지할 수 있는 물리세상입니다. 저 밖의 어둠은 우리의 이성과 지각이 인지할 수 없는 초월적 세상, 영적 세상입니다. 초월적이신 하나님을 물리적 법칙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못 믿겠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이를 굳이 이름을 붙여보자면 ‘그릇된 범주의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그런데도 갈망한다

도마는 이런 편협한 생각으로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 하겠다고 고집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가족, 지인 중에도 이런 태도를 가진 이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가 구원과 영영 멀어졌다고 섣불리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태도가 불신앙을 이미 마음먹은 완고함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릇된 범주의 오류에 빠진 채 간절히 증거를 찾고 있는 갈망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도마 역시 그러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먼저 26절을 보면 그는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후 8일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 공동체에 함께 머물렀습니다.

(요 20:26) 8일 후에 제자들은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고 거기에는 도마도 함께 있었다…

만약 그가 절대 예수님을 믿지 않기로 작정했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면 이전에 여러 제자가 그러했듯 그 제자공동체를 떠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머물렀고 어쩌면 이는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시기를 기다린 것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사로의 부활사건으로 되돌아가보면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후 요단강 동편에서 예수님이 베다니마을로 가자고 하셨을 때 도마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요 11:16) 그때 디두모라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 하였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바로 옆 베다니로 가자니, 좋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야 하지 않겠나, 할 정도로 의리와 사랑이 있는 제자였습니다. 비록 지금 증거를 요구하는 불신앙에 사로잡혀 있지만 결코 은혜의 씨앗이 그의 마음에서 자라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가족이나 지인이 완고하게 기독교신앙을 거부하거나 반대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완고함 뒤에 진리에 대한 갈망이 숨어있는지도 모릅니다. 언론인이었던 조정민 씨는 교회에 다니는 아내에게 아무리 화를 내고 반대를 해도 안 되니까 교회에 잠입취재하여 광신집단에서 건져내고자 새벽기도를 따라나섰다가 그만 은혜를 경험하고 목사까지 되었습니다. 비슷한 예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도마의 불신앙이 믿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믿고 싶으나 증거를 찾지 못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두 번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의 반응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8일 만에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손가락을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에 넣어보라 하셨지만 28절에서 그는 바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요 20:28) 그러자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막상 만져보라고 하시자 그는 만지지도 않고 신앙고백에 이릅니다. 사실 그는 믿고 싶었던 것입니다. 단지 그릇된 범주의 오류에 빠진 무지함 때문에 믿지 못 하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4.  복된 믿음은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고 믿은 도마에게 예수님은 그와 다른 제자들 그리고 이후 이 사건을 성경을 통해 읽을 모든 세대를 위한 진리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보고서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진리입니다.

(요 20:29) 그때 예수님이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은 물론 덮어놓고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무조건 믿는 맹목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사기꾼과 이단사이비의 먹이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29절을 다시 설명해 보자면, 증거를 보고 믿는 것보다 말씀만 듣고 믿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진리를 명백히 이 땅을 거니셨던 예수님을 보지 못 한 채 믿고 있는, 우리를 포함한 이후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이 두 가지 믿음은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는 경험하는 방식입니다. 기적, 환상, 기도응답, 체험 등을 통해 믿는 것이 첫째 증거를 보고 믿는 방식이라면 사도들의 증언을 기록한 이 말씀, 성경을 듣고 읽고 믿는 것이 둘째 말씀만 듣고 믿는 방식입니다. 이 두 가지가 종종 섞여 있기는 하지만 이 중에서도 두 번째 방식이 더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방식으로만은 못 믿겠다는 이들은 기적, 환상, 체험 등 무엇이라도 보여주면 믿겠다는 첫 번째 방식을 고집합니다. 첫 번째 방식이 이성, 오감을 의존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방식은 영성, 믿음을 의존합니다.

두 번째 방식이 더 복된 이유는 이성보다 영성이, 오감보다 믿음이 훨씬 더 거대하고 위대한 진리를 잘 보고 깨닫고 경험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오감이 우리의 두 눈과 감각을 의존하는 것이라면 영성과 믿음은 여기에 적외선안경을 쓰고 지뢰탐지기계까지 쓰는 것입니다. 맨눈으로는 가로등 아래 이성의 빛이 비취는 땅만 보고 그 아래 지뢰가 숨겨져 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적외선안경으로는 저 넓고 거대한 어둠속에 길도 또렷하게 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지뢰까지 감지해 냅니다. 영성과 믿음의 눈을 열게 해주는 것은 욕망과 편견에 좌우되는 기적, 환상,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기록하신 이 풍요롭고 깊이있고 지혜로운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5. 말씀에 뿌리내린 믿음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가 이 진리를 잘 보여줍니다. 지옥에 떨어져 괴로워하던 어리석은 부자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하기를, 아브라함 품에 안식하는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보내 자신처럼 어리석은 형제들에게 회개하도록 경고해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이미 율법서와 선지서가 있으니 그 성경을 읽고 회개할 수 있다고 답합니다.

(눅 16:29)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율법서)와 예언자(선지서)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부자는 그들이 성경을 읽는 것으로는 안 되고 죽은 이가 살아서 가는 기적을 경험해야 믿을 것이라고 합니다.

(눅 16:30) 그때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그러나 아브라함은 명백하게 성경을 듣고 믿지 않으려는 이는 기적을 체험하고도 믿지 못 할 것이라고 답합니다.

(눅 16:31)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비록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말씀이 기적보다 더 강력하고 풍요롭게 믿음을 일으키는 능력이기에 말씀을 듣고 믿지 않는 이는 기적을 보고도 결국 믿음에 이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헤렌 켈러가 쓴 글이 좋은 비유가 됩니다. 한 시간 동안 숲을 산책하고 온 친구에게 뭘 보았느냐고 묻자 그는 별 것이 없었다고 답합니다. 그녀는 놀라며 쓰기를, 시각장애인이자 청각장애인인 자신도 숲에 들어가면 얼마나 많은 풀벌레들의 진동과 바람의 감촉과 스치는 이파리들과 발에 채이는 뿌리들, 피부를 어루만지는 햇살과 경이로운 숲의 생명을 만나고 올 수 있는데 어떻게 두 눈과 귀를 가진 친구는 아무 것도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 했다는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영성의 눈과 믿음의 귀를 잃은 이는 물리적 세상과 초월적 세상을 가득 채운 하나님의 영광과 일하심을 전혀 보지 못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닫힌 눈과 귀를 열어 저 우주의 별들보다 더 무궁무진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듣게 해주십니다. 육체의 눈과 귀와 손으로 보고 듣고 경험하는 증거의 보잘것없는 한계를 넘어 끝도없는 창조세계와 구원의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증거를 보고 믿는 것보다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 더 복되고 복됩니다. 그렇기에 사도 요한은 오늘 우리를 위해 이 진리의 말씀을 기록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요 20:31) … 이것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여러분이 믿게 하고 또 여러분이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의 증거를 보고자 하는 이들은 그러므로 이 진리의 성경이 우리의 닫힌 눈과 귀를 열어주시기를 간구하며 겸손히 듣고 읽고 묵상하고 또 전해야 합니다. 그런 이에게 또 그런 이로부터 진리를 듣는 이에게 예수님은 도마에게 하신 것처럼 친히 나타나셔서 당신의 살아계심의 증거를 보게 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또 여러분에게서 복음을 듣는 이의 입술에서 도마의 이 고백이 나오기를 축복합니다.

(요 20:28) 그러자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