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2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기적의 바다”(요한복음 21:1-14) – 김도완 목사

6월 21, 2025

Series: 주일예배

Book: 요한복음

요 21:1-14/기적의 바다

250621 주일설교

1. 교회의 패배감

세계교회는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한국과 미국의 교회는 반대로 깊은 패배감에 젖어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거센 세속화의 물결에 교세는 날로 줄어가고 교회의 위상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습니다. 노회와 총회에서 목회자들을 만나면 다들 버티는 게 장하다며 측은히 여기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봅니다. 신학교 입학생들이 없어 통폐합하는 신학교가 속출합니다. 소수의 교회가 성장한다지만 사실상 이미 믿는 자들의 수평이동에 의한 것입니다. 그 증거로 성장하는 교회에서조차도 세례받는 새신자들이 별로 없습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여서 어디 가서 기독교인이라고 자랑스럽게 밝히지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자이나 교인, 교계에 널리 퍼진 이런 패배감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다시 부흥의 시대가 오기를 마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우리보다 더 깊은 패배감에 시달리던 제자들을 만나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디베랴바닷가의 일곱명의 제자들입니다.

2. 낙심한 제자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마리아 개인에게 나타나신 것을 제외하면 제자공동체에게는 두 번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21장으로 넘어오면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 호수의 디베랴마을에 접한 바닷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 호수로 내려왔을까요? 아마 그 답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여제자들이 들은 이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막 16:7) ‘너희는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예수님이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그들을 만날 것이라고 알려 주어라.’

그러나 갈릴리로 온 제자들의 모습은 부활의 주님을 기다리는 기대에 찬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제자들이 7명 뿐입니다. 다섯 명의 제자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그리고 3절을 보면 제자들은 주님을 기다리며 기도하거나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지 않고 물고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3년 전 주님이 그들을 바로 이 바닷가에서 부르시며 ‘이제는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그들은 잊었던 것일까요? 아니, 불과 얼마 전 예루살렘에서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 죄사함을 전파하라고 하신 말씀을 잊었던 것일까요? 여전히 기세등등한 유대인들의 위협 아래서 언제까지일지 모른 채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던 그들은 지치고 낙심하고 주님을 만날 기대를 저버린 듯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이 해변에 서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소리치셨을 때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 합니다. 게다가 그 날 밤 한 마리도 잡지 못 한 그들은 아마 더 지치고 낙심했을 것입니다.

예배에서 뜨겁게 주님을 만난 성도도 이런 낙심과 패배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해결되지 않는 가족과 관계와 재정과 건강의 문제 앞에서 주일에 만난 주님은 다시 멀리 떠나신 듯 보입니다. 사역의 열매가 없고 일터에서도 뜻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더 낙심합니다. 그렇게 낙심할 때 우리가 쉽게 잊어버리는, 본문의 제자들도 잊어버린 교훈을 주님은 다시 일깨우기를 원하십니다.

3. 기적의 주님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면 고기가 잡힐 것이라고 소리치셨습니다. 8절은 배가 육지에서 백 여미터 떨어졌다고 했으니 주님은 큰소리를 외치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했던 것인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했다가 무거워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7절은 그제서야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어떻게 알아보았을까요? 그는 3년 전 그 새벽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 한 그 새벽 요한과 야고보 형제가 베드로, 안드레 형제에게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았던 아침을 말입니다. 그들은 3년 전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고 3년 전과 똑같은 진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방금 배웠습니다.

3년 전처럼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얻어 보려고 밤을 새워 고생합니다만, 아무 것도 얻지 못 합니다.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얻어보려고 애쓰지만 손에 쥔 것이 없습니다. 그토록 자신 있었던 건강도, 남부럽지 않게 모았다고 생각한 재산도, 온 힘을 다해 양육한 자녀도 어느 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스물스물 사라지고 빈 손만 남습니다. 나는 아직 많이 가졌는데요? 곧 사라집니다. 마침내 코에 붙어있는 숨 한 모금마저도 사라지는 날이 금방 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에 대해 이렇게 상기시켜셨습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들의 텅 빈 그물을 가득 채우는 것은 3년 전이나 지금 이 갈릴리 바닷가에서나 그리고 이천 년 후 지금 이 미국땅에서나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깊은 곳에 던지라 하시면 거기서 고기가 가득 잡힙니다. 오른쪽에 던지라 하시면 거기서 고기가 가득 잡힙니다. 오늘도 주님이 가라 하시는 곳으로 가서 던지라 하는 곳에서 그물을 던지는 이는 가득히 고기가 차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이 이렇게 상기시키셨습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들의 그물이 가득 찬 것처럼 3년 전 주님을 만났을 때처럼 이 갈릴리 어부들의 마음도 벅찬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기쁨으로 가득 차기를 원하십니까? 가정이 사랑으로 가득 차기를 원하십니까? 일터가 감사로 가득 차기를 원하십니까?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까? 밤새 쉬지 못 하도록 여러분을 몰아붙이는 고집과 욕심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경험과 계획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랑과 허영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걱정과 두려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겸손히 주님이 무어라 하시는지 귀기울여 들으십시오. 주님이 깊은 곳이라 하시는지, 오른쪽이라 하시는지 혹은 무릎꿇는 기도의 자리라 하시는지, 순종하는 겸손의 자리라 하시는지 귀기울여 들으십시오. 바로 거기서 여러분의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가득 차는 기적을 경험할 것입니다.

4. 풍요의 주님 

패배감에 젖은 교회가 들을 음성도 바로 이것입니다. 7명의 제자들이 기록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7은 성경에서 3과 더불어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창조는 7일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성전의 촛대는 7개의 대를 가졌습니다. 제단에는 향을 일곱 번 뿌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7번씩 70번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소아시아의 교회수가 일곱이었던 것도 그 지역의 교회가 우연히 일곱 개였기 때문이 아니라 일곱 교회를 전체 교회의 대표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호숫가의 제자 7명은 전체 제자공동체의 대표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낙심한 제자 일곱 명에게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패배감에 젖은 모든 시대의 교회에게 나타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7절을 보면 요한이 가장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베드로는 가장 먼저 예수님에게 달려갔습니다.

(요 21:7) 그때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 하고 말하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르고 물에 뛰어들었다.

교회에는 요한처럼 이해가 빠른 이들이 있고 베드로처럼 섬김에 앞장 서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면 다른 제자들처럼 이해가 느린 이들도 있고 섬김에 주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6절과 11절은 주님의 몸된 교회가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참된 공동체를 이룰 것임을 의미합니다.

(요 21:6) …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요 21:11) … 이와 같이 고기가 많아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9절을 보면 주님은 제자들 모두를 당신의 풍요로운 식탁으로 초청하십니다. 생선과 떡으로 준비된 그 식탁은 다시 한번 제자들이 잊고 있던 진리, 오천 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주님의 풍요로우심을 상기시킵니다.

(요 21:9)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고 빵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 때도 제자들은 오병이어로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걱정하고 탄식했지만 주님은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풍요로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명하시면 고기떼가 모이고 빵과 생선이 넘쳐나고 파도가 잠잠케 되고 죽은 이가 살아나십니다. 할렐루야! 제자들이 주님의 큰 능력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전능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5. 사명의 주님

그 풍성한 하늘의 식탁을 마련하는데 주님은 기꺼이 우리도 기여하게 끼워 주십니다. 10절을 보면 제자들이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요 21:1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 잡아 온 고기를 좀 가져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왜입니까? 주님이 한 다섯 명분을 준비하셨는데 보니까 일곱이네, 생선 좀 더 가져와야겠다 하신 것입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분에게 생선이 부족하여 제자들의 고기가 필요하셨던 것일까요? 아니, 그 반대입니다. 주님에겐 아무 부족한 것이 없지만 제자들이 수고한 열매를 받아주셔서 그들도 이 풍성한 식탁에 기여하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신이 나서 물고기가 가져다가 주님과 함께 구워먹으며 배부를 뿐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사명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봉사와 헌금과 수고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풍요로우신 주님은 돌들을 들어 찬양케 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드시며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나라를 세우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주님이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이 승리하는 팀에 끼워주신 것입니다. 모든 선수들이 국가대표선수가 되고 싶어합니다. 얼마나 고되게 연습하고 절제하고 희생해야 합니까? 그런데 왜 들어가려 합니까? 그 자체가 영광이며 은혜며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수고하고 자랑할 것도, 희생했다고 억울해 할 것도 없는 이유입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스러워 해야할 이유입니다.

므로 천사도 부러워 하는 복음전파의 사명은 짐이 아니라 놀랍고 은혜로운 특권입니다.

6. 성만찬의 주님

주님은 이 놀라운 특권을 풍성한 당신의 식탁에서 제자들을 배불리 먹이심으로 부여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의 이 식탁은 성만찬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의 성만찬은 오늘 우리가 예배 중 하듯 의식이 아니라 제자들과의 식사자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을 모신 성도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 주님의 희생을 감사하며 식사를 하는 그 자리가 곧 성만찬입니다. 언제입니까? 우리가 예배를 마칠 때마다 주님께 감사하며 음식을 나누는 저 친교의 자리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이 자리마다 주님의 성령이 함께 하셔서 우리의 육신을 채우듯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우리의 영에 채우시고 우리를 사명의 자리로 부르고 계심을 깨달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친교부원들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이런 은혜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잡은 고기를 좀 가져와 이 식탁에 올리라 하셨던 것처럼 친교부원들에게 국과 밥을 좀 가져와 이 풍성한 만찬을 준비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패배감에 젖은 교회는 주님의 영으로 예배할 때뿐 아니라 풍성한 식탁으로 친교할 때에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바를 기다리라는 말씀으로 우리의 텅 빈 영혼의 그물을 성령으로 가득히 채우시고 굶주리고 방황하는 오천 명을 먹이시고 천국잔치에 낄 수 있는 사명의 복을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밤 새 수고하고도 지치고 낙심한 여러분의 그물이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기쁨과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