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16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나그네를 환영하는 나그네”(창세기 18:1-8) – 김도완 목사

11월 15, 2025

Series: 주일예배

Book: 창세기

창 18:1-16/나그네를 환영하는 나그네

251116 주일설교

1. 가족같은 교회의 

지난 주일에 ‘가족같은 교회의 늪’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교회가 외부인을 환영하는 수용성이 떨어지면 가족같은 분위기가 오히려 교회의 문턱을 높일 수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설교 후 한 자매님이 텍스트로 본인의 경험을 공유해 주셨습니다. 예전에 한 10여 명 정도의 교회에 출석했는데 문자 그대로 몇몇 가족이 모인 교회였던 모양입니다. 거기서 이 자매님은 가족모임에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으로 앉아있는 것 같고 심지어 자신이 투명인간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답니다. 가족같은 교회에서 가족으로 환영받지 못 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입니까!

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를 방문한 이들이 불청객이나 투명인간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건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열려있지 않고 폐쇄적이고 닫힌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향해 열려 있고 세상을 향해 달려가야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이 들어오지도 못 하게 닫혀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요, 무서운 죄인지 성경의 가르침을 들어보겠습니다.

2. 나그네를 환영하라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를 대접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가장 더운 시간 즉 지중해에서 시에스타라고 낮잠을 자거나 쉬는 시간에 나그네 세 사람이 천막입구에 선 것을 보았습니다. 무시하고 잠이나 더 자기를 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얼른 달려나가 엎드려 절하며 그들을 영접하고 무려 살진 송아지를 잡아 급히 요리를 해서 버터와 우유와 함께 나무그늘에서 먹도록 대접하고 자신이 옆에서 수발까지 들며 극진한 대접을 합니다. 보안을 위해 문을 걸어잠그고 사유지를 침범하면 총을 들고 나와 쏴도 되는 현대 미국에서 사는 우리에겐 무척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이렇게 한 것일까요? 먼저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고대근동 유목민 사회의 암묵적 약속입니다. 경찰력도, 호텔도, 대중교통도 없던 고대에 먼지방으로의 여행은 오늘날과 달리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현지인의 호의나 보호가 없다면 언제 강도떼나 추위와 들짐승과 굶주림에 재산과 목숨을 잃을지 모릅니다. 나그네는 가장 취약한 상태의 약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자신도 언젠가 동일한 상황에서 도움과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를 사회적 의무를 넘어 성도의 의무라고 하시며 그 이유도 이렇게 밝히십니다.

(히 13:2) 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정확히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는 그저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했을 뿐인데 18장 후반부로 가면 그 나그네들의 정체가 하나님과 두 천사로 드러납니다. 사회적 약자인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상기시켜 주신 진리입니다.

(마 25:40)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나그네, 작은 자, 소외된 자, 존중받지 못 하는 자를 존중하고 환영하는 것은 하나님나라 백성됨의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그런 나그네와 약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좀 보게 해 주세요’, ‘그럼 하늘을 보지 말고 아래를 내려다 봐라, 너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외면받는 그 사람 안에서 나를 볼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이들을 환영하고 대접해야 합니다.

4. 나그네를 외면하는 

반면 나그네를 외면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그네를 홀대하는 두 개의 악한 공동체가 소개됩니다. 첫째는 아브라함 시대의 소돔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세 나그네 중 두 천사만이 바로 다음 장 19장에서 소돔에 들어갔는데 그들은 홀대에 이어 위협을 당합니다. 소돔사람이 아닌, 그 자신도 나그네로서 머물고 있던 롯의 영접을 받아 그의 집에 머물지만 밤에 소돔사람들이 몰려와 그들을 성폭행하려 한 것입니다. 그들은 나그네를 위협했지만 결국 하나님을 위협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으로 잿더미가 됩니다.

둘째는 사사시대의 베냐민지파입니다. 삿 19장을 보면, 한 레위인이 여행 중 이방인이 아닌 동포의 도움을 받고자 일부러 이방인의 동네 여부스가 아닌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로 향합니다.

(삿 19:11) … 그때 종이 주인에게 ‘여부스에서 하룻밤 묵었다 가시죠’ 하자 (삿 19:12) 주인이 대답하였다.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없는 이 이방인의 성에 들어가서 쉴 수는 없다. 기브아까지 가겠다.’

하지만 정작 동포의 마을 베냐민 지파땅 기브아에서는 아무도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삿 19:15) 그들이 거기서 밤을 보내려고 들어가 (기브아) 성의 광장에 앉았으나 아무도 그들을 집으로 데려가 재워 주는 자가 없었다.

겨우 그들을 환영한 사람이 나타나는데 기브아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도 나그네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삿 19:16) 바로 그때 한 노인이 밭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본래 에브라임 산간 지대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베냐민 지파의 땅 기브아에 사는 노인이었다… (삿 19:20) 그때 노인은 ‘염려하지 말고 우리 집으로 갑시다. 당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내가 제공하겠소. 광장에서 밤을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소돔에서처럼 기브아에서도 밤에 그들을 약탈하고 폭행하려는 주민들이 있었고 결국 이 일로 베냐민전쟁이 일어나 기브아 사람과 베냐민 지파는 극히 일부의 남자들만 살아남을 정도로 몰살을 당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소돔과 기브아의 사례는 나그네를 홀대하는 공동체가 결국 누구를 홀대한 것인지, 그래서 어떤 심판을 당하는지를 경고하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5. 우리도 나그네였다

재미있게도 소돔과 기브아에서 나그네를 환영한 이들은 그 자신도 나그네였던 롯과 에브라임 출신 노인이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그 자신이 나그네인 자라야 나그네의 처량하고 다급한 심정을 안다는 뜻입니다. 아마 롯이나 이 노인은 나그네를 보고 자신이 처음 이 마을에 발을 내디뎠을 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을 때 느꼈던 막막함과 서러움을 떠올렸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바로 이 점을 상기하셨습니다.

(출 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희 조상 야곱의 가족이 흉년 때문에 애굽땅에 피신하여 신세지며 살 때 얼마나 서러웠는지, 또 얼마나 은혜를 입었는지 생각해 봐라. 이제 네가 이 가나안땅의 주인이 되었다고 나그네와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홀대하고 학대해서 되겠느냐?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 하고? 집주인, 건물주, 사장, 상사가 되었다고 직원, 일꾼, 세입자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해서야 되겠느냐? 너희도 다 남의 신세 지고 호의를 입고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았느냐!

이 진리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유대인들이 볼 때 하나님도, 율법도 모르는 이방인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초대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고 자비로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로 우리를 긍휼이 여겨주셔서 하나님나라에 초대받아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격도 없이 은혜에 빚진 자입니다. 신세진 자입니다. 환영받은 자입니다. 초대받은 자입니다. 우리도 우리 곁의 이방인, 외부인, 낯선 이들을 환영하고 대접함이 마땅합니다.

(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6.  주시는 하나님

이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로 돌아와보면 뒤늦게 정체를 드러내신 하나님은 이 자녀가 없는 노인에게 평생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 18:10) 그때 여호와께서 ‘내년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것이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마 25장으로 돌아와, 예수님도 작은 자에게 호의를 베푼 이들에게 이런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마 25:34) …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된 나라를 물려받아라.’

어제 우리교회 선교부와 몇몇 교우들이 패터슨에 있는 무슬림공동체를 섬기는 봉사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이민자들은 이 나라에 피신온 나그네입니다. 소돔과 기브아처럼 나그네를 외면하고 심지어 학대하는 공동체는 심판받습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들을 환영하고 대접하는 성도와 교회, 나라는 상을 받습니다. 누구보다 한인교회는 이민자로서 더더욱 그러해야 마땅합니다.

지난 주일에 등록한 새가족 자매님과 어떻게 우리교회에 등록하게 되었는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전주일에 처음 방문했는데 예배를 마치자 곁에 앉은 처음 보는 한 자매가 활짝 웃는 얼굴로 어떻게 우리교회 왔느냐며, 밥을 먹고 가라는 것입니다. 친교실에서 식사하는 동안 그 자매가 구역식구들을 하나하나 소개시켜주며 어찌나 친절하게 대해 주는지 낯설고 긴장된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졌습니다. 주중에 그 자매가 전화가 와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하는 말이 ‘제가 전화 컨택에 자매님 이름을 보배로운 누구누구님이라고 넣어놓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뭐라고 나를 보배롭다고 하나 순감 감동이 되어서 이번 주에도 교회에 가보고 싶더랍니다. 그리고는 라이드가 여의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주일에 소개받은 구역식구 한 분이 라이드를 도와주어서 지난 주일에도 교회에 왔는데, 교인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이 진심으로 이 교회생활이 행복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자신도 이 교회 다니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등록카드를 달라고 해서 썼다는 것입니다. 곁에 그 새가족을 환영한 자매님도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자신이 왜 이 자매님을 환영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교회생활이 행복하고 기쁜데 자신은 특별한 은사도 없어 뭘로 섬기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새가족이 보이며 친절하게 대해 주자고 결심을 했는데 마침 처음 보는 자매님 곁에 앉아서 그렇게 환영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과 교회와 나라에 찾아온 나그네를 환영하는 이들에게 이런 놀라운 상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마 10:42) ‘또 누구든지 …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교회가 나그네를 환영하는 나그네 되어 하나님이 예비하신 상받는 공동체되길 축복합니다.