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9:1-9/가족같은 교회의 늪
251109 주일설교
1. 건강한 구역의 미래
지난 주일 점심식사 후에 27개 구역의 섬김이 도우미들이 모임을 가졌습니다. 올 해 구역모임의 현황을 나누고 내년도 계획을 세우는 자리였습니다. 각 구역일꾼들은 분가와 분갈이, 유지 중 하나를 선택케 했습니다. 분가는 구역모임이 건강하게 성장해서 둘로 나누는 것으로 모든 구역이 지향하도록 요청받는 선택지입니다. 분갈이는 새로운 성장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두 개의 구역을 각각 A와 B, C와 D로 나누어 A는 다른 구역의 C와, B는 다른 구역의 D와 새로 묶는 방식입니다. 유지는 아직 분가나 분갈이를 하지 못 할 상황일 때 선택합니다. 모든 구역은 분가를 권유받고, 혹은 미래에 분가하기 위해 분갈이를 권유받습니다. 유지를 택할 경우 분가계획을 세우도록 권유받습니다. 다음 주일의 구역모임에서 구역식구들과도 의논하시기를 바랍니다.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 구역모임은 이대로 너무 좋은데 굳이 분가를 해야 합니까? 성장하지 않으면 잘못된 모임인가요? 분갈이는 또 왜 해야 하나요? 주일 하루라도 좀 편한 마음으로 구역모임 하고 싶은데 낯선 구역식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피곤하지 않나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말씀이 주십니다.
2. 황홀경에 머무르고 싶다
오늘 본문은 흔히 변화산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십자가의 고난을 예고하시고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가르치신 후 산에 올라가셔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사건입니다. 교회전승은 그 산을 이스르엘 평원에 있는 다볼산이라고 합니다. 본문은 1절에서 일부 제자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목격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막 9:1) 그리고서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은 문맥상 바로 뒤에 이어지는, 엿새 후 변화산에서의 초월적 경험을 가리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예수님이 변형되셨는데 옷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동시에 예수님 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대화하셨습니다. 이 때 5절의 베드로의 반응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막 9:5) 이 광경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선생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 곳에 천막 셋을 세워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각각 모시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의 말은 산을 내려가지 말고 여기 집짓고 삽시다, 하는 뜻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6절이 답입니다.
(막 9: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것은 그들이 몹시 무서워했기(영광에 크게 압도되었기) 때문이었다.
‘몹시 무서워했다’는 표현은 헬라어 ἔκφοβος(엑포보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가 쓰인 히 12:21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경외감을 가졌다는 의미로도 번역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무서워했다는 번역보다는 ‘영광에 압도되어 경외감에 사로잡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베드로가 한 말도 그 근거인데, 그 무서워 했다면 ‘여기서 빨리 떠납시다’라고 해야 할텐데, 오히려 그는 ‘여기에 집짓고 사십시다’라고 했습니다. 떠나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가 종교적 황홀경에 사로잡혀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상태를 가리킨다고 봐야 합니다.
어느 의사가 쾌락의 강도에 대해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적 쾌락의 열 배 쯤 되는 것이 마약의 쾌락이고, 마약의 열 배 쯤 되는 것이 종교적 쾌락이라고 합니다. 쾌락을 계량화할 수는 없으니 이 말은 강조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데, 그만큼 종교적 환희, 황홀경이 강렬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베드로처럼 성령체험을 하는 이들은 강렬한 깨달음과 기쁨 혹은 황홀경을 느낍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자유를 주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평화를 느낍니다. 이 경험이 너무나 강렬하고 감미로운 나머지 그저 그 상태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욕구를 자연스럽게 느낍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주님을 위해 살고 싶다는 결단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그런 상태를 다시 체험하려고 기도원이나 수련회 등을 쫓아다니는 예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 체험을 했다는 이가 부러워 체험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보기도 합니다. 이런 체험은 왜 일어나는 것이며, 이에 대한 마땅한 태도는 어떤 것일까요?
3.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키는 분
그반응은 어떠했습니까? 7절에서 그들은 구름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막 9:7) 이때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구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은 율법을 아는 이라면 귀에 익숙한 신명기 18장에서 모세가 한 예언이었습니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즉 예수님이 모세가 예언한 이 선지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타난 모세 역시 이 사실을 뒷받침하였습니다. 또한 엘리야는 하나님이 마지막 시대에 보내실 예언자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의미하는 말라기 4장의 예언을 상기시켰습니다.
(말 4:5) 보라! 나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를 보내겠다.
모세와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일으키실 선지자요, 예언자이심을 상징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키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선지자였는데, 오늘날의 구약입니다, 이 중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준 인물이 모세이고,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죽지 않고 승천한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출현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의 모든 책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키고 있는 오실 메시야, 모든 예언이 수렴되는 인물 구원자이시라는 뜻입니다.
4. 그의 말을 들으라
다시 구름 속 음성으로 돌아가면 베드로와 제자들은 황홀경에 사로잡혀 이 산에 머물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자 마지막 시대의 구원을 행할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가? 바로 본문의 전문맥에서 이 산을 올라오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당부입니다.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이것이 진짜 생명의 길이다. 즉 제자들은 황홀경에 머무르려 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진정한 생명의 길인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체험과 같은 종교적 황홀경을 바라거나 누리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 산에 열두 제자 중 세 명을 골라 데리고 올라오신 이가 예수님입니다. 왜 하필 이 세 명입니까? 이들이야말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데 앞장 서야할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교회가 받는 첫 박해부터 가장 먼저 감옥에 갇히고 위협을 받았습니다. 야고보는 열두 제자 중 가장 먼저 순교합니다. 이들이 감당할 박해를 견뎌내는데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보는 이 경험이 큰 힘이 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구름속 음성으로 하나님이 이들에게 경계하신 것은, 이 체험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체험이나 은사, 깨달음, 재능과 성공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가? 그것으로 우리 자신을 자랑하고 과시하고 안주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와 능력과 재능과 기회를 가지고 섬기고 전하고 희생하는 십자가의 길을 감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최근 일곱 분의 장로피택자를 세웠습니다. 왜 세우셨습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처럼 제일 먼저 감옥에 갇히고 죽으라고 세우신 것입니다. 피택되었다고 좋아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피택되려고 애쓰고 안 되었었다고 섭섭하고 억울하다면 직분이 뭔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회장, 단장, 반장처럼 명예직이고 권세직인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의 가장 큰 부작용이 이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보니 어떻게 믿어야 하고 살아야 하는지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고 훈계하려는 사람들이 교회에 점점 늘어납니다. 제자훈련이 바리새인 양성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신이 순종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뜻입니다. 교회를 보니 이것이 부족하고 저것이 아쉬운 게 보입니다. 그것으로 왜 안 하냐고 비판하지 말고 그 빈 곳을 네가 채우라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5. 머물고 싶은 유혹과 흩어지라는 명령
자,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교훈이 우리 구역모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종교적 황홀경의 체험은 장차 완성될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미리 맛보는 예고편인 동시에, 그 때까지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힘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황홀함에 머물려 하거나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말고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동력으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같은 원리가 구역모임에도 적용됩니다. 우리 구역은 가족같습니다. 너무 친합니다. 너무 좋아서 고단한 이민생활의 활력소요, 언제까지나 이 분들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구역모임 자체를 목적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모임의 수용성이 떨어집니다. 수용성이란 외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말합니다. 행복한 모임자체가 목적이 되어 시간이 흐르면 어느 새 외부인을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사라집니다. 오히려 우리와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이 들어와서 모임 분위기가 와해될까봐 꺼리게 됩니다. 수용의 의지가 사라진 것입니다. 또 외부인이 들어와도 기존멤버와 맺은 관계가 너무 밀착되어 있어 비집고 들어온 틈이 사라져 버립니다. 수용의 능력도 떨어졌습니다. 한마디로 더 이상 외부인을 전도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죽은 모임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끼리는 너무 따뜻한데요? 교회 밖에도 그 정도 따뜻한 모임은 많습니다. 구역모임이 그들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모든 민족을 제자삼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키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려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점입니다. 전도할 의지가 없는데 무슨 수로 제자를 삼으며, 불편함과 어색함도 못 견딘다면 십자가의 길은 어떻게 갑니까?
예전 교회에서 새가족이 와서 여러 구역으로 골고루 배치를 했더니 두세 달이 지나면 새가족이 구역에 적응을 못 하고 하나 둘 사라집니다. 왜 그러세요? 저는 구역모임이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예배만 드릴게요. 그리고 나중에는 예배도 안 나옵니다. 구역에서 텃세를 부리나? 살펴 보니 제 눈에는 다 착한 교인들이예요. 아무도 새가족에게 나오지 말라고 텃세 안 부립니다. 대신 새가족을 환영할 줄을 모릅니다. 한마디로 수용성이 제로입니다. 같은 멤버끼리 십 년, 이십 년을 한 구역을 하다보니 숟가락 개수까지 셀 정도로 서로를 잘 압니다. 모이면 가족같아요. 그런데 수용성은 없습니다. 새가족이 이 구역에 들어오면 어색합니다. 솔직히 새가족에 관심이 없어요. 새가족에게 신경을 쓰는 것이 어색합니다. 불편합니다. 귀찮습니다. 몇 번 모임 하고 나면 새가족이 스스로 이방인 같고, 모임의 분위기를 깨는 것 같아서 안 나옵니다. 모임 분위기가 다시 화기애애해집니다.
전도는 사람을 교회에 출석케 하는 것 이상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과 삶과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며 그를 자신의 삶에 초대하는 것이며, 자신이 그의 삶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은 우리 삶의 견고한 울타리를 허물고 이웃과 삶을 공유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와 구역은 개방적이고 수용적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성도, 이방인에 대해 관심이 없는 구역이 어떻게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합니까? 그러므로 건강하고 성경적인 모임은 필연적으로 이방인을 초대하여 성령으로 생명을 낳고 성장하여 분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개방성과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 분갈이와 같은 방식으로 모임을 새롭게 할 필요도 있습니다. 황홀경의 목적이 십자가의 길이듯 행복한 구역모임의 목적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모든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