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26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은과 금보다 고귀한 이름”(사도행전 3:1-10) – 김도완 목사

10월 25, 2025

Series: 주일예배

Book: 사도행전

행 3:1-10/은과 금보다 고귀한 이름

251026 주일설교 사도행전

1. 기대보다   선물

오늘 본문은 성전 미문에서 앉아 구걸하던 어느 지체장애인이 베드로와 요한 사도로부터 고침을 받는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예루살렘교회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순절성령세례사건으로 탄생한 직후 처음 나타나는 기적사건이며 신생교회를 향한 유대교의 박해가 시작되게 만든 계기이기도 합니다.

성전미문은 아름다운 문이란 뜻이며, 위의 그림을 보시면 알 수 있듯, 당시 성전의 동쪽에 자리잡은 main entrance 정문으로 감람산을 내려와 기드론 골짜기을 넘어 입장한 당시 대부분의 순례객이 이용하여 가장 많은 이들이 출입한 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동정을 구하려던 그 장애인이 다른 문이 아닌 이 곳에 자리잡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가 바란 것은 본문에도 나오듯이 너그러운 이들로부터 나올 약간의 돈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가진 장애로 일을 하지 못 했을 그에게 가장 절박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대치 못 한 것을 얻었습니다. 7-8절입니다.

(행 3:7) … 그러자 그는 곧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행 3:8) 벌떡 일어서더니 걷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걷기도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첫째는 육체적 치유입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자신의 발로 일어나 걷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그로서는 다시 태어난 날이요, 새 인생이 시작된 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못지않게 아니 더 크게 얻은 생애 최초의 사건이 또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영적 탄생입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성전에 들어감이 왜 영적 탄생으로까지 의미부여가 될까요? 그가 태어나 처음으로 성전 안에 발을 디뎠기 때문입니다. 레 21:17을 보십시오.

(레 21:17)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너의 자손 중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니라.”

장애가 있는 아론의 자손에게는 제사장직을 맡기지 말라는 이 구절을 확대해석한 당시 유대교는 모든 장애인이 부정하니 성전출입을 할 수 없다 가르쳤습니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걸어본 적도 없지만 성전에도 들어가 본 적도 없었습니다. 성전을 자유롭게 출입하는 이들을 보며 얼마나 부러웠을 것이며, 그들이 드는 율법의 말씀, 그들이 드리는 제사가 얼마나 부러웠을 것입니까! 이 복된 사람은 그 날 성전 문 앞에 왔다가 육체와 영이 다 치유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오늘날 영적 성전인 교회에 나오는 이들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민생활이 외로워 친구가 필요하여 교회에 나오는 이들도 많습니다. 혹 사업에 도움이 될까 하여 나오는 이들도 없지 않습니다. 소수인종이라 무시당하는 힘든 삶에 위로가 필요하여 나오는 이들도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장애인처럼 위로와 관심과 필요를 얻을까 하여 나왔던 이들이 몸과 마음이 다 치유받아 새생명 얻는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교회가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기적이 교회에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가 품고있는 엄청난 보화, 바로 한 이름때문입니다.

2. 은과 금보다 귀한 이름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은 가련한 이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행 3:6) 베드로는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가 가진 것을 너에게 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하고

은과 금이 없다는 말은 좀 의아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전 2장 말미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2:44-45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교회가 많은 구제를 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들에게 그 가련한 남자에게 줄 동전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 아닐 겁니다. 정말 돈이 문제였다면 ‘이보게, 내가 빈손으로 왔는데 저녁기도시간에는 내가 은화를 좀 들고 오겠네. 그 때 다시 보세.’라고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은, 그 장애인에게 은과 금보다 더 필요한 것을 주겠다는 말이요, 어떤 은과 금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주겠다는 말입니다. 그 귀한 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왜 예수의 이름이 더 귀합니까? 그가 바라던 돈을 받았다면 얼마였든 결국 곧 다시 그 구걸하는 자리로 돌아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은 그를 그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습니다. 더 이상 구걸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그를 하나님의 집 성전으로 인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그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합니다. 아무리 큰 돈도 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이 남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 때문에 고생고생하신 분들은 돈이 간절히 더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돈과 안락함에 중독되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약중독자는 마약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상인은 마약 없이 잘만 삽니다. 알콜중독자는 술 없이 못 살겠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술 안 마시고도 행복하게 잘 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돈이 없어 못 살겠다 하는 것은 정말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에 중독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우리가 버는 것의 절반도 못 벌고도 잘 사셨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졌던 것을 다 합쳐도 여러분 한 집의 자산보다 못 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과 사도들은 여러분보다 더 불행했습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렇게 불행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불행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들으며 여기 앉아있습니까? 미친 짓 아닙니까! 돈이 부족해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돈이 주는 안락함에 중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 집, 이 정도 차, 이 정도 음식은 먹어줘야 제대로 사는 것이란 생각에 가스라이팅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돈을 숭배하는 자본주의사회 미국에서 사는 우리들의 중독증세가 심각합니다. 우리만큼 없어도 살고 없으면 적응합니다. 물론 마약중독에서 벗어나려면 금단현상을 견뎌야 하듯 돈중독에서 벗어나는데도 금단현상이 심각하니 고통을 감내해야 하긴 합니다.

그 중독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는 능력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요즘 경제적 자유를 얻어 빨리 은퇴하는 삶을 무슨 유행처럼, 행복한 삶의 전형으로 사람들이 바란다는데, 예수님이 돈이 많으면 너희가 자유로워지리라고 하지 않으시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이야말로 오늘 은과 금을 바라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함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3. 보화를 품은 교회

교회가 이 시대에 여전히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원화된 현대사회에는 교회 말고도 종교기관이 많은데 굳이 또 하나의 종교기관으로 교회가 필요할까요? 심지어 탈종교화시대라 하여 이젠 종교 없이 과학과 이성으로 삶을 충분히 꾸려갈 수 있다는데 구태의연해 보이는 교회가 왜 필요합니까? 교회는 세상에는 없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필요한 줄조차 모르는 보화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보화가 바로 세상에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예수의 이름입니다.

다시 한번 베드로의 이 선언은 은과 금이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이 이름이야말로 은과 금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가장 값진 것이기 때문에 준다는 의미입니다.

(행 3:6) 베드로는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가 가진 것을 너에게 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간직한 공동체는 교회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적 삶이 무엇인지 보여줄 곳도 교회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보잘 것 없고 실패하기도 하는 교회로 인해 회의감이 들어도 교회를 대신할 공동체가 없습니다.

덩케르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세를 역전시킨 결정적 작전 중 하나로 꼽히는 덩케르트철수작전을 다룹니다. 1940년 5월 26일부터 열흘 간 프랑스 덩케르트해변에 고립된 연합군 34만을 안전하게 영국으로 철수시킨 작전으로, 만약 실패했다면 이 병력은 독일군에 몰살되어 반격할 기반을 완전히 잃고 2차 대전을 결코 승리하지 못 했을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때 동원가능한 군함은 226척 뿐이었고 이들로는 도저히 34만의 병력을 철수시키지 못할 것이 불보듯 뻔했습니다. 연합국은 군함보다 세 배나 많은 600여척의 상선, 어선, 요트 등 민간어선을 동원했습니다. 800여 척이 넘는 이 배들로 거의 병력의 손실없이 철수에 성공했습니다. 우람하고 빠른 군함만 군인을 살린 것이 아닙니다. 비린내나고 느려터진 어선도, 박스를 싣는 무거운 상선도, 뱃놀이나 하던 요트도 모두 군인을 살렸습니다. 생명을 구하는데 군함이면 어떻고, 어선이면 어떻습니까!

교회가 이와 같습니다. 멋진 교회도, 볼품없는 교회도 있습니다. 큰교회도, 작은교회도 있습니다. 현대적인 교회도, 전통적인 교회도 있습니다. 성공적인 교회도, 실패한 듯 보이는 교회도 있습니다. 모두 추수할 것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부족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교회입니다. 포장지가 어떠하든지 생명을 주는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줄 수 있는 교회라면 하나님이 이 시대에 쓰십니다. 어떤 모양이든 교회가 이 시대에 여전히 필요한 이유입니다.

4. 우리에게 필요한 이름

우리교회가 이 세상에 필요한 이유, 우리가 세상에 주어야 하는 선물도 바로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성공입니까, 더 큰 집과 차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야말로 힘을 잃고 쓰러진 우리 영혼이 일어나 걷고 뛰며 새 인생을 시작하게 만드시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야말로 부정하여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경배하게 만드시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면서 바라보아야 할 것도 바로 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찬양팀의 멋진 찬양이 기분을 좋게합니까? 목사의 설교가 왠지 위로가 됩니까? 점심이 맛있고 구역식구들과의 수다가 즐겁습니까? 열심히 봉사한 것에 보람이 느껴지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은 얼마나 불러보았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은 진정으로 높여드렸습니까? 예수님의 음성은 얼마나 들었습니까? 예수님의 영이 계시지 않으면 찬양도, 설교도, 친교도, 봉사도 모두 생명 없는 짓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마음을 예수님께로 향하여 그 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