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9:14-17/굳어버린 가죽부대
251102 종교개혁주일설교
1. 왜우리교회는다른가
새로운개혁교회가 개척된 후 교우들이 한 여러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예배에는 왜 주기도문을 안 해요? 사도신경은 왜 안 하나요? 성가대는 왜 없나요? 장로님, 권사님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려니까 어색해요. 여자장로도 뽑아야 해요? 시기상조 아닌가요? 당회가 있는데 운영위원회가 왜 필요합니까? 두어 차례 설교 때 답을 하고 사석에서도 여러 차례 답했습니다만, 정기적으로 설명을 드려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마침 지난 주일이 종교개혁기념주일이기도 해서 이 주제를 다루기에 적절하다 생각됩니다. 종교개혁의 열매로 시작된 개신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지 않으면 금방 개혁의 주체에서 개혁의 대상으로 변해 버립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여서 새롭게 되겠다는 의지를 담은 새로운개혁교회가 그 이름입니다만, 새롭다와 개혁은 의미도 중복되지요, 역시 끊임없이 개혁을 시도를 하지 않으면 전혀 새롭지도, 개혁도 안 되는 교회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제가 작년부터 매일 30분에서 1시간씩은 달리기를 하고부터 느끼는 것인데 운동과 스트레칭을 정기적으로 하지 않으면 금방 몸이 굳어버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근육은 정기적으로 써주지 않으면 굳기 시작합니다. 신앙과 교회도 정기적으로 깨워주지 않으면 금방 매너리즘에 빠져 굳은 근육처럼 바뀝니다.
자, 그럼 왜 우리 교회는 예전교회와 어딘가 다른 모습일까요? 비슷한 질문을 던진 이들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2. 왜금식하지않는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제 막 제자그룹에 합류한 세리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였습니다. 마태의 동료였을 세리들과 죄인들 즉 율법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초대받아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죄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는 것을 비난하였습니다. 그 후에 이어지는 대화가 오늘 본문입니다. 이번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질문을 하는데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고 이렇게 배부르게 먹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마 9:14) 그때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식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의아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고 대중에게 그를 메시야로 소개한 선지자인데, 그럼 그 제자들은 예수님 편이 아닌가? 그들이 바리새인과 함께 예수님을 비난하다니 어떻게 된 일이지? 몰이해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초기 역할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와 그 사명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메시야가 맞는지 확인하기도 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는 심판이 임박했으니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회개는 그 조상들로부터 그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거역한 죄를 슬퍼하고 버리기로 결단하는 것으로 그 방식이 금식이었습니다. 그는 딱 여기까지만 이해했습니다. 그들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지고 사하심으로 완전한 용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그들에게 수수께끼같이 들렸을 것입니다.
3. 이미시작된잔치
(마 9:15)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혼인잔치의 신랑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 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이 비유에서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신랑친구들은 제자들을 말합니다.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심으로 천국잔치가 시작되었고 그 잔치에 은혜로 초대받은 제자들은 감사와 감격이 가득하여 즐거워하며 먹고 마심이 마땅하지 않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죄인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 그 분의 부름을 받아 순종하는 삶을 시작한 이들은 이미 회개하고 사함을 받아 천국잔치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시고 다 이루셨다 하실 것이기에 그들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금식하며 괴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 앞에 고백하고 믿음으로 그 분께 내어맡기면 됩니다. 그 은혜를 입은 이에게는 이제 슬픔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금식할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즉 여기는 결혼식장이니 검은 옷 입고 와서 울상하고 금식하고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요한과 그 제자들, 바리새인들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으나 여전히 자신들의 뉘우침과 경건으로 죄사함을 받을 자격을 얻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그 죄를 해결하심을 깨닫지 못 했습니다. 그들이 금식하면서 얻고자 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공로가 곧 예수님이심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금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은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일년내내 부활절
비슷한 이야기를 신학교에서 들었습니다. 한국교회에 방문한 어느 미국교회 지도자가 여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는 한 말이,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는데 한국교회예배는 아직 무덤에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국교회예배의 엄숙주의를 지적한 것입니다. 기독교예배가 안식일이 아닌 안식후 첫 날 즉 주일이라 부르는 이 날에 드리는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매주일 예배가 부활기념예배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에는 고난을 묵상하지만 부활주일에는 부활을 기념하고 기뻐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매주일예배가 부활주일과 같아야 하는데 한국교회는 매주일예배가 사순절예배고 일년에 딱 한 번 부활주일만 기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일년 내내 부활주일처럼 드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너무 엄숙하여 기뻐하면 불경하거나 죄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입니다. 사실상 유교의 엄숙주의가 교회에 스며든 것인데, 이는 결혼식장에 와서 금식하고 슬퍼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5. 새술은새부대에
예수님은 계속해서 당신이 오심으로 새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내고자 하는 금식은 하나님의 은혜 자체이신 예수님을 모신 이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그 분으로 인해 시작된 새시대에는 복음 곧 기쁜 소식으로 인해 기쁨이 충만한 복음적 삶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두 개의 비유로 알려주셨습니다. 첫째는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생베가 수축할 때 신축성을 잃은 낡은 옷이 이를 견디지 못 하고 찢어진다는 비유입니다. 둘째는 발효가 많이 되는 새포도주를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낡은 가죽부대에 담으면 부대가 터지고 말아 포도주와 부대를 모두 버리게 되니,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으라는 말씀입니다.
(마 9:17) 사람들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존된다.’
새포도주가 예수님의 복음이라면, 낡은 가죽부대는 경직된 유대교를 가리킵니다. 유대교의 경직된 신앙방식으로는 예수님의 복음을 담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의 새시대를 담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경직되지 않은 새로운 형식의 공동체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유연한 새가죽부대인 제자공동체 교회입니다.
6. 변화된시대경직된교회
한국교회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낡은 가죽부대처럼 경직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감소하는 교세와 노령화추세입니다. 2000년대 들어 폭발적인 성장세는 멈추고 정체되더니 어느 새 교세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젊을수록 더 많이 더 빠르게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가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 설득력있게 복음을 전달하지 못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최근에 제가 방문하는 몇몇 교회는 거의가, 우리교회 젊은이들이예요, 하고 인사하고 보면 제 또래 50대입니다. 최근 한인교회의 3분의 2가 교육부와 청년부, 이엠이 없다고 합니다. 극히 소수의 교회에만 청년부가 성장하는데 사실상 중소교회에서 수평이동이고 옮기는 수만큼이나 떠나고 있어서 전체교회의 청년들은 감소일로에 있습니다.
왜 청년들이 더 빨리 줄어듭니까? 간단히 답할 문제는 아닙니다만, 굳이 답을 찾아보자면 한인이민교회는 더 복잡합니다. 일단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져 청소년, 청년들이 없습니다. 거기다 과거처럼 유학이나 취업으로 건너오는 젊은이들이 크게 줄었습니다. 동시에 사회의 다원화, 세속화로 무종교를 선호하거나 타종교를 찾는 등 선택지가 많아졌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한인이민교회 절반 이상이 한 세대 안에 교회가 텅비어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한인이민교회가 당면한 숙제 중 하나는 어떻게 해서든 다음세대에게 복음의 횃불을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인교회가 달려갈 땅끝은 아프리카가 아니라 우리 가정의 자녀들과 이 지역의 젊은이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음세대선교라는 새포도주를 담기 위해 젊고 유연한 교회라는 새가죽부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세대를 수용하기 위한 첫 번째 노력은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들의 첫 관문이 예배입니다. 그들에게 익숙하고 수용에 거부감이 없는 방식으로 예배를 디자인하는 것입니다. 그 방식이 현대적 음악예배입니다. 왜 성가대 대신 찬양팀입니다. 여러분 자녀 중에 유명 세계합창단음악 찾아서 귀에 꽂고 다니는 이가 있는 분 손들어 보십시오. 모두가 Pop을 듣습니다. 지금 교육부 자녀를 둔 3-50대는 모두 교회에서 청년기를 보냈더라도 모두 이 형식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전통예배를 드리는 청년부를 보신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굳이 예배 때 하지 않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젊은 세대일수록 탈교단화와 영적경험추구의 특징이 강합니다. 어느 교단이냐, 심지어 어떤 신조냐도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회를 찾는다는 말입니다. 새벽기도에서 주기도문하고, 성찬식에서 사도신경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예배에서는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강조하지 않는데 익숙합니다. 30대에서 50대 청장년층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그들의 자녀가 영유아부에서부터 중고등부의 다음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이민교회에서 그 세대는 대개 부모와 함께 교회에 나옵니다. 그들이 금방 청년부, em이 됩니다. 왜 당회가 있는데 운영위원회를 또 만듭니까? 운영위원회를 하지 않으면 젊은 세대의 음성을 듣고 교감할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회는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5, 60대 이상의 장년들만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왜 남녀를 반반으로 당회원을 세웁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부장적 문화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형제, 자매로 호칭을 통일합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에 뿌리박힌 서열화, 계급화 문화를 극복할 길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7. 희생없이불가능한선교
물론 이는 기성세대의 어느 정도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익숙치 않은 것에 불편합니다. 그러나 이 정도 불편과 희생도 감수하지 못 하겠다면 우리는 선교니, 섬김이니 하는 소리를 하면 안 됩니다. 자기희생 없이 어떻게 섬기고 선교합니까? 예루살렘 초대교회도 이방선교를 위해 자신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율법준수를 이방인들에게 요구하지 않기로 하는 엄청난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연히 정통 유대인에게 불편하고 불쾌하고 커다란 희생을 요구하는 결정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에게 편안한 대로 이방인들에게 교회에 들어오려면 율법을 다 지키라고 결정했다면 복음의 불꽃은 조선땅 근처도 못 오고 사그라들고 말았을 것입니다.
불편하고 어렵지만 이런 노력을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어느 새 우리의 다리근육이 경직되듯 교회근육도 딱딱하게 경직되고야 말 것입니다. 다음 세대와 공존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는 순간 우리 교회도 개혁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듯 새시대를 담는 새로운개혁교회가 되길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