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7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보이지 않는 하나님”(베드로전서 1:7-9) – 김도완 목사

7월 26, 2025

Series: 주일예배

벧전 1:7-9/보이지 않는 하나님

250727 주일설교

1. 보지 못 하는 부부의 사랑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성산 장기려 박사님을 아십니까? 자신을 의사로 만들어 주시면 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서원을 지키기 위해 부산복음병원을 설립하여 빈자의 아버지로 불리며 평생 사랑의 의술을 행하신 분입니다. 6.25전쟁 때 둘째 아들만 데리고 월남한 그에게 주변의 많은 이들이 더 이상 북에 남은 아내를 만날 가능성이 없으니 재혼하라고 권했습니다. 그 때마다 큰 아들과 함께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를 여전히 사랑한다며 이를 거절했습니다.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나는 한 여인만을 사랑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잠시 동안은 그저 혼자 살겠습니다.”

1991년 남북관계의 개선으로 이산가족의 편지왕래가 열렸을 때 마침내 부부는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김봉숙 여사의 편지입니다.

“그립고 보고 싶은 당신께, 기도 속에서 언제나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아이들이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저는 마음속의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그 때마다 당신은 이렇게 하면 어떠냐고 응답해 주셨고 저는 그대로 하였습니다. 잘 자란 우리 아이들, 몸은 헤어져 있지만 저 혼자 키운 것이 아닙니다.”

짧은 신혼에 이어 결혼생활의 대부분을 죽을 때까지 휴전선의 남과 북으로 헤어져 얼굴을 보지도, 손을 한 번 잡아보지도 못 한 부부입니다만, 늘 곁에서 보고 동거하는 그 어떤 이들의 사랑인들 이들보다 더 뜨겁고 진실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보지도 못 하는 부부의 사랑이 늘 서로 보며 살아가는 이들의 사랑보다 더 진실할 수 있다는 이 역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를 밝혀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요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보았기에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행복하도다.” 하시니라.

보지 못 하고 믿는 이들이 보면서 믿는 이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역설 말입니다.

2.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사랑

최근 몇몇 교우들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설교처럼 저도 하나님과 동거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또 다른 교우가 상담 중에 던진 질문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동거할 대상, 돌아갈 대상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저 자매님과 결혼하세요, 저 형제님에게 돌아가세요, 라고 했다면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혼이나 동거를 어떻게 하는지, 누군가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너무나 명확하게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가 않으니 그 분과 동거함이 어떤 것인지, 그 분께 돌아감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쏭달쏭합니다. 이처럼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오늘 본문 18절에서 사도 베드로가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이 글을 쓰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며 동거하고 대화하고 함께 식사하고 사랑하고 마침내 구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오늘날 튀르키에 지방에 흩어져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대부분은 그 예수님에 대해 듣기만 했을 뿐 만나 본 적도, 대화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이나 그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 했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믿었습니다. 그 분으로 인해 크게 즐거워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들에게 이 보이지 않는 예수님은 실재였습니다. 마치 곁에 있는 아내를 사랑하듯 예수님을 사랑했고, 낮에 만난 친구를 신뢰하듯 예수님을 믿었고, 오랜 만에 만난 가족을 기뻐하듯 예수님으로 인해 즐거워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보이는 이처럼 이렇게 사랑하고 신뢰하고 즐거워하는 상태를 사도 베드로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저에게 질문하셨던 교우들이 궁금한 것, 우리 모두가 궁금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마치 보이는 연인처럼 사랑하고 신뢰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는가? 그 방법을 알면 우리도 주님과 동거하고 주님께 돌아가기가 어렵지 않을텐데 말입니다. 그 방법을 앞서 소개한, 서로 보지도, 만나지도 못 하면서도 진실하게 서로 사랑한 장기려 박사 부부에게서 힌트를 얻습니다.

3. 따뜻하고 생생한 편지

첫째, 휴전선 너머 떨어져지내던 그들이 서로를 곁에 있는 듯 가깝게 느끼게 해 준 것은 편지였습니다. 소설이 사랑하는 이유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 독자가 마치 사건의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마음과 생생한 묘사를 담은 편지는 곁에 없는 이도 마치 곁에서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줍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이 만난 예수님의 모습과 자비로운 인품과 그 권위있는 말씀과 희생의 죽으심과 영광의 부활을 생생하게 이 서신을 읽는 디아스포라유대인에게 가르쳤습니다. 그 분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키셨는지 생생하게 간증했습니다. 떨어져 있을 때는 그들에게 또 편지했습니다. 바로 이 베드로전서와 후서가 그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이 가르침과 편지를 통해 예수님을 마치 본 것처럼 생생하게 느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이 편지를 읽음으로써 주님의 마음과 계획과 그 하신 일과 하실 일까지 모두 생생하게 경험하고 들을 수 있습니다. 이 편지가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부터 하나님나라의 완성까지 모든 당신의 구원역사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과 아들 예수님과 사도들까지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이루시며 그 전 과정을 생생하게 이 편지 성경에 기록해서 성령의 역사로 완성하여 건네주셨습니다. 이 성경이란 편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새벽의 갈리리 바닷가를 산택하고 용광로같은 유대광야에서 목마름을 견디고 골고다의 처절한 언덕길을 오르며 마침내 무덤이 깨고 영광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주님과 동거할 수 있습니까? 먼저 주님의 이 편지를 읽으십시오. 성령님이 여러분을 주님 곁에 서서 그 분의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체험을 하도록 해주십니다. 이보다 더 주님의 생각과 모습을 잘 보고 느끼게 해줄 방법은 없습니다.

4. 즐겁고 다정한 대화 

둘째, 편지를 읽으며 그 분 곁에 서는 경험을 했다면 이제 그 분과 대화를 시도해 보십시오. 이를 영적 대화라고 부르겠습니다. 장기려 박사 부부가 서로를 더 가깝게 느끼게 해준 방법이 이것입니다. 김봉숙 여사의 편지를 다시 보십시오.

“그립고 보고 싶은 당신께, 기도 속에서 언제나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아이들이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저는 마음속의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그 때마다 당신은 이렇게 하면 어떠냐고 응답해 주셨고 저는 그대로 하였습니다. 잘 자란 우리 아이들, 몸은 헤어져 있지만 저 혼자 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물어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 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영적 대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필요를 얻어내고 문제를 해결받는 수단이 아닌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대화임을 이해하면 훨씬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걸어가면서도, 운전하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늘 주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조용한 시간을 내어 마주 앉으면 훨씬 대화가 깊어집니다. 대화 없이 부부가 친밀해질 수 없듯이, 대화 없는 친구가 신뢰를 쌓을 수 없듯이 대화 없이 주님과 동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늘 기도로 대화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람과 대화하기를 피하고 싶을 때는 언제입니까?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무례함과 무심함에 상처를 받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완전히 이해하시고 세심하게 배려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도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 분과 나누는 대화만큼 우리에게 유익하고 위로를 주고 기쁨을 주는 만남은 없습니다. 그 분은 이 복된 대화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대화를 즐기고 누리는 이는 주님과 동거하는 것이 무엇인지 금방 이해합니다.

5. 행복한 신혼의 추억

셋째는 장기려 박사 부부가 가진 행복한 신혼의 기억입니다. 편지와 영적 대화가 두 사람이 서로의 부재 중에도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도운 것은 이미 부부로서 한 몸이 되어 행복한 신혼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과 기도를 통해 주님을 가깝게 느끼고 사랑하고 신뢰하려면 먼저 그 분의 영적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 경험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똑같은 질문은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던졌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거듭 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요 3:5)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날 때 우리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마음을 편지에서 읽고 하나님의 음성을 기도로 듣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기뻐하는 결혼생활이 시작됩니다. 이 거듭남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그러나 전심으로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아들을 고쳐달라고 주님을 찾아온 한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막 9: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귀신들려 물과 불에 뛰어드는 아들을 보는 이 아버지가 얼마나 절박하고 간절했을까요? 거듭나기 위해 이런 절박함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난과 시련과 같은 충격이 없이는 여간해서는 우리의 눈을 가린 무지와 교만, 허영과 게으름의 비늘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충격 속에서 3일이나 어둠 속에 갇혀 지내다가 마침내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며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사울은 거듭나 바울이 되었습니다. 이 3일간 그는 큰 충격과 놀람 속에 회개와 간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참 믿음을 갖게 해달라고 간구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기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주님,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성령으로 거듭나 저의 눈의 비늘이 떨어져 주를 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