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6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너는 나만 따르라”(요한복음 21:20-25) – 김도완 목사

7월 5, 2025

Series: 주일예배

Book: 요한복음

요 21:20-25/나만 따르라

250706 주일설교

1. 비교의 감옥

1984년에 개봉한 영화 아마데우스는 아데미상 8개부문을 석권한 명작입니다. 줄거리는 젊은 모짜르트의 재능을 시기한 비엔나 왕실의 궁정음악가 살리에르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이야기입니다. 살리에르는 음악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성과 부, 권력을 한 손에 쥐었지만 자신이 갖지 못 한 오직 한 가지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부러워하고 시기합니다. 그는 정신병원에 갖힌 채 끊임없이 모짜르트와 자신을 비교하다 죽어가며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되뇌입니다. “왜 제가 아닌 그여야만 했습니까? 왜 방탕하고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그런 인간에게 그런 천재성을 주셨단 말입니까?”

모짜르트 뿐 아니라 살리에르 자신까지 파멸로 몰아넣은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누리는 것에 만족하지 못 하고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시기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비교는 대궐같은 집도 감옥으로 만듭니다. 비교는 진수성찬도 모래섞인 독약으로 만듭니다. 비교는 이 땅에 지옥을 창조합니다. 비교는 친구를 적으로 만듭니다. 비교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독입니다. 비교는 우리 영혼을 중독시킵니다. 중독된 영혼은 의욕과 자존감이 떨어지고 감사와 만족이 사라지고 시기와 질투의 종기가 생깁니다. 우리는 부자가 된 친구, 명문대에 전문직의 친구 아들, 큰 집에서 사는 교우들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혼자 불행해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비교의 감옥, 시기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감사와 만족의 하나님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2. 요한과 비교하는 베드로

요한복음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지난 주 본문에서 베드로가 순교로 하나님게 영광을 돌릴 것을 예고하신 후 베드로의 반응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반응을 20절이 이렇게 보여줍니다.

(요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그는 뒤따르는 요한을 보았습니다. 그는 제자들 중 가장 어린 편이었고 예수님께 늘 가까이 머물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 가지 못 했던 골고다에서 십자가 바로 아래 머물렀고 예수님이 그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아 주기를 부탁할 만큼 신임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 바닷가에서 물고기 잡던 중 자신도 알아보지 못 한 주님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소리친 제자도 역시 그였습니다. 갑자기 그도 자기처럼 순교를 당할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요 21: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조금 전까지 그의 마음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자신의 죄를 세 번이나 사랑의 고백을 하도록 해주셔서 사하시고 특별히 자신만 데리고 산책하시며 소명까지 회복시켜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가득찼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 그의 마음은 동료 요한에게는 자신보다 편한 삶을 주시지 않을까 하는 비교하는 마음으로 감사와 감격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시기하는 마음으로 혼탁해 졌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3. 시선을 돌린 베드로

그 이유를 다시 20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예수님을 바라보던 시선을 요한에게로 돌렸던 것입니다. 시선을 주님에게서 사람에게로 옮기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헛된 경쟁과 비교, 시기에 빠지도록 만듭니다. 인류 최초로 물위를 걸은 베드로가 실패한 이유도 이것입니다.

(마 14:29) (주께서)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주님을 보면 물위도 걷을 수 있지만 시선을 돌려 세상을 보면 두려움의 바다에 빠집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보면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지만 사람을 보면 비교와 시기의 감옥에 갇힙니다. 한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의 길을 묻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뒤에도 다른 제자가 아닌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저 부자청년은 재물을 못 버렸지만 우리는 다 버리고 쫓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에 합당한 상이 있어야하지 않나요? 그에 대해 예수님은 큰상이 있을 것이라 답하시면서도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는 비교의 결과입니다. 네가 다른 이와 비교하여 스스로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꼴찌가 될 것이고, 네가 생각하는 꼴찌라고 여기는 이가 더 훌륭하다고 인정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4. 상대평가냐절대평가냐

이런 비교는 삶을 비극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2절에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21: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하시더라.

요한에게 예수님이 어떤 사명을 맡기든 베드로의 삶의 성공과 실패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셨고, 베드로가 주후 64년경 네로의 박해때 순교한 것과 달리 주후100년 경까지 요한은 오늘날의 튀르키에 에베소에서 마리아를 모시다가 자연사하였습니다. 요한이 베드로와 같이 64년경에 순교하든 100년경까지 살다 자연사하든 그것이 베드로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의 삶의 성공과 실패는 그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과의 관계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이는 ‘너는 나만 바라보고 나만 따르라. 우로 돌려 동료 요한을 볼 필요도 없고 좌로 돌려 부자 청년을 볼 없고 뒤로 돌려 파도치는 세상을 볼 필요도 없다. 요한이 네게 상주는 것이 아니다. 요한보다 잘 했다고 상주는 것도 아니다. 요한보다 못 했다고 벌주는 것도 아니다. 인생은 상대평가가 아니고 절대평가이다. 몇 등이냐가 아니고 몇 점이냐이다. 네 삶을 평가하는 것은 나다. 내가 네 삶의 상이고 능력이고 기쁨이다. 나만 바라보아야 네가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비교의 감옥, 시기의 지옥에 빠져 신음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딜 보냐, 어딜? 왜 친구를 보냐? 동문들을 보냐? 교우들을 보냐? 옆집을 보냐? 나를 봐라. 나만 봐라. 나를 보면 승리한다.” 성도의 모든 기쁨과 행복과 능력은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데서 나옵니다.

(히 12:2) 그리고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우리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위하여 부끄러움과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으며 지금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는 더 이상 세상의 자랑거리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입니다.

(갈 6:14)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이 나에 대하여 죽었고 나도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십자가가 자랑이 되자 세상에 자랑하고 부러워하고 시기하던 것이 다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예수님이 기쁨이요, 만족이요, 소망이요, 자랑입니다. 예수님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생명과 복과 만족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자꾸 남과 비교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과 복으로 우리를 채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눅 15장에서 동생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새끼 한마리 잡아주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큰아들에게 풍요롭고 너그러우신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눅 15:29) “…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 (눅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를 모르고 비교하고 자랑하고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5. 비교하지 않는 복된 인생

제가 초등학교시절 동네를 평정한 딱지왕이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때 모든 아이들이 저를 부러워해서 저처럼 딱지부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지금 그 딱지는 다 어디로 갔습니까? 제가 딱지왕이었던 것이 부러운 분이 계십니까? 얼마나 유치한 자랑이며 바보같은 부러움이었습니까? 지금 이 땅에서 자랑하고 부러워하는 돈과 쾌락과 명성이 하나님나라의 영광에 비교하면 과연 딱지조각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는 여인들의 노래소리에 그만 눈이 돌아가 시기로 다윗을 죽이려다가 스스로 미치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일단 이 여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윗을 찬양하려면 그냥 하면 되지 꼭 사울을 걸고 넘어져야 합니까? 우리도 누군가를 칭찬할 때 비교하는 방식을 쓰면 안 됩니다. 당장은 듣기 좋을지 모르나 꼭 부작용을 남깁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아나이아와 삽비라는 바나바와 자신들을 비교하다가 망했습니다. 바나바가 전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교인들의 칭송을 받자 자신들도 그런 칭송을 받으려고 전재산을 팔았는데 교회에 드리려니 아까워서 절반은 숨기고 전부라고 거짓말을 하다가 망한 것입니다. 왜 바나바와 비교하다가 망합니까? 왜 다윗과 비교하다가 망합니까? 바울은 그래서 갈라디아교회에 쓴 편지에서 남과 비교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갈 6:4) 각자 자기 행위를 살피십시오. 그러면 남과 비교하지 않고도 자기 자신이 한 일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갈 6:5)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짐을 져야 합니다.

얼마나 잘 사는지, 바르게 사는지, 복되게 사는지 주님을 보고 주님 앞에서 선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이와 비교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각자 인생의 고유한 짐이 있습니다. 모두 남의 짐이 가벼워 보입니다만, 착시현상입니다. 각자의 짐은 각자에게 가장 적당한 짐이며 그 짐을 기쁘게 질 때 얻을 큰 상과 은혜가 바로 그 짐보따리 속에 있습니다. 짐보따리가 무거울수록 더 큰 상과 더 풍성한 은혜가 그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내 것은 왜 이렇게 무거워? 사실은 상과 은혜가 더 많이 들어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신실한 성도는 마치 잘 달리는 경주마와 같습니다. 경주마는 눈 옆에 눈가리개를 붙입니다. 모래가 튀거나 햇살에 눈이 부시는 것을 막아주는 동시에 시야가 앞으로만 트여 있어 오직 결승선만을 바라보고 뛰게 도와줍니다. 눈가리개가 없으면 햇살과 모래에 보호받지 못 할 뿐 아니라 주변에 온갖 사람과 시설물과 다른 말들을 보고 놀라고 흥분해서 엉뚱한 곳으로 달리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도 믿음의 눈가리개를 붙이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위협에 놀라지도, 타인과 비교하느라 시기하지도 않고 오직 감사와 기쁨으로 믿음의 선한 경주를 달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시선을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헛된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참된 생명과 상을 주시는 예수님이십니까? 뛰어난 경주마처럼 주님만 바라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