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9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사랑하는가”(요한복음 21:15-25) – 김도완 목사

6월 28, 2025

Series: 주일예배

Book: 요한복음

요 21:15-19/사랑하는가

250629 주일설교

1. 죄와 죄책감

2015년 일본에서 ‘유카와 하루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42세의 일본인 유카와 하루나씨가 당시 국제적 이슈로 떠오른 이슬람국가(ISIS)에 포로가 돼 무참히 살해된 동영상이 공개되었습니다. 이 때 그의 아버지가 언론에 한 인터뷰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정부와 관계자 분, 국민들에게 큰 폐를 끼쳐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뜻을 해석해 보자면, 자신의 아들이 부주의하게 IS지역에 방문하여 포로가 되는 바람에 정부관계자들이 불필요한 수고를 하게 만들고 국민들이 걱정하게 만들었으니 큰 폐를 끼쳤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아마 미국에서라면 사뭇 다른 인터뷰가 나왔을 것입니다. 아들은 부당하게 포로가 되었으며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고 IS는 용서받아서는 안 되고 자신은 정말 슬프다,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왜 당당한 미국부모와 달리 일본부모는 억울한 일을 당한 아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할까요? 언론은 일본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죄책감의 문화에 주목했습니다. 일본과 깊은 문화적 영향을 주고받은 한국사회에도 널리 퍼져있는 이 죄책감은 자녀들이 늘 듣는 ‘어디 가서 폐끼치지 마라’는 관용어에도 잘 드러납니다. 미국부모는 ‘어디 가서든 당당하라’고 가르치는데 비해 ‘문제를 일으키거나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가진 한국이나 일본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수줍다는 인상을 줍니다.

죄책감은 타인에게 실망이나 손해를 끼치거나 고통을 주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인식입니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의식입니다. 기독교신앙이 다루는 핵심개념 중 하나입니다. 최근에 일부 사회과학은, 죄책감을 도덕을 강제하기 위해 지배자가 심어준 거짓의식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한 편협한 생각입니다. 죄책감은 실제하는 죄가 불러일으키는 피할 수 없는 의식입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부모를 실망시킨 자녀는 깊은 자책감을 느끼고 타인에게 해친 이는 마음에 고통을 느끼고, 부정한 일을 저지른 이는 이를 숨깁니다. 죄책감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끼게 하고 삶의 의욕을 저하시켜 타인과의 관계를 회피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죄책감이 없습니까? 여러분의 내면과 삶과 관계와 가정을 병들게 하는 수치심과 죄의식 말입니다. 스스로를 충분치 못 하다고 느끼게 하고 관계와 사명을 회피하게 만드는 떨치기 어려운 감정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릴 뿐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를 망하게 만드는 가장 큰문제를 죄와 죄책감이라고 선언합니다. 의와 사랑의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바로 이 죄와 죄책감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그 해결방법은 오늘 여전히 죄와 죄책감에 시달리는 현대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2.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

갈릴리호수에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숯불에 구운 생선과 떡으로 아침식사를 하신 후 베드로를 따로 불러 산책하며 대화를 하셨습니다. 20절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와 따로 걷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 21:20) 베드로가 돌아다보니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만 따로 불러 ‘네가 이 다른 제자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다소 뜬금없이 물으셨고 아직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를 몰랐던 베드로는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신 것을 보고 가장 먼저 물에 뛰어들었으며 고기를 가져오라는 말씀에 앞장 서서 그물을 끌어올렸는데 이런 행동은 3년 내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그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3년 전에도 그물과 배와 일꾼 등 생업까지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한 이 제자가 다른 어떤 제자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정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당신의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대화가 이어진 후 똑같은 사랑하느냐는 질문과 사랑한다는 대답, 양을 먹이라는 명령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똑같은 질문을 예수님이 던지셨을 때 마침내 베드로는 문득 이 대화의 의도를 깨달았습니다. 세 번이나 같은 사랑을 확인하는 질문은 베드로가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잘못,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대제사장의 집뜰 숯불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죄를 상기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떠올리고는 깊은 근심에 사로잡혀 사랑한다는 대답을 하자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세 번째로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의도가 명확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입술로 저지른,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그 죄를 그의 입술로 세 번이나 사랑한다고 고백케 만드셔서 이를 그의 회개로 받으시고 죄를 사해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으로 과거 그에게 맡겼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겨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는 일꾼에 합당하도록 새사람을 만드셨습니다.

3. 은혜의 놀라운 원리

아마 이 방식이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죄사함이 된다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만 하면 그토록 부끄러운 죄가 없던 것이 된다고? 적어도 베드로가 자신의 죄를 가지고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하고 고뇌의 밤이 있어야 하지 않나? 베드로에게 그런 밤이 없지 않았으리라 저는 생각하지만 성경이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분명 그런 밤이 있긴 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상 모든 죄책을 지고 괴로워 기도하실 때 모세혈관이 터져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질 정도로 고뇌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적어도 자신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옥고를 치르든 매질을 당하든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 가닌가? 그런 옥고와 고문과 죽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고 갇히시고 고문당하신 끝에 십자가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으셨습니다. 베드로의 죄를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아들 예수님 위에 모두 짊어지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치르게 하셨습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어리석은 양처럼 제 갈길로만 가는 우리의 죄도 하나님은 모두 예수님의 어깨에 짊어지우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죄도, 우리의 죄도 그냥 없던 것이 되는 게 아니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모두 짊어지고 그 죄값을 치른 끝에 깨끗이 씻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던진 예수님의 질문은 이런 뜻입니다. 나를 부인했다는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친구야, 네 죄값을 이미 내가 십자가에서 다 치렀다. 이제 내게는 모든 인간의 죄를 다 씻고도 남는 완전한 의로움이 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만 해도 나는 이 의를 네게 주어 너를 깨끗게 하고 내 양을 치는 위대한 사명을 다시 맡기련다. 한 번이면 몰라도 세 번이나 부인해서 면목이 없다고? 그럼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한다고 하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네가 사랑한다고 나를 부르면 너를 깨끗게 할 거다. 왜? 너를 너무 사랑하니까! 길잃은 양처럼 방황하는 너를 다시 찾아 안전한 아버지의 집에 인도하지 않으면 나는 결코 쉬지 못 할 만큼 너를 사랑하니까!

바로 이것이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던지시는 질문과 명령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으로 충분하다. 너는 씻김받았다. 너는 회복되었다. 이제 더 이상 죄와 악의 노예로 살지 말고 아버지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아라.” 주님을 사랑하지만 정말 제대로 사랑하는지 모르겠어요. 두려워하지 마시고 베드로처럼 고백하십시오.

(요 21:17) …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

4. 주님의 놀라운 계획

이런 사랑과 믿음의 고백으로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거저 얻음으로 멸망받은 죄인이 하나님나라의 위대한 백성이자 일꾼이 되게 만드는 것이 주님의 오묘한 계획, 큰그림입니다. 주님은 처음 베드로를 부르실 때부터 이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요 1:42) …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게바(반석)라고 부르겠다.’ …

그를 교회의 반석과 같은 사도로 만드시겠다는 주님의 계획입니다. 주님은 이 충동적인 제자를 택하실 때 당신을 실망시킬 것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 하셨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가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이런 충동적이고 겁많고 변덕스러운 사람 말고 알렉산더대왕처럼 강인하고 신중하고 자제력 있는 사람을 왜 택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람의 자질을 보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 7:7-8입니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약하니라. (신 7: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셔서 능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

하나님은 설명할 수 없는 사랑으로 그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감당하기 힘든 은혜의 약속을 주시고 기어이 약속대로 생명과 행복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똑똑하고 강인하고 성실하고 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이 자비로우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왜 택하여 부르셨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왜 택하고 부르셨습니까? 같은 이유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요! 세상 어떤 신이 강한 자가 아닌 약한 자를, 승리한 자가 아닌 패배한 자를, 도덕적인 자가 아닌 수치스러운 자를 택하고 사랑하고 높입니까?

신실하신 주님은 기어이 베드로를 기독교역사상 가자 위대한 전도자요, 순교자로 만드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님은 자비롭고 신실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누구에게요? 베드로처럼 약하고 실패하고 낙심한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말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이길 수치는 없습니다. 주님의 신실함을 이길 실패도 없습니다. 주님의 의로움을 이길 죄악도 없습니다. 주님이 이기신다면 우리도 승리합니다. 주님이 여러분도 위대한 성도요, 승리한 천국백성이요, 죄와 죽음을 이긴 제자로 만들어내실 줄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